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하나님이 — 창세기 1:1-2:3

태초에 하나님이 — 창세기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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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창세기 1:1-2:3 (발췌)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그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 창세기 1:1-5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창세기 1:26-28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 창세기 1:31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 창세기 2:1-3


왜 “태초에”인가

성경은 논증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변론도, 해명도 없다. 첫 문장은 선언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일곱 단어 앞에서 모든 세계관은 선택을 강요당한다. 영원한 물질이 있었는가, 아니면 하나님만 계셨는가. 세계는 신의 본질에서 흘러나온 것인가, 아니면 자유로운 의지로 불려 나온 것인가. 만물은 신의 일부인가, 아니면 그분 앞에 선 피조물인가.

성경의 첫 문장은 이 모든 물음에 한꺼번에 답한다. 그리고 그 답은 우리를 경외 앞에 세운다.


역사적·문학적 맥락

무에서의 창조가 부정하는 것들

히브리어 동사 바라(בָּרָא)는 구약 전체에서 오직 하나님의 행위에만 사용된다. 사람이 무언가를 “만든다”(עָשָׂה, 아사)고 할 때와는 다른 동사다. 바라는 기존 재료를 가공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새로운 것을 존재하게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교회는 이것을 무에서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는 교리로 고백해 왔다.

이 고백이 동시에 부정하는 것들이 있다. 물질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존재했다는 영원한 물질론, 세계가 하나님의 본질에서 흘러나왔다는 유출론, 하나님과 세계를 동일시하는 범신론, 선한 신과 악한 질료가 대등하게 맞선다는 이원론. 창세기 첫 절은 이 네 가지를 단번에 무너뜨린다. 하나님 이외에 영원한 것은 없으며, 세계는 하나님의 일부가 아니고, 질료는 하나님과 대등한 존재가 아니다.

형태와 채움의 건축술

6일 창조 서사는 정교한 문학적 구조를 갖고 있다. 1-3일은 형태를 부여하고(빛과 어둠의 분리, 물과 궁창의 분리, 바다와 뭍의 분리), 4-6일은 그 형태 안에 거주자를 채운다(광명체, 새와 물고기, 육지 동물과 인간). 혼돈하고 공허한 땅(1:2)이 질서와 생명으로 가득 차는 과정이다.

이 구조 전체는 제7일을 향해 수렴한다. 고대 근동의 신전 창건 서사에서 신이 궁전을 완성한 뒤 그 안에 좌정하듯, 하나님은 천지라는 성전을 지으시고 안식으로 들어가신다. 에덴은 하나님의 성소였고, 아담은 그 성소의 제사장적 청지기로 세워졌다.


신학적 핵심

말씀으로 창조하심 — 인격의 행위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이 문장의 무게를 잠시 생각해 보라. 하나님은 재료를 모으지 않으셨다. 도구를 쓰지 않으셨다. 말씀하셨다. 그리고 없던 것이 있게 되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증언한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 시편 33:6

말씀에 의한 창조는 세 가지를 드러낸다. 첫째, 창조는 지성의 행위다. 세계는 맹목적 힘의 폭발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던 뜻(idea)이 실현된 것이다. 둘째, 창조는 의지의 행위다. 하나님은 창조하지 않으실 수도 있으셨다. 그분이 창조하신 것은 필연이 아니라 자유이며, 그 자유는 사랑과 선하심에서 비롯되었다. 셋째, 말씀 창조에는 삼위일체의 각인이 있다. 성부가 작정하시고, 성자가 말씀으로 실행하시며, 성령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며 혼돈에 생명을 불어넣으신다. 한 본질 안의 세 위격이 창조를 함께 이루신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 영광의 극장

창세기 1장에는 후렴구가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טוֹב, 토브). 이 선언은 첫째 날부터 반복되고, 여섯째 날에 이르러 “심히 좋았더라”(טוֹב מְאֹד)로 절정에 이른다.

이것은 품질 검사가 아니다. 하나님 외부의 기준으로 합격 여부를 판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좋았더라”는 하나님 자신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이 피조물 안에 반영되었다는 선언이다. 빛과 어둠의 분리, 물과 뭍의 구분, 각 종류대로 창조된 생물들 — 이 모든 질서와 다양성과 풍성함은 창조주의 탁월하심을 거울처럼 비춘다.

