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의 질문
서른여섯 살의 한 형제가 목양실을 찾았다. 영업부의 술 문화, 주말 접대, 월요일의 무게가 주일 예배까지 따라온다고 했다. 묻고 싶은 것은 하나였다. 회사를 옮길 것인가, 이 자리에서 버틸 것인가.
같은 질문이 여러 모습으로 온다. 자녀 교육 때문에 동네를 바꾸려는 부모, “크리스천 많은 도시”로 옮기려는 청년, 오지에서 복음 교회를 찾지 못한 가정. 뼈대는 같다. 신앙생활이 어려운 자리를 떠나는 것이 성경적 결단인가, 아니면 지금 이 자리가 곧 소명의 자리인가.
소명의 이중 구조
개혁주의 전통이 이 주제에 준 가장 귀한 선물은 소명의 이중 구조다. 장 칼뱅은 「기독교강요」 III.10.6에서 말했다. 주께서는 각 사람에게 삶의 방식(genus vitae)을 지정하셨고, 그 자리는 초병이 서는 초소와 같아서 함부로 떠나서는 안 된다.
이 가르침의 힘은 일의 귀천을 허물었다는 데 있다. 종교개혁 이전 유럽은 수도원만 “진짜 신앙의 자리”로 여겼다. 칼뱅은 이 지도를 찢었다. 창조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의 극장(theatrum gloriae Dei)이며, 정직하게 감당하는 모든 정당한 노동이 제사장적 봉사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41문도 제8계명의 의무로 “각자의 소명과 분수에 맞는 정당하고 합법적인 직업에 부지런히 종사하는 것”을 꼽는다.
그 뒷면이 곧 우리의 질문이다. 지금 내가 있는 자리가 먼저 소명의 자리다. “불편하니 옮기겠다”는 충동은 대개 그 옛 이원론 — 거룩한 구역과 속된 구역이 따로 있다는 지도 — 의 잔재다.
그러나 떠남이 순종일 때가 있다
칼뱅 자신이 파리를 떠난 망명자였고, 박해받는 위그노들에게 제네바 피난을 권했다. 성경도 정당한 이주를 증언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 창세기 12:1
그러나 같은 하나님이 바벨론 포로들에게는 정반대를 명하셨다.
5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7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 예레미야 29:5, 7
한 사람에게는 “떠나라”, 다른 사람에게는 “포로된 자리의 평안을 구하라”. 분별이 없으면 어느 쪽도 순종할 수 없다.
네 가지 시금석
첫째, 예배가 구조적으로 봉쇄되었는가, 아니면 단지 피곤한가. 가까운 복음 교회가 전혀 없거나 종교 자유가 봉쇄된 상황은 이주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주중이 피곤해서 예배 집중이 안 된다”는 것은 봉쇄가 아니다. 세상 모든 신자가 감당하는 일상의 무게다.
둘째, 양심이 강요받는가, 아니면 불편한가. 다니엘은 사자굴 앞에서 신앙 고백을 버리도록 강요받았고,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죄를 지을 것을 강요받았다. 이런 강요는 떠남의 근거다. 반면 회식의 어색함, 동료들의 냉소는 양심의 강요가 아니라 빛이 어둠 속에 있다는 증거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 요한복음 1:5
빛이 어둠 속에 있을 때 그 빛은 본래 불편하다. 이 불편은 질병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신호다. 오진하면 어디로 옮겨도 같은 호소가 반복된다.
셋째, 가족의 영혼이 실제로 파괴되는가, 아니면 가정 예배로 해결될 수준인가. 자녀 교육으로 이사를 고민하는 부모에게 먼저 물을 것은 이것이다. 지금 가정에서 성경을 함께 읽고 기도하는 시간이 있는가. 없다면 환경을 바꾸어도 해결되지 않는다. 가정 예배 없는 이사는 대부분 책임 전가다. 반면 자녀가 이단 교육에 장기 노출되거나 또래 집단이 구조적으로 영혼을 파괴하는 환경이라면, 그때의 이주는 도피가 아니라 방어다.
넷째, 동기가 정직한가. 두 질문을 나란히 놓아 보라. 이 자리를 떠나면 하나님 나라에 유익한가, 아니면 내 영혼에만 유익한가. 후자만 붙잡고 있다면 이미 자기중심적 종교다. 복음은 편안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약속한다. 결정권은 그분께 있다.
출애굽 충동과 여호수아 충동
한국 교회의 이주 상담에서 가장 자주 드러나는 심리는 출애굽 충동 — 이 힘든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다. 정직한 감정이다. 그러나 성경이 신자에게 주로 요구하는 자세는 여호수아 충동에 가깝다. 주어진 자리를 정복하라,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라, 빛과 소금이 되라.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 마태복음 5:13-14
“크리스천 많은 자리로 옮기면 신앙이 쉬워지겠지”라는 기대는 종종 소금을 소금병에 모으려는 시도다. 모으면 짜게 되는 것이 아니라 쓸모없게 된다.
반대편 병리도 있다. 무기력의 신학화. 명백히 영혼을 파괴하는 자리에 십수 년을 머물면서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라는 명분으로 결단을 미루는 것. 이것은 순종이 아니라 두려움에 거룩의 옷을 입힌 것이다. 자리를 지키는 용기와 자리를 떠나는 용기는 둘 다 성경적이다. 둘 사이의 분별만이 영적 성숙의 증거다.
환경 전에 관계망
“신앙생활이 어렵다”는 호소에 앞서 점검할 것이 있다. 혼자인가. 한국 직장인이 신앙을 지키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회사가 아니라 고립이다. 같은 교회 직장인 소그룹, 월요일 기도제목을 나눌 한 명, 가정 안의 작은 예배의 불 — 이것들이 서 있으면 대부분의 불편은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뀐다. 환경을 바꾸기 전에 관계망을 먼저 세우는 것이 순서다.
초소인가, 포로지인가
다시 처음의 질문이다.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초소인가, 건져내시려는 포로지인가. 네 시금석으로 정직하게 점검하라. 예배가 봉쇄되었는가. 양심이 강요받는가. 가족의 영혼이 가정 예배로 해결될 수 없을 만큼 파괴되는가. 동기가 하나님 나라를 향하는가. 하나라도 분명히 “그렇다”이면 이주는 순종이다. 그 외의 경우 대부분은 머물러 빛이 되는 것이 소명이다.
그리고 이 분별을 혼자 내리지 말라. 한국 교회에서 잘못된 이주의 대부분은 혼자 결정된 이주였다. 목회자와 성숙한 공동체와 기도 가운데, 자기 감정이 아니라 주님의 음성을 구하라. 초소에 선 자는 제 마음대로 자리를 뜨지 않는다. 그러나 상관이 부르시면 지체 없이 새 자리로 이동한다. 신자의 삶은 이 두 순종 사이에서 흔들린다. 흔들림 자체가 살아 있는 신앙의 증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