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권이 바꾼 것은 목차가 아니라 지형이다
외경 논쟁을 “가톨릭 성경이 개신교 성경보다 일곱 권 더 많다”는 분량의 문제로 축소하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친다. 토비트·유딧·마카베오상·마카베오하·지혜서·집회서·바룩서. 이 일곱 권이 들어오면 단지 페이지 수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교리 지형 전체가 바뀐다. 연옥이 생기고,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정당화되며, 선행이 죄를 상쇄할 수 있다는 거래 신학이 등장하고, 죽은 성인들이 중보자로 격상되며, 마침내 그 모든 구조 위에 면벌부가 얹힌다.
우연이 아니다. 루터가 95개조로 면벌부를 공격한 해가 1517년이고, 트렌트 공의회가 외경을 정경으로 확정 선포한 해가 1546년이다. 불과 한 세대의 격차다. 로마 가톨릭은 종교개혁자들이 가장 날카롭게 공격한 교리들 — 면벌부·공로·성인 전구 — 의 성경적 지지 기반을 잃지 않기 위해 외경의 정경 편입을 공식화해야 했다. 이 세 장을 잇는 시리즈의 3부는 바로 그 지점을 다룬다. 7권을 더하면 기독교는 왜 달라지는가. 본문을 펴 놓고 하나씩 짚어보자.
연옥과 죽은 자를 위한 기도 — 마카베오하 12장
연옥 교리의 가장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증거 본문은 마카베오하 12:39-45이다. 유다 마카비가 전투 후 전사자들의 옷 속에서 야므니아의 우상을 발견하자, 그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2천 드라크마를 보내 속죄제를 드리게 했다는 이야기다. 저자는 이렇게 주석한다.
만일 그가 전사자들이 다시 살아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쓸데없고 헛된 일이었을 것이다. … 그러므로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렸으니, 이는 그들이 죄에서 놓이게 하려 함이었다.
— 마카베오하 12:44-45 (사역)
현대 가톨릭 교리서(CCC §1032)는 이 본문을 연옥의 결정적 성경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정경은 이 본문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 히브리서 9:27
죽음과 심판 사이에는 중간 지대가 없다. 예수께서 들려주신 부자와 나사로 비유는 더 단호하다.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 누가복음 16:26
두 상태 사이를 가르는 것은 “큰 구렁텅이”(χάσμα μέγα)다. 제사로도, 기도로도, 2천 드라크마로도 건너갈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이미 선언하셨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 요한복음 19:30
“다 이루었다”의 헬라어 원문은 τετέλεσται(테텔레스타이) — 완료 수동태다. “완전히 이루어졌고, 그 효력이 지속된다”는 의미의 시제다. 신자의 죄에 덧붙여 갚아야 할 일시적 형벌은 남아 있지 않다. 히브리서는 이 점을 반복해서 못 박는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 히브리서 10:14
한 번(ἐφάπαξ), 영원히(εἰς τὸ διηνεκές), 온전하게(τετελείωκεν — 완료형). 이 세 단어 앞에서 연옥의 불은 타오를 공간이 없다. 연옥이 존재하려면 그리스도의 속죄가 영원한 형벌만 제거하고 일시적 형벌은 남겼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 이분법은 정경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마카베오하 12장을 정경으로 받아들인 이후에만 필요해지는 구분이다.
공로와 자선의 구원력 — 토비트와 집회서
외경의 둘째 지층은 공로 사상이다. 인간의 선행, 특히 자선이 죄를 속할 수 있다는 어휘가 두 책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토비트 12:9는 대천사 라파엘의 입을 빌려 말한다. “자선(ἐλεημοσύνη)은 죽음에서 구원하고 모든 죄를 씻어 버린다.” 집회서 3:30은 더 직설적이다. “물이 타오르는 불을 끄듯, 자선이 죄를 속한다(ἐξιλάσεται ἁμαρτίας).” 이 속한다는 동사는 구약 속죄 제사에 사용되는 기술 용어다. 자선이 속죄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중세 가톨릭의 공로 신학(satisfactio operum)은 이 어휘 위에 세워졌다. 선행으로 죄를 보상한다. 보상이 부족하면 연옥에서 채운다. 교회가 보유한 성인들의 잉여 공로(공로의 창고, thesaurus meritorum)에서 면벌부를 통해 보충받는다. 이 연쇄의 첫 고리가 토비트와 집회서의 두 문장이다.
