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문장이 둘로 쪼개질 때
“저는 하나님은 믿어요. 그런데 교회는 안 다녀요.”
이 문장은 오늘 한국에서, 그리고 서구 전역에서, 해마다 더 자주 들린다. 한국 개신교 성도 중 약 4분의 1이 이른바 가나안 성도로 추정된다. ‘안 나가’를 거꾸로 읽어 붙인 이 이름은, 이들이 무신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조용히 증언한다. 그들은 기도한다. 성경을 읽는다. 유튜브 설교를 듣는다. 다만 제도 교회의 문턱을 다시 넘지 않는다.
이 현상을 비난조로 다루는 것은 복음적이지 않다. 교회가 자초한 부분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세습, 재정 불투명, 권력형 성추행, 정치화된 강단, 권위주의 — 가나안 성도 대부분은 교회가 교회다워지기를 가장 간절히 원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떠남은 종종 냉소가 아니라 슬픔에서 온다.
그러나 이 글이 묻는 질문은 다른 것이다. 저 문장 — “하나님은 믿지만 교회는 안 다닌다” — 이 하나의 명제로서 성립 가능한가? 신앙과 교회를 따로 뗄 수 있는가? 이 물음은 상처에 대한 공감과는 다른 층위에 있다. 상처는 끌어안아야 한다. 그러나 교리는 해부해야 한다.
이 명제에 숨은 네 가지 전제
그 문장을 진술하는 순간 우리는 보통 자각하지 않는 네 가지 전제를 받아들인다.
첫째, 신앙은 개인과 하나님 사이의 사적 거래라는 전제. 이것은 18세기 계몽주의의 개인주의와 20세기 소비주의가 결합해 만든 현대적 산물이지, 성경의 구조가 아니다. 구약의 언약은 언제나 아브라함 “과 그의 씨”, 이스라엘 공동체와 맺어졌다. 신약의 성령은 오순절에 개인 골방이 아니라 한 장소에 모인 공동체에 부어졌다.
둘째, 교회는 선택적 서비스라는 전제. 맞으면 다니고, 마음에 안 들면 바꾸거나 끊는다. 이 사고방식은 교회를 소비자가 가치를 평가하는 상품으로 환원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소비자 선택지가 아니라 가족이자 몸이다. 가족에서 이름을 뺄 수는 있어도 팔다리에서 몸을 뺄 수는 없다.
셋째, 영성은 무형이고 내면적이라는 전제. 이것은 사실 기독교가 아니라 플라톤주의의 유산이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몸을 입고 시간 속에 들어오신 사건이다. 기독교의 영성은 결코 탈(脫)몸적일 수 없다. 몸 없는 영성은 고대 교회가 정죄한 영지주의의 재판이다.
넷째, 제도는 복음과 반비례한다는 전제. 제도가 클수록 복음은 적다는 낭만적 반(反)제도주의다. 그러나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은 형태와 질서를 가진다. 부패한 제도가 복음을 가릴 수는 있다. 그러나 제도 자체가 복음의 적인 것은 아니다. 성령은 형식 없는 영감이 아니라 질서의 영이시다 (고린도전서 14:33, 40).
이 네 전제를 흔들어보면, “하나님은 믿지만 교회는 안 다닌다”는 문장은 논리적으로 견고한 명제가 아니라 시대의 공기를 빌려 서 있는 문장임이 드러난다.
교회를 어머니라 부른 이유
장 칼뱅은 《기독교 강요》 4권을 통째로 교회론에 바쳤다. 1권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2권에서 구속주 그리스도를, 3권에서 성령의 적용을 다룬 그가, 4권 1장 1절에서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외적 수단(externa media)을 주셨고, 그것을 통해 믿음을 낳고 기르기를 기뻐하셨다.”
교회의 말씀 선포, 성례의 시행, 권징의 행사 — 이것들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구원의 통로다. 칼뱅이 4권 1장 4절에서 교회를 어머니(mater)라 부른 것은 수사가 아니라 신학적 주장이다. “그녀의 태에서 우리가 잉태되고, 그 젖으로 양육되며, 그녀의 보호 아래 있지 않으면 이 육신의 삶을 벗을 때까지 우리는 자라지 못한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면서 교회를 어머니로 거부하는 구조는 성경에 없다.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그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 로마서 8:9
그리고 이어서 이 같은 사도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부른다.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 고린도전서 12:12-13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으면서 그의 몸에는 붙지 않을 방법은 없다. 머리에 연결되면 몸에도 연결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은유가 절대 허용하지 않는 단 하나의 조합이다.
가시 교회와 비가시 교회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구분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모든 교회 출석자를 구원받은 자로, 모든 이탈자를 유기된 자로 단정하는 율법주의에 빠진다.
개혁주의 전통은 교회를 가시 교회(ecclesia visibilis)와 비가시 교회(ecclesia invisibilis)로 구별한다. 비가시 교회는 모든 시대와 장소의 참된 택자들의 회중이다. 가시 교회는 역사 속에서 눈에 보이는 형태로 존재하는 신앙고백 공동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장은 이 둘을 순서대로 말한다.
“1항. 보이지 않는 보편적 교회는… 그리스도 아래에서 하나로 모인 택자 전체로 구성된다.”
“2항. 보이는 교회는… 참된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과 그들의 자녀들로 구성된다. 이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하나님의 집과 가족이다. 이 교회 밖에서는 통상적인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out of which there is no ordinary possibility of salvation).”
