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 베뢰아인의 청취법

설교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 베뢰아인의 청취법

#신앙과삶#설교#말씀#베뢰아

어느 주일, 회중은 설교를 듣고 “은혜로웠다”고 말한다. 그러나 월요일 아침이 되면 본문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또 어떤 주일, 다른 회중은 설교를 들으며 스마트폰으로 원어를 검색하고, 집에 돌아가 SNS에 “그 목사는 틀렸다”고 쓴다. 두 장면 모두 흔하다. 그런데 둘 다 성경이 칭찬하는 청취와는 거리가 멀다.

사도행전 17장은 사뭇 다른 회중을 기록한다. 바울이 두 도시에서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한 도시는 그를 적대했고, 다른 도시는 그를 칭찬받을 방식으로 들었다. 누가의 기록을 읽어 보자.

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 사도행전 17:10-12

누가가 베뢰아인을 칭찬하기 위해 쓴 단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받고”(edexanto meta pasēs prothumias)이고, 다른 하나는 “날마다 성경을 상고”(anakrinontes tas graphas)다. 이 두 동사가 같은 회중에 동시에 붙어 있다는 사실이 이 본문의 모든 것이다. 받음 따로, 검증 따로가 아니다. 받으면서 검증했고, 검증하면서 받았다.

받기만 하는 청취는 위험하고, 상고만 하는 청취는 메마르다

한국 교회 — 그리고 현대 교회 전반 — 이 병든 지점은 바로 이 이중성의 붕괴다. 받음과 상고가 하나의 인격 안에서 함께 자라지 않고 각각 극단으로 흘러간다. 세 가지 왜곡이 있다.

첫째, 설교자 우상화. “우리 목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그게 맞다”는 말은 겸손처럼 들리지만, 실은 베뢰아인이 거부한 태도다. 바울은 자신조차 검증 대상임을 갈라디아 교회에 단호히 선언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 갈라디아서 1:8

사도 자신도 상고의 대상이다. 하물며 어느 담임목사, 어느 유튜브 강사도 마찬가지다. 강단의 권위는 설교자의 인격에서 오지 않고 오직 본문에서 온다. 설교자를 검증 불가능한 존재로 떠받드는 순간, 회중은 이단 교사의 “비밀 해석”에도 똑같이 무방비로 열린다. 성경을 독점 해석한다고 주장하는 한국의 비유 풀이 집단이 성도들을 낚는 지점이 정확히 여기다 — 스스로 성경을 상고할 근육을 잃은 회중.

둘째, 무비판적 흡수. 첫 번째와 비슷하지만 결이 다르다. 설교자에 대한 애착이 아니라, 그저 “은혜받는” 감정 소비에 머무는 청취다. 설교 중에 뜨거웠고 눈물이 났으나, 본문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논증으로 그 결론에 도달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씨뿌리는 비유에서 경고하신 “돌밭”의 청취다.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 마태복음 13:20-21

감정은 받되 지성은 작동하지 않는 청취는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셋째, 비평적 냉소. 이것은 SNS 시대 이후 더 흔해진 병이다. 팔짱을 낀 채 설교의 허점만 찾는다. 자칭 “나는 베뢰아인”이다. 그러나 본문은 분명히 말한다 — 베뢰아인은 간절한 마음으로 받고 상고했다. 받을 마음 없는 상고는 상고가 아니라 사냥이다. 자기 의의 방어기제다. 베뢰아의 “간절함”(prothumia)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말씀 앞에서 굴복할 준비가 된 마음을 뜻한다.

너그러움 — 듣는 귀의 품격

누가는 베뢰아인을 칭찬할 때 한 단어를 의도적으로 골랐다. 그들이 “더 너그러워서”라고 번역된 eugenēs는 본래 “고귀한 혈통”을 뜻한다. 듣는 귀의 귀족성. 왕의 품격.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청취자의 모습이다.

왕의 품격은 어디서 오는가? 두 가지 동시성에서 온다.