그러나 복음의 선언은 이 거래 구조를 뿌리에서 해체한다.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 에베소서 2:8-9
바울의 문법은 외경의 문법과 양립할 수 없다. 구원은 선물(δῶρον)이다. 거래가 아니다. 로마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 로마서 4:4-5
의는 공로의 축적이 아니라 전가로 주어진다.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옷 입혀질 때, 덧보탤 공로도 빼앗길 공로도 없다. “자선이 죄를 속한다”는 집회서의 문장을 정경으로 받으면, “일하지 않는 자에게 의를 여기신다”는 로마서 4:5과 한 성경 안에 공존해야 한다. 두 명제는 공존할 수 없다. 어느 쪽이 다른 쪽을 삼킨다. 트렌트 공의회는 집회서가 바울을 삼키는 쪽을 택했다.
성인 전구와 면벌부의 구조
외경의 셋째 지층은 죽은 자들이 산 자를 위해 중보한다는 어휘다.
토비트 12:12에서 천사 라파엘이 토비트에게 말한다. “네가 기도할 때 나는 너의 기도를 거룩하신 분의 영광 앞으로 올려드렸다.” 기도의 전달자로 피조물이 등장한다. 마카베오하 15:12-14의 환상은 더 결정적이다. 유다 마카비는 전투 전날 꿈에서 이미 죽은 대제사장 오니아스와 선지자 예레미야를 본다. 이들은 유대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로마 가톨릭은 이 본문을 성인들의 “천상 중보”(intercessio caelestis)의 성경적 근거로 사용한다(CCC §956, §2683).
그러나 신약은 단 한 구절로 이 모든 구조를 닫는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 디모데전서 2:5
“한 분”(εἷς)이 두 번 반복된다. 하나님도 한 분, 중보자도 한 분. 이 구조 안에 성인의 자리는 없다. 마리아의 자리도, 라파엘의 자리도, 죽은 오니아스의 자리도 없다. 히브리서는 이 한 분 중보자가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 히브리서 7:25
그리스도는 항상 살아 계셔서 친히 간구하신다. 중보의 사슬에 고리를 덧댈 필요가 없다. 고리를 덧대는 순간, 그 고리는 그리스도의 직분을 대신하는 우상이 된다.
면벌부는 이 모든 구조의 최종 귀결이다. 공로의 창고라는 가설(성인들의 잉여 공로가 교회에 축적되어 있다), 연옥이라는 가설(신자도 죽어서 일시 형벌을 갚아야 한다), 교회의 분배권이라는 가설(교황이 그 공로를 분배할 수 있다). 이 세 가설을 겹쳐야만 면벌부가 논리적으로 성립한다. 그리고 세 가설의 성경적 지지 기반은 모두 외경에 있다. 외경을 정경에서 빼면, 면벌부는 성경적 근거를 잃고 공중에 떠버린다. 루터의 95개조가 로마에 준 충격은 교리의 충격이기 전에 근거의 붕괴였다.
자유의지의 어휘 — 집회서 15장
이 시리즈에서 마지막으로 짚어야 할 지점은, 가장 깊은 곳에 있다. 인간론 자체가 바뀐다.
주께서 태초에 사람을 지으시고 그를 자기 결심의 손에 맡기셨다. … 주께서 네 앞에 불과 물을 두셨으니 네가 원하는 대로 손을 내밀 것이다. 사람 앞에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그가 원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질 것이다.
