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교회의 관계 — 대체신학인가, 성취신학인가

이스라엘과 교회의 관계 — 대체신학인가, 성취신학인가

#신학#언약신학#종말론#이스라엘#교회론

한국 교회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는 좀처럼 중립적이지 않다. 어떤 설교단에서는 이스라엘 국가의 수립과 예루살렘 수복이 예언 성취로 선포되고, 성전 재건과 재림 임박이 한 호흡으로 엮인다. 다른 강단에서는 그 모든 것이 쓸모없다고 단언된다. 교회가 이미 이스라엘을 대체했으므로, 오늘의 이스라엘 민족은 구속사에서 더 이상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두 목소리는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한 가지 전제를 공유한다. 이스라엘과 교회를 두 개의 분리된 실체로 본다는 것이다. 한쪽은 그 둘을 끝까지 분리해 각자에게 별도의 프로그램을 할당하고, 다른 한쪽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밀어냈다고 본다. 개혁주의 언약신학은 이 두 전제를 모두 거부한다. 교회는 이스라엘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성취했고, 성취했기 때문에 오히려 민족적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닫히지 않는다.

한 뿌리, 접붙인 가지

바울이 로마서 11장에서 그린 그림은 놀랄 만큼 분명하다. 그는 두 그루의 나무를 세우지 않는다. 하나의 참감람나무가 있고, 꺾인 가지가 있고, 접붙여진 돌감람나무 가지가 있다.

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 로마서 11:17-18

뿌리는 교회가 아니다. 뿌리는 아브라함 언약, 곧 창세기 12장과 15장과 17장에서 시작된 한 약속이다. 이방인 신자는 새 나무를 세운 것이 아니라 같은 나무에 접붙여졌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스라엘을 밀어냈다는 이미지 자체가 성경이 그린 그림과 어긋난다.

칼뱅은 이것을 본질과 경륜의 구별로 정식화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은 본질에서 하나다. 같은 중보자 그리스도, 같은 은혜의 약속, 같은 영적 기업. 그러나 경륜에서 다르다. 그림자가 실체로 바뀌었고, 할례가 세례로, 유월절이 성찬으로 이행했다. 바빙크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의 언약, 두 경륜이다.

여기서 “대체”라는 단어가 왜 잘못된 명명인지 드러난다. 대체는 두 개의 독립된 실체를 전제한다. A를 치우고 B를 세우는 그림이다. 그러나 성경의 그림은 한 나무다. 잎이 바뀌고 계절이 바뀌어도 뿌리는 같다.

갈라디아서 6장 16절의 “하나님의 이스라엘”

쟁점이 첨예해지는 구절이 있다.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 갈라디아서 6:16

세대주의는 이 구절을 “이 규례를 행하는 자(=이방인 교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민족적 이스라엘)“의 이중 대상으로 읽는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전체 논증이 이 독법을 무너뜨린다. 바울은 3-4장 내내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은 혈통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자임을 논증했다(갈 3:7, 3:29). 바로 앞 15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고 못 박는다.

그 직후 16절의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다시 혈통적 이스라엘로 되돌리는 것은, 방금 쌓은 논증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문맥은 분명하다. 참 이스라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다. 할례받은 유대인이든,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이든, 새로 지으심을 받아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다.

이것이 성취신학의 본질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폐기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의 참된 주인이 드러난 것이다.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얻은 그 이름—“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의 궁극적 담지자는 그리스도이며, 그 안에 있는 모든 신자가 그 이름을 공유한다.

로마서 11장은 여전히 열려 있다

그렇다면 민족적 이스라엘에는 아무 약속도 남지 않은 것인가. 여기서 개혁주의는 강경 대체신학과 길을 달리한다. 갈라디아서 6장이 참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다룬다면, 로마서 11장은 민족적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운명을 다룬다. 두 본문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 로마서 11:25-26

“온 이스라엘”을 교회로 영해하면 25절의 “이방인의 충만한 수”와 구분이 사라진다. 바울의 논증은 세 단계다. 더러는 우둔해졌다. 그 우둔함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올 때까지 지속된다. 그 후 굳어진 이스라엘이 풀어진다. 그것이 바울이 말하는 신비다.

이것은 세대주의적 천년왕국 정치 체제가 아니다. 별도의 구원 경륜도 아니다. 에베소서 2장 14-15절이 “둘로 하나를 만드사… 한 새 사람을 지어”라고 선포한 그 한 몸으로의 편입이다. 같은 감람나무에 다시 접붙여지는 일이다(롬 11:23).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같은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일이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 로마서 11:29

이 짧은 선언이 개혁주의가 강경 대체신학을 거부하는 이유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뒤집지 않으신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열린 부르심은 여전히 유효하며, 교회는 유대인 선교의 문을 닫을 수 없다.

두 오류 사이의 좁은 길

정리하면 이렇다. 세대주의는 이스라엘과 교회를 영원히 분리해 두 개의 구원 프로그램을 만든다. 에베소서 2장의 “한 새 사람”이 이 분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강경 대체신학은 이스라엘을 교회로 완전히 흡수해 로마서 11장의 “온 이스라엘”과 11장 29절의 “후회하심이 없음”을 공허하게 만든다.

개혁주의 언약신학은 좁은 가운데 길을 걷는다. 한 뿌리, 한 언약, 한 구주. 그 뿌리에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가 함께 붙어 있으며, 굳어진 가지들이 다시 접붙여질 날을 기다린다. 교회는 이스라엘의 대체가 아니라 확장이자 성취이며, 동시에 민족적 이스라엘을 향한 약속은 닫히지 않는다.

이 신학이 우리에게 주는 실천은 두 가지다. 첫째, 성경을 오늘의 지정학 뉴스로 환원하지 말라. 우리의 소망은 중동의 영토 분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둘째, 유대인을 향한 사랑과 선교의 부담을 놓치지 말라. 그들이 접붙여질 때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겠느냐”(롬 11:15)는 바울의 기대는 여전히 교회의 기대여야 한다.

한 나무가 있다. 뿌리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며, 그 나무의 이름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 이스라엘이라 불린다. 우리는 그 나무에 접붙여진 가지다. 자랑할 것도, 업신여길 것도 없다. 뿌리가 우리를 보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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