외경과 정경 사이 6부: 집회서 vs 잠언 — 정경적 지혜와 경건한 지혜

외경과 정경 사이 6부: 집회서 vs 잠언 — 정경적 지혜와 경건한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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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장르, 다른 책

바룩서와 다니엘을 나란히 놓고 보았던 5부의 작업을 이제 한 번 더, 다른 장르에서 반복해 보자. 이번에 다룰 두 책은 서로 너무 닮아서 일반 독자가 보기엔 구별이 거의 불가능하다. 집회서(Sirach, 또는 Ecclesiasticus, 벤시라의 지혜)와 잠언(Proverbs)이다.

두 책 모두 히브리 지혜 전통의 자녀다. 두 책 모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한다. 두 책 모두 혀의 절제, 친구 사귐, 부모 공경, 가난한 자에 대한 자비를 가르친다. 장르·어법·경건의 온도까지 놀랍도록 닮았다. 실제로 루터는 집회서를 “읽기에 매우 유익한 책”(nützlich zu lesen)으로 분류했고, 종교개혁기 독일 가정의 경건 서재에는 잠언과 집회서가 한 선반에 꽂혀 있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개신교 성경은 잠언을 정경으로 받고 집회서를 외경으로 분류한다. 로마 가톨릭은 트리엔트 공의회(1546) 이후 집회서를 제2정경으로 공식 확정했다. 이 갈라짐 앞에서 개신교 독자가 마주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경건의 온도가 비슷한데, 왜 하나만 하나님의 말씀인가. 이 물음을 얕게 다루면 정경론은 단지 교단의 선택지로 보이기 시작한다.

이 편은 두 책을 네 지점에서 겹쳐 읽는다. 장르의 유사성 아래에서 영감의 결이 어떻게 갈라지는지가 그 네 지점에서 드러난다.


지점 1 — 저자의 자의식

잠언의 첫 줄은 이렇게 열린다.

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2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3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 잠언 1:1-3, 7

책은 언약의 왕의 입에서 시작된다. 아굴과 르무엘의 단락(30-31장)도 각자의 이름 아래 권위의 자리를 차지한다. 잠언은 여러 저자의 모음이지만, 각 저자가 “이 말씀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서 나왔다”는 자의식 위에 선다.

집회서의 서문은 전혀 다른 결이다. 이 책의 헬라어 역본은 기원전 132년경 저자의 손자가 쓴 긴 서문으로 시작한다.

“나의 할아버지 예수는 율법과 예언자와 우리 조상의 다른 책들을 부지런히 읽은 후… 스스로 교훈과 지혜에 관한 것을 저술하셨다… 나는 번역에 여러 가지로 수고하였으나, 히브리어로 말한 것이 다른 언어로 옮겨질 때 같은 힘을 지니지 못한다는 사실에 너그러이 이해를 구한다.”

— 집회서 역자 서문 (기원전 132년경)

그리고 본문 끝에서 저자는 자기 이름으로 서명한다.

“예루살렘 사람 엘르아살의 아들 시므온의 아들 예수가 이 책에 교훈과 지혜의 말씀을 기록하였노라… 이 모든 것을 행하는 자는 복이 있다.”

— 집회서 50:27-28 (사역)

이 자의식을 잘 들여다봐야 한다. 서문의 손자는 번역의 불완전성을 사죄한다. 저자 본인은 “나 벤시라가 기록했다”고 자기 이름을 남긴다. 이것은 경건한 현인의 자의식이지 예언자의 자의식이 아니다. 이사야가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로 입을 여는 무게, 모세가 시내산에서 말씀을 받아 적는 무게 — 그 무게와 벤시라의 “내가 부지런히 읽고 요약했다”는 무게는 다르다. 실제로 이 시대의 유대 공동체는 스스로 “선지자가 없는 시대”(마카베오상 9:27)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벤시라는 그 시대의 경건한 학자였지, 그 시대가 갖지 못한 예언자가 아니었다.

칼뱅이 「기독교 강요」 1권 7장에서 말한 핵심이 여기서 작동한다. 정경의 권위는 교회의 승인에서 오지 않고, 성령께서 저자를 사로잡으시고 독자 안에서 다시 증거하시는 두 끝의 동일한 사역에서 온다. 잠언의 저자들은 여호와께 사로잡힌 자의 자리에서 말한다. 집회서의 저자는 이 자리에 자신을 세우지 않는다. 그는 전통의 수집가이자 편집자로서 자기 이름을 남긴다.