칼뱅은 이것을 “하나님의 영광의 극장”(theatrum gloriae Dei)이라 불렀다(기독교강요 I.14.20). 하늘과 땅, 별과 바다, 새와 짐승 — 모든 피조물이 창조주의 지혜와 권능과 선하심을 반사하는 무대다. 피조 세계를 바라보며 감탄하지 않는 사람은, 극장에 앉아 무대를 보지 않는 사람과 같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 극장을 여셨는가? 삼위일체 안에서 이미 완전한 사랑과 기쁨의 교제가 있었다. 하나님은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으셨다. 창조는 결핍의 산물이 아니라 충만함의 넘침이다. 강이 바다로 흘러가는 것은 물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가득 차서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너무나 충만하여 피조물을 향해 자신을 소통하기를 원하셨다 — 이것이 은혜의 기원이다.

6일의 배려

하나님은 순간적으로 만물을 창조하실 수 있으셨다. 그런데 왜 6일에 걸쳐 단계적으로 지으셨는가? 칼뱅은 이것을 하나님의 배려(accommodatio Dei)로 읽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의 이해력에 맞추어 창조를 단계적으로 계시하신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각 피조물을 하나씩 묵상하고, 각 날의 작품 앞에서 감사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6일 구조는 과학적 연대기를 보고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왕으로서 자신의 궁전을 짓고, 마지막에 자신의 형상을 닮은 대리인을 그 안에 세우시는 신학적 서사다.

제7일 — 닫히지 않는 안식

6일의 각 날은 동일한 공식으로 닫힌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N째 날이니라.” 그러나 제7일에는 이 공식이 없다. 안식일은 닫히지 않는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것은 피로를 회복하셨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완성의 선언이다. 더 이상 새로운 창조 질서를 만드실 필요가 없을 만큼 모든 것을 온전히 이루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다”(2:3). 히브리어 카다쉬(קָדַשׁ) — 구별하다, 거룩하게 하다. 이것은 시간의 성화다. 모든 날이 동등하지 않으며, 하나님 앞에 구별된 날이 있다.

닫히지 않는 제7일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히브리서 기자가 답한다.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 히브리서 4:9-10

제7일의 안식은 창조의 종결이 아니라 창조의 목표다. 활동의 멈춤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는 충만한 안식이다. 이 안식은 타락으로 상실되었고, 시내산에서 율법적 안식일로 그림자만 남았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열리고, 종말에 영원히 완성된다.


이 본문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가리키는가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이 이르시되”를 읽은 뒤, 요한복음 1장을 펼치면 숨이 멎는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요한복음 1:1-3

창세기의 말씀(דָּבָר)은 요한복음의 로고스(Λόγος)다. “빛이 있으라” 하신 그 말씀은 영원한 아들이시다. 바울은 더 분명하게 선언한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 골로새서 1:16

“그로 말미암고”(through Him)는 창조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그를 위하여”(for Him)는 창조의 목적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만물을 지으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요 1:14). 창조의 중보자가 구속의 중보자이시다. 같은 분이 만물을 있게 하셨고, 같은 분이 타락한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

하나님의 형상(이마고 데이, imago Dei)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그 형상의 원형이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온전히 이해된다. 잠언은 이 말씀을 “지혜”(호크마, חָכְמָה)로 부르며, 창조 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던 분으로 그린다(잠 8:22-31). 그리고 제7일의 닫히지 않는 안식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 선언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새 창조의 안식이 시작될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열린다.

주님은 수고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마태복음 11:28

제7일이 가리킨 안식, 히브리서가 약속한 안식, 그 안식은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오늘 우리에게

창세기 1:1-2:3을 읽고 나서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본문을 읽었어도 하나님을 보지 못한 것이다.

이 본문 앞에서 일어나야 할 것이 있다. 경외다. 말씀 한마디로 존재를 불러내시는 절대적 주권 앞의 전율이다. 경탄이다. 빛과 어둠, 바다와 뭍, 날개 달린 것과 기는 것 — 피조물의 정교함과 다양함 앞에서 마음이 열리는 경험이다. 기쁨이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를 반복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것이다.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회복한다(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restaurat). 이 명제의 뿌리가 바로 창조론에 있다. 하나님이 “심히 좋았더라” 선언하신 이 자연적 질서는 은혜의 적이 아니라 은혜의 무대다. 타락이 이 무대를 훼손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이 무대는 회복되고 있으며, 종말에 완전히 새로워질 것이다.

오늘 아침에 눈을 떠서 빛을 본다면, 그것은 첫째 날의 메아리다. 숨을 쉬고 있다면, 그것은 생기를 불어넣으신 분의 은혜가 아직 거두어지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있게 하신 그 말씀이 — 바로 그 말씀이 —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

창세기 1장은 끝이 아니라 서론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실 그분, 새 창조를 여실 그분을 향한 장대한 서론. 그리고 그 서론의 마지막 장인 제7일의 안식은 아직 닫히지 않았다. 우리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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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i Deo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