— 집회서 15:14-17 (사역)
이 본문은 트렌트 공의회 6차 회기(1547)의 의화 교령이 자유의지론을 정식화할 때 배경으로 깔린 인간 이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협력할 수 있고, 협력해야 한다. 이 어휘 위에 반펠라기우스적 구조가 세워진다.
그러나 바울의 인간론은 정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 로마서 3:10-11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 로마서 8:7
할 수도 없음(οὐδὲ γὰρ δύναται — 능력의 부재를 선언하는 헬라어 구문이다). 집회서의 “네가 원하는 것이 주어질 것이다”와 바울의 “할 수도 없음”은 한 정경 안에 나란히 놓일 수 없는 인간론이다.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번역해버린다. 트렌트가 외경을 정경으로 받은 순간, 집회서의 인간론이 로마서의 인간론을 해석하는 격자가 되었다. 개혁자들이 “전적 타락”과 “오직 은혜”를 회복해야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 — 이 논쟁이 왜 남의 일이 아닌가
“외경이요? 그건 가톨릭 얘기 아닌가요?” 한국 성도 대부분의 반응이다. 그러나 외경이 만든 교리들은 이미 한국 교회의 언어 속에 들어와 있다.
위령 미사의 구조는 49재의 구조와 같다. 기원은 다르지만 발상은 하나다 — 죽은 자의 사후 운명을 산 자의 종교 행위로 돕는다. 한국인의 효(孝) 정서와 결합하면 이 구조는 거의 저항할 수 없다. 심방 자리에서 집사님이 “아버지가 불신자로 돌아가셨는데, 그분을 위해 기도해도 되나요?” 하고 물을 때, 우리는 히브리서 9:27을 펴 드려야 한다. 거기에 응답할 언어는 매정함이 아니라 진실함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1장 4항이 “죽은 자를 위한 기도는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잔인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한 번 죽으면 그 다음은 심판이지 정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복주의의 거래 신학은 집회서 3:30의 변형이다. “내가 십일조를 정확히 드렸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죠?” “새벽기도를 백 일 드렸으니 이제 응답이 올 차례입니다.” 이 문법은 자선이 죄를 속한다는 발상의 현대 한국어 판본이다. 복음은 이 거래 구조 위에 세워지지 않았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믿는 자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롬 4:5)는 선언이 그 구조를 무너뜨린다.
사별한 성도의 “어머니, 천국에서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는 마카베오하 15장의 오니아스 환상과 같은 구조를 갖는다. 우리가 이 기도를 교정해야 하는 이유는 감정을 검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은 어머니가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별의 슬픔에 줄 언어는 죽은 자를 향한 기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는 자들이 부활할 것이라는 소망(살전 4:13-14)이다.
책 목록이 아니라 고백이다
외경을 정경에서 구별한다는 고백은 단순히 성경 목차를 정리하는 행정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구원이 누구의 일인가에 대한 고백이다.
연옥을 인정하면, 그리스도의 속죄에 신자의 고통을 덧붙여야 한다. 공로를 인정하면, 그리스도의 의에 신자의 선행을 덧붙여야 한다. 성인 전구를 인정하면, 그리스도의 중보에 피조물의 중보를 덧붙여야 한다. 면벌부를 인정하면, 그리스도의 대속에 교회의 분배권을 덧붙여야 한다. 이 모든 “덧붙임”의 자리는 외경이라는 토양 위에서만 자란다.
종교개혁이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이라는 다섯 기둥을 함께 세운 것은 그 때문이다. 이 다섯이 하나의 고백이다. 성경의 경계가 흐려지면, 은혜의 순수함도, 믿음의 충분함도, 그리스도의 유일성도, 하나님의 영광도 함께 흐려진다.
7권의 차이는 목차의 문제가 아니다. 누가 구원하시는가에 관한 문제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 사도행전 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