지점 2 — 자선은 무엇을 하는가

두 책 모두 자비와 자선을 강권한다. 그러나 자선이 하는 일을 묘사할 때 펜의 방향이 갈라진다.

잠언의 자선은 여호와의 성품에 참여하는 순종이다.

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 잠언 19:17

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 잠언 11:25

자선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행위다. 여호와가 상환하신다. 자선의 열매는 가난한 자의 회복과 행위자 자신의 풍족함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잠언 어디에서도 자선이 행위자의 죄를 속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집회서의 펜은 여기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물이 타오르는 불을 끄듯이 자선은 죄를 속한다(exilasetai hamartias).”

— 집회서 3:30 (헬라어 70인역 기준 사역)

“네 힘에 따라 자선을 베풀라… 너는 자선으로 참된 보물을 쌓는 것이니, 그것이 모든 재난에서 너를 건져내리라.”

— 집회서 29:11-12 (사역)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 집회서는 “자선은 죄를 속한다”고 말한다. 여기 사용된 동사 엑실라세타이(ἐξιλάσεται)는 70인역에서 제사장이 속죄제를 드려 죄를 덮는 행위에 쓰이는 단어다. 이 단어를 인간의 자선 행위의 효력으로 옮겨 놓는 순간, 속죄의 구조가 재배치된다. 속죄의 주체가 제사장에서 구제자로, 수단이 제사에서 행위로 옮겨간다.

신약은 이 자리에서 전혀 다른 문법을 쓴다.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 로마서 3:25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 에베소서 2:8-9

속죄의 주체는 그리스도 한 분이고, 수단은 그의 피이며, 수혜의 통로는 믿음이다. 자선은 구원의 열매이지 구원의 수단이 아니다. 집회서 3:30의 문장이 교회의 정경 안에 규범으로 자리 잡을 때, 이 문법은 흔들린다. 역사가 보여주듯 연옥·면벌부·공로 저장소의 신학이 자라난 한 뿌리가 이 본문이다. 트리엔트 공의회가 연옥 교리를 변호하며 집회서를 인용할 때, 이 연속성은 우연이 아니었다.

잠언은 이 방향으로 한 발도 내딛지 않는다. 잠언 16:6 —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 은 인간의 덕이 아니라 여호와의 헤세드(인자)와 에메트(진리)를 속죄의 근거로 들어 올린다. 같은 지혜 전통 안에서 잠언은 십자가를 향해 열려 있고, 집회서는 인간의 행위 쪽으로 닫힌다.


지점 3 — 인간의 의지는 어디에 서 있는가

두 책의 인간관을 나란히 놓으면 차이가 더 선명하다.

집회서 15장은 이렇게 말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그를 자기 충고에 맡기셨으니… 생명과 사망이 네 앞에 놓였으니 네가 원하는 대로 받으리라. 사람 앞에 물과 불이 있으니, 그가 원하는 대로 손을 내밀 수 있다… 그는 누구에게도 불경건하게 행하라 명하지 아니하시며, 누구에게도 죄 짓는 허가를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 집회서 15:14-17, 20 (70인역 기준 사역)

문장 자체는 경건하다. 하나님은 죄의 원인이 아니시다 — 이 진술은 참이다. 그러나 그 진술의 프레임이 문제다. 집회서 15장은 생명과 사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중립적 인간 의지를 전제한다. 5세기 펠라기우스가 이 본문을 아우구스티누스에 맞서 결정적 무기로 사용했고, 트리엔트가 루터에 맞서 같은 본문을 인용했던 이유가 여기 있다.

잠언의 세계는 다르다.

1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 잠언 16:1

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 잠언 16:9

33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 잠언 16:33

1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 잠언 21:1

이 네 구절이 반복하는 것은 단순한 섭리론이 아니다. 인간의 계획과 마음과 결정 그 자체가 여호와의 주권 아래 있다는 선언이다. 잠언의 인간은 선택한다. 그러나 그 선택 안에서도 여호와가 일하신다. 집회서 15장의 “네가 원하는 대로”와 잠언 16:9의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는 같은 인간을 보는 두 다른 시선이다.

