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론 1부: 하나님은 정말 불공정하신가

예정론 1부: 하나님은 정말 불공정하신가

#변증#예정론#구원론#개혁주의

가장 불편한 교리

예정론만큼 기독교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교리가 있을까. “하나님이 일부만 구원하도록 정하셨다”는 말을 처음 듣는 사람은 거의 본능적으로 반발한다. 공정하지 않다고 느낀다. 사랑의 하나님이 왜 그런 일을 하시겠는가.

그런데 바로 이 불편함 자체가 우리에게 묻고 있다. 우리가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는 것 — “구원은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어야 한다” — 이 전제가 과연 성경적인가? 이 글은 그 질문을 따라간다.

죽은 자에게 주어진 은혜

예정론을 이해하려면 먼저 인간의 상태를 직시해야 한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 에베소서 2:5

“죽은 자.” 바울이 택한 단어는 “아픈”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이다. 아픈 사람은 의사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 있다. 하나님을 향한 의지도, 능력도, 욕구도 없다. 신학에서 이것을 “전적 부패”(total depravity)라 부른다 — 인간의 모든 부분이 죄의 영향 아래 있다는 뜻이다.

이 전제가 바뀌면 예정론의 의미도 완전히 달라진다. 만약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선택할 능력이 있다면, 하나님이 일부만 선택하신 것은 차별이다. 그러나 만약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 그 가운데 일부를 건져 올리시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은혜다.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근거로 선택하시는가? 미래의 믿음을 미리 보시고? 선한 행위를 예지하시고? 성경의 답은 놀랍도록 단호하다.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 로마서 9:11-13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바울은 선택의 근거를 피조물 안에서 찾는 모든 시도를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야곱이 에서보다 나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야곱의 미래 믿음을 하나님이 미리 보셨기 때문도 아니다.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 선택의 근거는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 안에 있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이 말하는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이다. “아무 이유 없이”라는 뜻이 아니다. 선택의 이유가 인간 안에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 안에 있다.

모세오경은 이 진리를 더 따뜻한 언어로 표현한다.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 신명기 7:7-8

“다만 사랑하심으로.” 선택의 궁극적 근거는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이다. 이스라엘이 크거나, 강하거나, 선해서가 아니다. 그저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은 이 진리 앞에서 논증이 아니라 찬양으로 응답한다.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 에베소서 1:4-5

“창세 전에.” 시간이 시작되기도 전에 하나님은 이미 선택하셨다. 이 사실 앞에서 “내가 하나님을 선택했다”는 말이 얼마나 교만한 착각인지 보이기 시작한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바울 자신이 이 질문을 예상했다. 로마서 9장에서 그는 독자가 품을 반발을 정면으로 다룬다.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로마서 9:14-16

바울의 답변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다르다. 그는 하나님의 결정을 변호하지 않는다. 대신 결정의 토대를 가리킨다. 출애굽기 33:19를 인용하며 말한다 — 긍휼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주권에 속한 것이지, 피조물이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고.

여기서 공의긍휼의 구분이 결정적이다. 공의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다. 죄인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은 정죄다 — 이것이 공의다. 그런데 일부에게 정죄 대신 용서를 주신다면 — 이것은 공의를 넘어서는 긍휼이다. 긍휼은 의무가 아니다. 의무가 아닌 것을 베풀지 않았다고 불공정하다 할 수 있는가?

한 비유를 생각해 보자. 사형 선고를 받은 100명의 죄수가 있다. 왕이 그 가운데 30명에게 특별 사면을 베풀었다. 나머지 70명이 불공정하게 대우받은 것인가? 아니다. 그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았다. 불공정한 것은 사면이 아니라 — 사면을 ‘의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 로마서 9:20-21

이 말이 불쾌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핵심은 이것이다 — 피조물은 창조주의 작정을 판결하는 자리에 설 수 없다. 이것은 사고의 포기가 아니라, 인식론적 겸손이다.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고백이다.

예정론은 입구가 아니라 출구다

여기서 한 가지 결정적인 오해를 바로잡아야 한다. 예정론은 신학의 입구가 아니라 출구다. 이것은 아직 믿지 않는 사람이 “나는 택함받았나?”를 고민하기 위한 교리가 아니다. 이미 믿는 사람이 자신의 여정을 돌아보며 발견하는 진리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내 능력이 아니었구나. 내 결단이 아니었구나. 나를 먼저 사랑하시고, 나를 먼저 부르시고, 나에게 믿음까지 선물로 주신 분이 계셨구나.”

이 발견 앞에서 나오는 반응은 공포가 아니라 찬양이다. 에베소서 1장의 바울이 그랬다. 예정론을 설명하면서 그는 논증이 아니라 찬송을 불렀다 —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 없다. 하나님이 일부를 선택하셨다면, 선택받지 못한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가? 이 교리가 참이라면, 우리가 전도를 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가장 깊은 곳의 질문 — 하나님이 모든 것을 미리 정하셨다면, 이것은 결국 운명론과 무엇이 다른가? 이 질문들을 피하면, 예정론은 절반의 진리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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