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경과 정경 사이 5부: 바룩서의 기도는 왜 다니엘이 될 수 없었는가

외경과 정경 사이 5부: 바룩서의 기도는 왜 다니엘이 될 수 없었는가

#성경론#외경#정경#바룩서#다니엘

두 기도를 나란히 놓으면

유대인 회당에서 두 개의 회개 기도가 낭독된다고 상상해 보자. 하나는 다니엘 9장이다.

4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이시여

5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6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왕들과 우리의 고관과 조상들과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 다니엘 9:4-6

다른 하나는 바룩서 1장 끝에서 2장으로 이어지는 단락이다. “주여 공의는 주께 속하였고 수욕은 오늘과 같이 우리 얼굴에 속하였나이다.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과… 우리가 주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주의 종 선지자들을 듣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바룩 1:15-21, 공동번역 기반 축약).

두 본문은 표현의 리듬, 단어의 순서, 죄를 인정하는 문법까지 거의 동일하다. 학자들은 한쪽이 다른 쪽을 의식적으로 따라 썼다는 것에 큰 이견이 없다. 다수 견해는 바룩서가 다니엘 9장(그리고 느헤미야 9장)을 모델로 삼아 2차 성전기 어느 시점에 작성되었다는 쪽이다. 책은 예레미야의 서기 바룩을 저자로 내세우지만, 본문 내부의 연대 모순 — 포로가 된 지 5년 후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린다는 설정(바룩 1:2, 10) — 이 이를 문학적 장치로 드러낸다.

이 시점에서 개신교 독자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형식이 이토록 같은데, 왜 하나는 정경이고 하나는 외경인가. 이 질문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으면 정경론은 공허한 교단주의가 된다.


닮았으되 네 지점에서 갈라진다

두 기도를 나란히 놓고 문단 단위로 겹쳐 읽으면, 겉모습은 같되 네 지점에서 결이 갈라진다.

첫째, 기도의 궁극 목표

다니엘 9장은 모든 간구를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린다.

17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

18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19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 다니엘 9:17-19

주 자신을 위하여” (למענך, 레마아느카) — 이 못질로 기도가 닫힌다. 이스라엘의 회복조차 수단이다.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이다.

바룩서의 기도도 하나님을 부르지만, 간구의 축이 다르게 기운다. “열방 가운데서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소서”(바룩 2:14 이하)라는 표현이 본문의 중력 중심이 된다. 회복된 이스라엘이 찬송하는 그림이 목적 자리에 올라온다. 나쁜 기도는 아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철저한 하나님 중심성에서 한 단계 내려앉는다.

둘째, 간구의 근거 — 오직 긍휼인가, 조상의 의가 스며드는가

다니엘 9:18은 회개의 문을 자기 의에 대해 완전히 닫는다.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바룩서도 비슷한 문장을 시도한다. “우리는 우리 조상들의 의를 의지하여 간구하지 아니하오며”(바룩 2:19). 그러나 곧이어 책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서 당신의 긍휼을 거두지 마옵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 바룩 2:34-35 (공동번역 기반)

더 결정적으로, 바룩 3:4은 죽은 자의 기도를 언급한다. “이스라엘의 죽은 자들의 기도와 그들의 의인들의 아들들의 기도를 들으소서.” 히브리 정경의 회개 기도 어디에도 없는 어법이다. 느헤미야 9장, 에스라 9장, 다니엘 9장, 시편 106편 — 모든 정경의 회개 기도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긍휼로 문을 닫는다. 죽은 조상의 의라는 매개가 끼어드는 순간, 수직선이 굽는다. 이 결이 후대 중세의 의인의 공로 저장소(thesaurus meritorum) 신학으로 자라나는 씨앗이 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셋째, 예언적 성취 — 칠십 이레가 있는가

다니엘 9장의 기도는 경건한 독백으로 끝나지 않는다. 다니엘이 기도하는 동안 가브리엘이 날아와 응답을 준다.

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 다니엘 9:24

회개 기도가 메시아 예언의 시간표로 직결된다. 기도의 진짜 응답은 예루살렘의 즉각적 재건이 아니라, 수백 년 뒤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끊어짐으로 죄를 끝내시는 사건이다. 다니엘 9장은 이렇게 십자가를 향한 화살이 된다.

바룩서의 기도는 이 귀결점을 갖지 못한다. 책은 회개 기도(1:15-3:8) 뒤에 지혜 찬가(3:9-4:4)를 붙이는데, 이 찬가는 지혜를 이스라엘의 토라와 동일시하며 닫는다. “그 책은 하나님의 계명이요 영원히 머무는 율법이니”(바룩 4:1). 아름다운 문장이다. 그러나 여기서 지혜는 이스라엘 율법에 갇힌다 —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로 성취되는 성육신적 지혜론으로 열리지 않는다.