이 차이가 작아 보이는가. 로마서 9장과 에베소서 1장이 잠언의 시선 위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난다는 것을 본다면 그렇지 않다.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전 7:20)는 전도서의 문장과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왕상 8:46)의 솔로몬의 기도는 잠언과 결이 같다. 집회서의 자유의지관은 신약의 인간론에 들어가면 삐걱인다. 같은 유기체의 세포가 아니다.


지점 4 — 지혜는 무엇이 되는가

가장 결정적인 지점이다. 두 책 모두 지혜의 인격화를 시도한다. 잠언 8장과 집회서 24장이다. 나란히 읽으면 펜의 방향이 어디로 꺾이는지 선명하게 보인다.

잠언 8장의 지혜는 창세 전부터 여호와와 함께 있다.

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23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27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31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 잠언 8:22-23, 27, 30-31

이 지혜는 창조에 참여한다. 창조의 기쁨 속에서 인간을 향해 열려 있다. 신약은 이 본문 위에서 성육신을 읽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요한복음 1:1, 3, 14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 골로새서 1:15-17

잠언 8장의 지혜가 골로새서 1장의 그리스도로 자란다. 지혜의 선재성, 창조의 동반자, 인자를 향한 기쁨 — 이 세 선이 성육신에서 한 점으로 모인다.

집회서 24장은 어디로 가는가.

“지혜는 자기 백성 가운데서 자랑하며, 지극히 높으신 이의 회중에서 자기 영광을 말하느니라… ‘나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입에서 나왔고, 안개처럼 온 땅을 덮었노라…’ 창조자가 내게 명하여 ‘야곱 가운데 네 거처를 삼고 이스라엘 가운데 네 기업을 받으라’ 하셨도다… 이 모든 것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언약책이니, 곧 모세가 우리에게 명한 율법이라.”

— 집회서 24:1-2, 3, 8, 23 (사역)

지혜는 창조에 참여한다는 모티프까지는 잠언 8장과 같다. 그러나 결론이 다르다. 집회서의 지혜는 모세 율법 두루마리 안에 접혀 들어간다. 24:23이 문을 닫는다. “이 모든 것은… 모세가 우리에게 명한 율법이라.

이것이 왜 결정적인가. 율법 두루마리는 육신이 되지 않는다. 율법 두루마리는 베들레헴의 말구유로 내려올 수 없고, 골고다의 십자가로 올라갈 수 없다. 잠언 8장의 지혜는 인격으로 그려졌기에 성육신할 수 있었다. 집회서 24장의 지혜는 경건한 토라 중심주의의 표현이지만, 바로 그 좁은 지평 때문에 그리스도를 낳을 수 없다.

이 점에서 두 책의 영감의 결이 가장 뚜렷이 갈라진다. 성경의 영감은 단지 문장의 무오성을 보존하는 일이 아니라, 각 책이 그리스도를 향해 유기적으로 짜여지는 일이다. 바빙크가 「개혁교의학」 1권에서 정경의 유기성(organisch karakter)을 강조한 이유가 이것이다. 잠언 8장은 이 유기체의 한 기관이다. 집회서 24장은 경건하나 이 기관이 되지 못한다.


신약의 호출이 남긴 흔적

또 하나의 단서가 있다. 잠언은 신약에서 “성경에 이르되”의 공식 아래 직접 인용된다.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 히브리서 12:5-6 (잠 3:11-12 직접 인용)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 야고보서 4:6 (잠 3:34 인용; 벧전 5:5도 같은 구절을 독립적으로 인용)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 로마서 12:20 (잠 25:21-22 인용)

사도들은 잠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호출한다. 논증의 중심에 잠언 구절을 놓고, 그 위에서 결론을 세운다.

집회서는 이 공식 아래 신약에 인용되지 않는다. 야고보서의 몇몇 구절(약 1:19의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가 집회서 5:11과 울림을 낸다는 관찰 등)이 집회서와 주제적으로 통한다는 학자들의 지적은 있다. 그러나 “성경에 이르되”라는 권위적 호출이 없다. 사도들이 오경·시편·잠언·이사야를 인용할 때의 그 무게가, 집회서에는 실리지 않는다. 이것은 사도들의 성경 목록이 그은 경계선의 흔적이다.