  1. 말씀이 내게 무엇이든 명령할 권위가 있음을 인정하는 굴복
  2. 강단에서 선포된 것이 정말 그 말씀인지 검증하는 분별

종교개혁이 회복한 만인제사장직(벧전 2:9)의 실천적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성도는 성경 앞의 독자이고, 강단의 청취자이자 검증자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 가능성을 신학적으로 보증한다.

성경의 모든 것이 그 자체로 똑같이 명료한 것은 아니며, 모든 이에게 똑같이 분명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구원을 위하여 알고 믿고 지켜야 할 것들은 성경의 이곳저곳에 너무도 분명하게 제시되고 설명되어 있어서, 학식 있는 자뿐 아니라 배우지 못한 자들도 통상적 수단을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장 7항

즉, 평범한 성도도 성경을 상고할 수 있다. 베뢰아의 무명의 유대인들이 날마다 두루마리를 펼쳐 바울의 메시지를 검증했다면, 오늘의 성도도 자기 교회 담임의 설교와 유튜브 강사의 영상을 성경으로 검증할 수 있고, 검증해야 한다. 이단이 제시하는 “비밀 코드”는 불필요하다. 성경은 이미 충분히 명료하다.

설교자의 책임 — 투명한 유리창이 될 것

이 청취 신학은 설교자에게도 무거운 책임을 지운다. 설교자는 자신이 상고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기뻐해야 한다. 회중이 성경을 펼친 채 내 설교를 검증하는 것은 나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돕는 것이다. 바울은 이 원칙을 자신의 사역 전체에 적용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 고린도후서 4:5

설교자는 유리창이다. 사람들이 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창 너머의 그리스도를 보도록. 창이 자기를 드러내려 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창이 아니다. 그러므로 강단에 서는 자는 매주 스스로에게 묻는다 — 이 설교가 내 생각의 진열인가, 본문의 드러냄인가.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은 강단의 효력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분명히 못박는다.

하나님의 영은 말씀, 특히 말씀의 전파를 회심시키고 죄인들을 세우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삼으신다.

—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89문

성령이 효과적 수단으로 쓰시는 것은 “내 감상”이 아니라 “말씀의 전파”다.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본문을 정직하게 풀어낸 것일 때만, 성령이 그것을 회심과 성화의 도구로 삼으신다.

청중의 책임 — 성경을 무릎 위에 펴는 한 가지 습관

이 모든 신학은 결국 한 가지 주일 아침의 습관으로 수렴한다. 성경을 들고 예배에 오는 것. 주보만 들고 교회에 들어서면서 베뢰아인이 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성경을 펴고, 본문을 확인하고, 설교자가 그 본문에서 정당하게 도출한 것인지 따라가고, 주중에 다시 같은 본문을 읽어 씹어보는 것 — 이것이 잃어버린 평신도 주해 전통이다.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가 뜻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베뢰아인들은 주일 한 번 들은 바울의 메시지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두루마리를 펼쳐 다시 검증했다. 그 반복 속에서 말씀이 뿌리를 내렸고,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한 결실이 따랐다(행 17:12).

아멘 — 서명된 확증

예배의 끝에서 회중이 외치는 “아멘”은 무엇인가? 검증 없는 열광이 아니다. 분위기에 휩쓸린 동의도 아니다. 아멘은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이며, 나는 이에 동의한다”는 서명된 확증이다. 베뢰아의 상고를 거친 “아멘”만이 진짜 아멘이다.

간절한 마음과 상고하는 손 — 이 둘이 함께 있는 자만이 베뢰아인이다. 받기만 하는 자는 언제든 거짓 교사의 먹이가 되고, 상고만 하는 자는 스스로 마르다 죽는다. 성경을 무릎 위에 펼친 채 “간절히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회중, 그런 회중이 앉아 있는 강단에서만 참된 설교가 산다. 그리고 그때 누가가 기록한 그 단어, 너그러움 — 듣는 귀의 품격이 — 다시 한국 교회의 자리에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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