넷째, 신약의 인용 흔적

신약은 구약을 560회 이상 인용한다. 다니엘서는 예수와 사도들에게 빈번히 인용된다 — 특히 “**인자”**라는 호칭 자체가 다니엘 7장에서 왔고, 예수께서 산상 설교에서 성전에 임한 “멸망의 가증한 것”(마 24:15)을 가리키시며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라고 하셨을 때, 그 본문이 다니엘 9:27이다. 회개 기도에 이어진 70이레의 예언은 신약의 핏줄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바룩서는 신약 어디에서도 “성경에 이르되”(γέγραπται)의 공식 아래 인용되지 않는다. 고대 교부들 사이에 바룩서를 예레미야의 부록처럼 취급한 경우가 있었고, 라틴 전통이 이를 넓게 수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와 사도들이 사용한 성경 목록의 경계에 이 책은 들어 있지 않다.


경건한 모방과 영감된 기도의 차이

이 네 지점을 모으면 바룩서 기도의 성격이 분명해진다. 경건한 모방이다. 2차 성전기 유대 공동체는 다니엘 9장을 사랑했고, 읽고 또 읽었고, 그 리듬을 흡수했으며, 자기 시대의 절망 속에서 비슷한 기도를 써 올렸다. 이것은 아름다운 영적 활동이다. 오늘 우리도 시편을 모방한 기도를 쓰고,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문을 따라 외운다. 이런 작업은 공동체의 신앙을 빚는다.

그러나 모방과 영감은 다르다. 형식의 일치는 영감의 동등을 뜻하지 않는다. 시편의 형식을 흉내 낸 시는 고대 근동에 많았고 지금도 많다. 그러나 영감된 시편은 150편이다. 이 경계는 책의 외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성령께서 어느 기록 위에 당신의 숨결을 두셨는가에 의해 그어진다.

바빙크는 「개혁교의학」에서 정경의 자기-증거(αὐτόπιστον, autopistia)를 말했다. 정경은 외부 인증에 의존하지 않고, 성령께서 그 책 안에서 신자의 마음에 증거하신다. 이 내적 증거는 감정의 끌림이 아니라, 책이 그리스도로 수렴하는가의 유기적 테스트다. 다니엘 9장은 십자가를 향해 화살처럼 날아간다. 바룩서의 기도는 아름답지만 그 화살의 궤적을 갖지 못한다.

칼뱅도 「기독교 강요」 1권 7-8장에서 같은 말을 한다. 정경은 교회의 결정으로 권위를 얻은 것이 아니라, 성령이 저자 안에서 일하시고 독자 안에서 증언하시는 두 끝의 동일한 사역으로 권위를 드러낸다. 바룩서에는 이 두 끝이 모이지 않는다.


왜 이 구분이 오늘도 중요한가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바룩서의 기도가 그렇게 경건하다면, 그냥 읽고 기도에 활용하면 되지 않나. 그렇다. 루터가 외경을 “성경과 동등하지 않지만 읽기에 유익한 책들”로 자리매김한 이유가 여기 있다. 버리라가 아니라 구분하라가 종교개혁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구분은 사소한 행정 문제가 아니다. 책이 신앙과 삶의 규범(regula fidei et vitae)으로 기능할 때, 그 책의 결은 교회의 기도 속으로 스며든다. 죽은 조상의 의에 호소하는 기도의 문법이 규범이 되면, 성도의 기도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중보에서 전승된 성인들의 공로로 중심축이 조금씩 이동한다. 이 이동이 1,500년에 걸쳐 이루어지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긍휼 앞에 서는 자세가 달라진다. 종교개혁은 이 축을 다시 다니엘 9:18 —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 로 되돌린 운동이었다.


같은 말로 기도하되 다른 문을 연다

오늘 우리가 다니엘 9장의 기도로 기도할 때, 우리는 단지 좋은 문장을 빌려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기도가 이미 십자가에서 응답되었음을 알고 기도한다. 가브리엘이 다니엘에게 예고한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단 9:26)는 갈보리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로 성취되었다. 이 응답의 소리가 들리는 기도와, 그 소리 없이 같은 문장을 반복하는 기도 — 두 기도는 겉이 같아도 문이 다르다.

시리즈를 여기까지 따라온 독자는 이제 한 가지를 묻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경계선 — 예수와 사도들이 사용했다는 그 히브리 정경의 목록 — 은 실제로 어떻게 형성되고 확정되었는가. 우리는 1부에서 5부까지 외경의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이제 정경의 바깥쪽, 그 경계가 그어진 역사의 실제 순서로 들어갈 차례다.

공유하기

이어서 읽기

auto_awesome

Soli Deo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