누가복음 24:44 —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 은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히브리 정경의 세 부분(토라·네비임·케투빔)을 확인해 주신 장면이다. 잠언은 케투빔의 중심이다. 집회서는 이 목록 바깥에 있다.


경건한 지혜와 영감된 지혜

이 네 지점 — 저자의 자의식, 자선의 효력, 인간의 의지, 지혜의 귀결 — 을 모으면 집회서의 성격이 분명해진다. 경건한 지혜다. 그러나 영감된 지혜는 아니다.

이 구분을 얕잡아 보지 말자. 집회서를 외경으로 분류한다는 것은 이 책을 폐지한다는 뜻이 아니다. 루터가 그랬듯 경건한 독서 목록에 올려 둘 수 있다. 벤시라의 혀의 절제 경고(집회서 19장), 친구 사귐의 지혜(집회서 6장), 부모 공경의 강권(집회서 3장)은 오늘도 유익하다. 그러나 이 유익함이 정경의 권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경과 비(非)정경의 경계는 문장의 옳고 그름으로 그어지지 않는다. 정경은 성령께서 사로잡으신 저자의 입에서 나와, 그리스도를 향해 유기적으로 자라는 책들의 목록이다. 바빙크의 세 층위 — 자증성, 사도적·예언적 기원, 교회의 수용 — 가 이 목록의 경계를 설명한다.

잠언의 저자들은 여호와께 사로잡힌 자의 자리에서 말했다. 잠언 8장의 지혜는 골로새서 1장의 그리스도로 자랐다. 잠언의 구절들은 사도의 펜 아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호출되었다. 교회는 이 책을 정경으로 받을 때 만들지 않고 받았다(ecclesia non est mater, sed filia Scripturae).

집회서의 벤시라는 경건한 현인의 자리에서 썼다. 그의 지혜는 모세 율법 두루마리 안으로 접혔고, 사도들은 이 책을 성경으로 호출하지 않았다. 트리엔트의 정경 확정(1546)은 이미 오랫동안 라틴 전통이 유지해 온 “교회서(ecclesiastical) 분류”를 종교개혁의 sola scriptura에 맞서 뒤늦게 지운 결정이었다. 히에로니무스는 불가타 번역에서 집회서를 “읽기에 유익한 책”으로 분리해 두었다. 종교개혁은 이 오랜 경계를 재확인했을 뿐이다.


같은 장르를 걷되 다른 문을 연다

오늘 우리가 잠언을 펼칠 때, 우리는 단지 지혜로운 격언집을 읽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책이 그리스도를 향해 자라는 한 기관임을 알고 읽는다. 잠언 1:7의 “여호와 경외”가 마태복음 11:29의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로 성취되는 것을 본다. 잠언 8장의 지혜가 요한복음 1장의 성육신으로 흘러가는 것을 본다. 잠언 16장의 주권이 로마서 9장의 택하심으로 펼쳐지는 것을 본다. 이 연결이 보이는 독서와, 이 연결 없이 경건한 격언을 모으는 독서 — 두 독서는 같은 책을 펼쳐도 다른 문을 연다.

집회서는 그 두 번째 종류의 유익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첫 번째 종류의 유익은 주지 못한다. 그래서 경계는 필요하다.


시리즈를 여기까지 따라온 독자는 이제 한 가지 궁금증에 도달했을 것이다. 우리는 1부에서 6부까지 외경의 안쪽을 여섯 개의 문에서 두드려 보았다. 지혜서의 그리스도 같은 그림자, 마카베오의 선지자 없는 시대, 7권이 만든 교리들, 유딧의 거짓말, 바룩의 모방된 기도, 그리고 이번 편의 집회서. 매번 같은 결론이었다 — 경건하나 영감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결론 뒤에 남는 질문이 있다. 그렇다면 정경의 경계선은 실제로 어떻게 그어졌는가. 유대 공동체는 언제, 어떤 과정으로 자기 정경을 확정했는가. 초대 교회는 어떻게 이 경계를 받아들였는가. 히에로니무스에서 종교개혁까지, 라틴 전통이 유지한 경계는 어떻게 트리엔트에서 지워졌는가.

다음 편은 이 정경 형성의 실제 역사로 들어간다. 외경의 안쪽이 아니라 정경의 바깥쪽, 그 경계가 그어진 시간의 순서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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