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경과 정경 사이 4부: 유딧기의 거짓말 — 외경의 윤리는 왜 다른가

외경과 정경 사이 4부: 유딧기의 거짓말 — 외경의 윤리는 왜 다른가

#성경론#외경#정경#유딧기#가톨릭

한 여인이 적장의 목을 벤 이야기

유딧기는 드라마틱한 책이다. 아시리아 장군 홀로페르네스가 유대를 침공해 베툴리아 성읍을 포위한다. 물이 끊기고 항복 직전, 경건한 과부 유딧이 하나님께 기도한 뒤 가장 아름다운 옷을 꺼내 입고 향유를 바른다. 그녀는 적진에 투항하는 척 들어가 사흘 밤낮을 머무르다가, 홀로페르네스가 취한 네 번째 밤 그의 목을 베어 자루에 담아 성으로 돌아온다.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

이 책은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에서 정경이다. 트리엔트 공의회(1546)가 공식 확정했고, 수많은 가톨릭 교회당 천장에서 유딧은 베르니니·카라바조·젠틸레스키의 붓으로 찬양되어 왔다. 반면 개신교 정경에는 들어 있지 않다. 같은 책을 놓고 두 교회가 다르게 판단한 것이다.

이 차이 앞에서 개신교가 종종 빠지는 함정이 있다. “외경은 그저 거짓말투성이 책이니 뺐다”는 단순한 우월감이다. 이것은 정직하지 않다. 유딧기는 용감한 여인의 신앙과 공동체의 간절한 기도를 담고 있고, 수 세기 동안 박해받는 성도들에게 용기를 준 책이다. 가톨릭 형제들이 이 책을 사랑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정직하게 묻자. 유딧의 속임수는 정경 안의 거짓말들 — 라합, 야엘 — 과 같은 범주에 있는가? 만약 다르다면,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이 질문 앞에 서는 것이 가톨릭 형제를 존중하는 길이면서 동시에 개신교가 왜 이 책을 정경에서 구분하는지를 설명하는 길이다.


정경 안의 두 거짓말 — 라합과 야엘

여호수아 2장에서 여리고의 기녀 라합은 정탐꾼을 지붕에 숨긴다. 추격자들이 문을 두드리자 그녀는 거짓을 말한다.

4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이르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5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내가 알지 못하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을 따라잡으리라 하였으나

6 사실은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7 그 사람들은 요단 나루터까지 그들을 쫓아갔고 그들을 뒤쫓는 자들이 나가자 곧 성문을 닫았더라

— 여호수아 2:4-7

사사기 4장의 야엘은 한 걸음 더 나간다. 도망쳐 온 시스라에게 “두려워 말라”며 장막 문을 열어주고 우유로 재운 뒤, 그가 잠들자 말뚝을 관자놀이에 박아 죽인다.

신약은 두 여인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히브리서 11장은 라합을 믿음의 반열에 세운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야고보서는 그녀의 행위를 칭송하되, 그 행위를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보낸 일”(약 2:25)로 표현한다. 드보라의 노래는 야엘을 “장막에 거한 여인 중에 가장 복을 받을 것이로다”(삿 5:24)라 부른다.

여기서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 정경은 두 여인의 거짓말 자체를 덕으로 칭송하지 않는다. 히브리서는 라합의 “영접”과 “순종”을 칭송하고, 야고보는 “접대”를 말한다. 드보라의 노래조차 야엘의 살인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수를 붙이신 섭리의 신비 앞에 선 경이로 부른다. 거짓말은 기록되되 추천되지 않는다. 정경은 이 긴장을 해소하지 않고 남겨 둔다 — 타락한 세계의 도덕적 무게와 하나님의 섭리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성경은 설교하지 않고 증언한다.

절제된 침묵이 정경의 문법이다.


유딧기의 다른 문법

이제 유딧기를 펼치자. 차이는 본문 자체에서 드러난다.

유딧은 홀로페르네스에게 접근하기 전에 기도한다. 그 기도는 구약 탄원시의 리듬을 따르지만, 한 구절에서 결정적으로 갈라진다.

나의 입술의 속임수로 종과 상관에게, 상관과 노예에게 상처를 주게 하소서. 그들의 교만을 여인의 손으로 꺾으소서.

