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하게 시작해야 한다
이 질문은 책상에서 던지는 사변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이 질문 앞에서 신앙을 잃었고, 어떤 사람은 신앙을 시작하지 못했다. 영원 전 유기의 작정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왜 굳이 그 사람들을 창조하셨는가. 창조부터 좌절이 예정된 인생이라면, 그를 존재하게 한 행위 자체가 잔혹한 것 아닌가.
이 항의의 정서적 무게를 가볍게 처리하면 안 된다. 그것은 정당한 정서다. 진노만 보고 자비를 보지 못하면 하나님은 잔혹한 신이 된다 — 적어도 우리의 시야에서는. 그러므로 답은 자비를 덧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질문 자체에 숨어 있는 잘못된 도식을 먼저 풀어내는 방식이어야 한다.
잘못된 도식 — 시간 순서의 환상
질문자는 보통 이런 그림을 그린다.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러고 나서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버리기로 결정하셨다. 그러므로 창조와 유기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있고, 하나님은 창조 이후에 누군가를 버리는 부가적 행위를 하신 것이다.
이 그림이 잔혹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영원의 작정에는 시간 순서가 없다. 창조의 작정과 구원·유기의 작정은 동시적이다. 창조는 작정의 실행이지, 작정 이전의 무대 설치가 아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을 만드신 다음 그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지 않으셨다. 한 분의 영원한 의지 안에서, 이 사람의 존재와 그의 운명은 같은 작정의 두 측면이다.
이 구분이 사변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결정적이다. 시간 순서를 가정하면 하나님은 나중에 누군가를 거절한 분이 된다. 동시성을 인정하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영광을 향해 한 가지 일을 하고 계신 분이다.
정의의 바닥 — 도르트 1.1
도르트 신조 제1교리 1항이 모든 논의의 출발점이다.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서 죄를 범하였고, 저주 아래 영원한 죽음에 처해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멸망에 버려 두시고 그들의 죄로 인해 정죄하셨다 하더라도, 결코 불의를 행하시는 것이 아닐 것이다. 사도가 증언한 바와 같다 —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 한 문장에 정의의 바닥이 깔려 있다. 하나님은 아무도 구원하지 않으셨어도 의로우셨을 것이다. 자비는 의무가 아니다. 자비는 기본값이 아니다. 정의의 자리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자비의 무게는 측량되지 않는다.
여기서 인포라(infralapsarianism)의 강조가 결정적이다. 작정의 논리적 순서를 — 시간 순서가 아니라 — 따라가면 이렇다. 창조 → 타락 허용 → 타락한 인류 가운데서 일부에 대한 자비의 작정 → 나머지를 자기의 죄에 그대로 두심. 모든 인류는 동등한 죄책의 자리에서 출발한다. 그 자리에서 일부에게 베푸신 긍휼은 순수한 자비다 — 받지 않을 수도 있었던, 받아야 할 자격이 한 점도 없었던 자비.
수프라(supralapsarianism)도 정통의 경계 안에 있다. 그러나 본 글이 인포라를 전면에 내세우는 이유는, 인포라가 동등한 출발선을 더 분명히 보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 없는 인간을 미리 정죄하기 위해 창조하지 않으셨다. 죄에 빠진 인류 가운데서 일부를 건지시기로 작정하셨다.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
그렇다면 다시 질문 — 그럼에도 왜 창조하셨는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창조의 목적을 다시 세워야 한다. 한국 교회의 정서 안에는 창조의 목적은 인간의 행복이라는 미세한 도식이 깔려 있다. 그래서 일부가 행복하지 않으면 창조가 실패한 것처럼 들린다.
성경의 진술은 다르다.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 요한계시록 4:11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 로마서 11:36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영광이란 그분의 모든 속성이 남김없이 드러나는 것이다. 사랑·자비·긍휼만이 아니라 공의·진노·거룩까지. 어느 한 속성이 누락되면 영광은 부분적이다.
여기서 바울이 로마서 9장에서 던지는 두 그릇의 비유가 결정적이다.