이 마지막 문장에서 ‘통상적’(ordinary)이라는 단어가 결정적이다.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주권적 예외를 부정하지 않는다. 십자가의 강도가 그랬다. 무인도에서 성경을 읽고 회심한 선원이 그럴 수 있다. 가시 교회 없이 구원받는 일이 하나님께는 불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예외다.
문제는 이것이다. 예외를 통상의 방식으로 선택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예외로 일하실 자유와, 우리가 예외를 자기 편의의 근거로 삼는 것은 다른 일이다. 복음서 어디에도 그리스도께서 “혼자 나를 따르라”고 부르신 기록은 없다. 그는 열둘을 부르셨고, 초대교회는 모이기를 그치지 않았다.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 사도행전 2:42, 46
모이기를 폐하는 습관
히브리서 저자는 이 문제를 이미 1세기에 마주했다.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 히브리서 10:24-25
“모이기를 폐하는 습관(συνήθεια).” 사도 시대에도 이미 습관이 된 이탈이 있었다. 박해 때문이든, 실망 때문이든, 피로 때문이든 — 이유는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유를 따지지 않는다. 그는 단지 처방을 제시한다. 서로 돌아보고, 서로 격려하고, 더욱 모이라.
왜인가? 그가 바로 앞 절들(히브리서 10:19-23)에서 말했듯, 그리스도의 피로 열린 새롭고 산 길은 개인에게 주어진 사적 통로가 아니라 “우리”(24절)가 함께 들어가는 문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개인적으로 적용되지만, 구원의 삶은 공동체적으로 수행된다.
은혜의 방편이라는 문제
여기서 현대 가나안 성도가 실제로 마주하는 반론은 이런 것이다. “설교는 유튜브로 들을 수 있다. 기도는 혼자 한다. 성경은 혼자 읽는다. 그러면 충분하지 않은가?”
이 질문은 은혜의 방편(means of grace) 교리를 알지 못할 때 나온다.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 154문은 이렇게 묻고 답한다.
“문: 그리스도께서 그의 중보의 은택을 교회에 전달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외적 방편은 무엇인가? 답: 그리스도께서 그의 중보의 은택을 교회에 전달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외적이고 통상적인 방편은 그의 모든 규례이며, 특히 말씀, 성례, 기도이다.”
셋 중 어느 것도 완전한 사적 행위로 환원되지 않는다.
말씀은 낭독만이 아니라 선포(kerygma)를 포함한다. 선포는 교회의 부름 받은 사역자가 공동체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수행하는 행위다. 유튜브 설교는 말씀의 유익한 편린일 수 있으나, 그것은 당신을 아는 목자가 당신에게 주는 말씀이 아니다.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권면하는 말씀이 아니다. 당신의 죄를 알고 지목하는 말씀이 아니다.
성례는 혼자 받을 수 없다. 세례는 교회가 주는 표지이고, 성찬은 함께 떼는 떡이다. 고린도전서 10장 17절은 이것을 정확히 말한다.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 고린도전서 10:17
온라인 성찬이라는 것은 성경에 없다. 떡을 함께 떼지 않으면 성찬이 아니다.
기도조차 완전히 사적이지 않다.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는 첫 단어부터 “우리 아버지”로 시작한다 (마태복음 6:9). 혼자 하는 기도에도 이 복수형은 사라지지 않는다. 기도는 언제나 성도들의 기도와 연결된 기도다.
교회 밖에서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는 주장은, 결국 이 세 방편 중 말씀의 일부만을 사적으로 소비하고 나머지 둘을 버리는 선택이다. 그것은 신앙의 축소이지 신앙의 자유가 아니다.
상처받은 자에게
그러므로 이 글은 가나안 성도에게 돌아오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그 명령은 이 글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다.
그러나 이 글은 한 가지 구분은 요청한다. 상처받은 자로 남는 것과 상처에 안주하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여행자이고 후자는 정착민이다. 교회의 부패에 맞아 쓰러진 자가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일어서기를 포기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진단해보자. 당신이 교회를 떠난 처음의 이유는 정당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후 당신은 다음 교회를 찾는 여정에 있는가, 아니면 교회 없는 상태에 정착했는가? 전자는 순례이고, 후자는 자기 기만이다.
찾을 교회는 화려한 교회가 아니다. 대형 교회일 필요도 없다. 개혁주의 전통이 말하는 참된 교회의 표지 세 가지는 단순하다. 말씀이 순전히 선포되는가. 성례가 바르게 시행되는가. 권징이 신실하게 이루어지는가. 이 셋이 불완전하게나마 있는 공동체라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어머니의 태에 다시 두신 자리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믿지만 교회는 안 다닌다”는 문장은, 깊이 들여다보면 두 개의 왜곡된 주어를 품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조립한 하나님일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교회”는 성경의 교회가 아니라 내가 상처 입은 특정 기관일 가능성이 있다. 둘을 성경의 언어로 바꾸면 문장은 이렇게 된다.
“나는 성자 하나님의 몸의 머리이신 성자를 믿는다. 그러나 그의 몸은 사랑하지 않는다.”
이 문장이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머리에 붙어 있으면서 몸을 사랑하지 않을 방법은 없다. 사도 요한이 단호히 말한 대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 요한일서 4:20
교회는 완벽하지 않다. 교회는 거룩하면서 동시에 죄인들의 공동체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한 몸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몸이다 (사도행전 20:28). 그분이 사랑하신 몸을 우리는 어떤 이유로도 완전히 떠날 수 없다.
교회 없는 영성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상처 입은 영혼이 교회를 다시 찾는 느린 여정은 언제나 가능하다. 하나님은 그 여정의 끝에서 기다리신다. 그분은 어머니의 자리를 비워두지 않으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