— 유딧 9:10, 13 (가톨릭 성경, 공동번역 기반)

속임수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의 내용으로 올려진다. 이것은 라합·야엘의 서사가 취한 문법이 아니다. 라합은 기도한 뒤 거짓말하지 않는다. 야엘의 시스라 살해 앞에는 기도가 없다. 정경은 행위와 기도를 나란히 놓지 않는다. 그러나 유딧기는 속임수를 거룩한 간구의 대상으로 구조화한다.

그리고 11장 전체에 걸쳐, 유딧이 홀로페르네스에게 늘어놓는 거짓말은 서사적으로 경탄의 대상이 된다. 독자는 그녀의 기지와 담대함을 따라가며 감탄하도록 유도된다. 12장에서 그녀는 이방인의 음식을 엄격히 피하는 율법주의적 완벽성의 표본으로 제시되고, 13장에서 그의 목을 벤 뒤 성읍 사람들은 그녀를 “우리 민족의 큰 영광”으로 찬양한다(유딧 15:9).

라합과 야엘의 서사에서 발견되는 절제된 침묵이 여기에는 없다. 유딧의 속임수는 서사 전체가 이상화(idealization)하는 덕목으로 제시된다. 이 차이는 작지 않다.

하나를 더 덧붙여야 한다. 민수기는 하나님의 성품을 이렇게 선언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 민수기 23:19

디도서는 복음의 토대를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딛 1:2)의 신실성 위에 세운다. 하나님께 속임수를 간구하는 기도의 문법은, 이 하나님 이해와 반대 방향으로 기운다. 유딧기를 정경으로 받으면, 이 긴장을 한 성경 안에서 해소해야 한다. 해소는 쉽지 않다.


역사의 결을 바꾸는 책

유딧기의 또 다른 특징은 역사 서술에 있다.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시리아의 왕 네부카드네살이 니느웨에서 큰 성읍을 통치하던 열두째 해에…”(유딧 1:1)

정경의 독자는 여기서 멈칫한다. 네부카드네살은 바빌로니아의 왕이다(주전 605–562). 그리고 그 시대의 니느웨는 이미 폐허였다 — 주전 612년에 메대와 바빌로니아 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 더 나아가 유딧기는 이 침공을 포로귀환 이후 시점으로 설정한다(유딧 4:3, 5:19). 바빌로니아 왕이 이미 죽고 바빌론 제국이 망한 뒤, 죽은 왕이 폐허가 된 니느웨에서 유대를 친다는 설정이다.

학계 다수는 이 역사 서술을 단순한 실수로 보지 않는다. 책의 저자는 주전 2세기경 — 아마 마카베오 항쟁의 분위기 속에서 — 쓰면서, 의도적으로 역사적 인물들을 재배치하여 교훈적 단편 서사를 구성했다. 이는 “옛날 옛적에” 같은 문학적 설정에 가깝다. 책 자체가 자신이 역사 기록이 아니라 신앙적 상상의 산물임을 독자에게 신호하고 있다.

정경은 이런 방식으로 쓰이지 않았다. 정경 기자들은 다윗의 간음과 살인을 감추지 않고, 열두 제자의 무지와 배반을 생생히 적으며, 고고학의 칼날 앞에 자기 기록을 내놓는다. 정경의 역사적 정직성은 성령의 감독 아래 기록된 문서가 갖는 고유한 결이다. 유딧기의 결은 다르다 — 이는 책의 가치를 부정하는 판단이 아니라, 장르의 판별이다.


교회는 어머니인가, 딸인가

여기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근본 차이로 들어가야 한다. 이 차이를 피하면 외경 논쟁은 그저 감정 싸움이 된다.

로마의 입장은 이렇게 요약된다. 성경은 교회의 품 안에서 자라났고, 공의회의 판단을 통해 정경이 확정되었다. 트리엔트(1546) 제4회기의 결정은 이 구조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성경의 권위와 교회의 권위는 상호 증언하는 두 기둥이다.

개혁주의의 입장은 다른 방향을 향한다. 바빙크는 이를 한 문장으로 압축한 바 있다. “교회는 성경의 어머니가 아니라 딸이다”(ecclesia non est mater, sed filia Scripturae). 교회가 정경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감으로 주신 책들을 교회가 인지하고 수용하고 증언한 것이다. 정경 결정은 교회의 창조 행위가 아니라 발견(recognitio)이다.