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 로마서 9:22-23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 — 두 계기가 함께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을 드러낸다. 진노의 그릇이 없었다면 긍휼의 풍성은 측량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두운 배경 없이 별의 빛은 보이지 않는다.
잠언은 더 단순하게 진술한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 잠언 16:4
솔로몬은 사변하지 않는다. 그는 진술한다. 모든 존재가 — 악인의 존재까지도 — 하나님의 영광에 봉사한다. 그러나 악인이 악한 것은 하나님이 악을 주입하신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기 본성을 따라 행하고, 하나님은 그 행위 위에 자신의 영광을 세우신다.
책임은 어디 있는가
이 지점에서 가장 자주 미끄러진다 — 그렇다면 유기된 자의 죄는 결국 하나님이 만드신 것 아닌가. 성경은 단호하게 거절한다.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 야고보서 1:13-15
호세아는 더 압축한다.
이스라엘아 네가 패망하였나니 이는 너를 도와주는 나를 대적함이니라.
— 호세아 13:9
비대칭이다. 패망의 원인은 자기에게 있고, 구원의 원인은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은 죄의 원인(causa)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까지도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usus)하시는 분이다. 이 둘을 혼동하면 신학은 무너진다.
잘못된 결론을 차단하기
이 교리에서 곧잘 끌려 나오는 세 가지 잘못된 결론이 있다. 차례로 거절해야 한다.
첫째, 운명론. 스토아의 fatum은 비인격적 필연이다. 예정은 인격적 지혜의 작정이다. 운명론에서 인간의 행위는 환상이다. 예정에서 인간의 행위는 진정한 이차 원인으로 확립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장 1항이 정확히 말한다 —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안에서 “이차 원인들의 자유나 우연성이 제거되지도 않으며, 오히려 확립된다.”
둘째, 전도 무용론. “어차피 정해져 있다면 전도는 왜 하는가.” 하나님은 목적뿐 아니라 수단까지 함께 작정하셨다. 그 수단의 정중앙에 복음 전파가 있다.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로마서 10:14, 17
셋째, 유기된 자가 누구인지 안다는 자만. 이것은 가장 위험하다. 우리는 어떤 한 사람이 유기된 자라고 단정할 수 없다. 작정의 책은 우리에게 닫혀 있다. 우리에게 열려 있는 것은 지금 그리스도를 향해 돌아서고 있는가라는 후행적 점검뿐이다(WCF 18).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그를 위해 기도한다.
감추인 일과 나타난 일
모든 사변이 부딪쳐야 할 벽이 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 신명기 29:29
작정의 왜는 감추인 일이다. 우리에게 나타난 것은 그리스도다. 그리스도의 약속이고, 그 약속이 적용되는 회개와 믿음의 열매이며, 그 열매를 증언하시는 성령이다. 사변은 작정의 책을 들여다보려 한다. 신앙은 그리스도를 들여다본다.
그러므로 이 질문 앞에 선 자가 먼저 통과해야 할 것은 답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 내가 긍휼의 그릇이 아니라면? 이 두려움을 우회하면 신학은 사변이 되고, 통과하면 그리스도의 약속이 절실해진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 빌립보서 2:12-13
답이 아니라 경배로
신학이 이 질문에 줄 수 있는 가장 정직한 결말은 명제가 아니다. 바울 자신이 로마서 9-11장의 긴 사변을 통과한 끝에 도달한 곳은 답이 아니라 송영이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 로마서 11:33-36
유기는 답이 아니다. 유기는 우리가 정의의 바닥에서 출발해 자비의 풍성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떨면서 인식하게 만드는 각성이다. 그 각성이 다다라야 할 곳은 사변의 종결이 아니라 경배의 시작이다. 하나님이 왜 누군가를 창조하시고 누군가를 그대로 두셨는지 우리는 끝내 다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진노의 그릇이었어야 마땅했음을 알고, 그러나 긍휼의 그릇으로 옮겨진 그 자리에서, 떨면서 경배한다.
이것이 창조 목적론이 도착하는 곳이다. 잔혹한 신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속성을 영광으로 드러내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 영광 앞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자세는 — 답을 손에 쥐는 것이 아니라, 답을 그분께 돌려드리는 경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