역사는 이 입장을 지지한다. 히브리 구약 정경 — 마소라 텍스트의 범위 — 은 주후 1세기 이전에 이미 유대 공동체 안에서 확립되어 있었다. 예수께서는 이 정경의 삼분법을 그대로 가리키신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 누가복음 24:44

신약은 구약을 560회 이상 인용하지만, 유딧기를 포함한 외경 어느 책도 “성경에 기록된 바”라는 공식 아래 인용되지 않는다. 초기 교부들 사이에서도 의견은 갈렸다. 4세기의 히에로니무스(제롬)는 불가타를 번역하며 히브리 원전 기준으로 외경을 명확히 구분했다(그의 Prologus Galeatus). 어거스틴은 라틴 교회의 전례 관행을 존중해 넓게 수용하는 쪽을 택했다. 이 긴장은 중세 내내 해소되지 않았다. 트리엔트는 1,500년의 미결 문제를 라틴 전통 쪽으로 공식 결정한 것이지, 고대 교회의 일치된 합의를 반복한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외경을 정경에서 구분한 것은 “책을 뺀” 행위가 아니라, 히브리 정경의 경계 — 예수와 사도들이 사용한 그 경계 — 를 회복한 행위다. 이 지점이 가톨릭과 개신교가 정직하게 갈라서는 자리다.


존중하며 구분한다

가톨릭 형제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몇 가지를 분명히 하고 싶다.

첫째, 유딧기를 정경으로 받는 판단을 이단이라 말하는 것은 개혁주의의 입장이 아니다. 이 문제는 공교회의 형제들 사이의 견해 차이이며, 그 차이의 뿌리는 교회론과 계시론의 근본 구조에 있다. 우리는 같은 니케아 신경, 같은 사도신경을 고백한다. 삼위일체와 성육신과 부활의 복음 위에서 우리는 한 가족이다.

둘째, 유딧기의 문학적·영적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개혁주의의 입장이 아니다. 루터는 외경을 구약과 신약 사이에 부록으로 실으며 “성경과 동등하지 않지만 읽기에 유익하고 좋은 책들”로 자리매김했다. 박해받는 공동체의 용기, 여인의 담대한 신앙, 공동체의 집단적 간구 — 이런 요소들은 일반은혜(gratia communis)의 증거로 존중받을 만하다. 버리라가 아니라 구분하라가 우리의 입장이다.

셋째, 그러나 이 구분은 사소한 행정적 결정이 아니다. 책이 신앙과 삶의 규범(regula fidei et vitae)으로 기능할 때, 그 책의 윤리와 신학은 성도의 삶에 스며든다. 속임수를 거룩한 간구로 올리는 기도의 문법이 규범으로 들어오면, 기도의 결이 달라진다. 역사를 자유롭게 재배치하는 서사가 영감된 기록으로 받아들여지면, 정경 해석의 결도 달라진다. 이것이 개혁주의가 유딧기를 경건한 문학으로는 존중하되 정경으로는 받지 않는 이유다.

바울의 마지막 선언으로 돌아간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 디모데후서 3:16

“하나님의 감동”(θεόπνευστος, 데오프뉴스토스) — 하나님의 숨결로 된 것. 이 숨결의 경계를 어디에 그을 것인가에 대해, 우리는 예수와 사도들이 사용한 경계를 따른다. 유딧의 칼이 덕의 상징이 되는 서사와, 라합의 거짓말이 침묵 속에 기록되는 서사 사이의 차이는, 결국 이 숨결의 흔적이 어느 결을 남겼는가의 문제다.


시리즈를 여기까지 따라온 독자는 한 가지 불편한 질문 앞에 서게 된다. 만약 정경과 외경의 경계가 이토록 분명하다면, 왜 1,500년 동안 교회는 이 문제를 정리하지 못했는가. 그리고 오늘 우리 손에 들린 성경 66권은 어떤 과정을 거쳐 이 목록으로 확정되었는가. 정경 형성의 실제 역사로 들어가지 않으면, 이 시리즈는 미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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