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단, 새 얼굴 9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른가 — 마르키온주의

옛 이단, 새 얼굴 9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른가 — 마르키온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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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구약이 싫어요” — 이 한 문장의 족보

청년 상담실에서 가장 자주 듣는 고백 중 하나가 이것이다. “목사님, 저는 구약이 너무 무서워요. 예수님만 믿고 구약은 안 읽으면 안 될까요?” 이 청년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그는 2세기에 파문당한 한 이단의 언어를 2,000년 뒤에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그 이단의 이름은 마르키온주의(Marcionism)다. 마르키온(Marcion, c. 85–160)은 흑해 연안 시노페 출신의 부유한 선주였고, 그의 주장은 2세기 중반 로마 교회를 뒤흔들었다. 144년, 로마 교회는 그를 파문하고 그의 헌금 2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의 가위는 버려지지 않았다. 그것은 오늘도 한국 강단 위에 조용히 얹혀 있다.

마르키온이 주장한 세 가지 오류

첫째, 두 신 교리(二神論). 마르키온에 따르면 성경의 하나님은 두 분이다. 구약의 창조주는 열등하고 잔혹한 공의의 신(Demiurge)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그와 전혀 다른 낯선 사랑의 신(deus alienus)이다. 예수는 이 낯선 신이 저 아래 창조주의 세상에 구원자로 보낸 분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진노하는 여호와와 신약의 자비로우신 아버지는 서로 다른 두 존재라는 것이다.

둘째, 구약 폐기론. 첫 번째 오류에서 필연적으로 두 번째가 따른다. 구약은 열등한 신의 기록이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무효이며 폐기되어야 한다. 창세기의 창조도, 아브라함의 언약도, 시내산의 율법도, 선지서의 약속도 우리와 상관없는 남의 집 문서다.

셋째, 축소 정경. 마르키온은 자신의 전제에 맞춰 새로운 정경을 편집했다. 구약 전체를 제거했고, 네 복음서 중 유대적 색채가 가장 옅다고 본 누가복음 하나만 남기되 그 안에서도 구약을 인용한 부분은 삭제했다. 바울 서신 10권을 남겼으나 역시 구약을 긍정하는 구절들은 잘라 냈다. 이것은 성경에 대한 외과 수술이었고, 동시에 신론에 대한 외과 수술이었다.

성경이 증언하는 한 하나님

마르키온의 전제가 무너지는 자리를 보자. 성경은 단 하나의 하나님을 증언한다. 구약의 심장인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은 이렇게 선언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 신명기 6:4

그리고 이 구절을 “첫째 되는 계명”이라 부르며 인용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막 12:29). 마르키온의 체계가 성립하려면 예수는 이 구절을 부정하셨어야 한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이 구절을 가장 큰 계명이라 재확인하셨다.

예수께서 기도하신 아버지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사두개인과의 논쟁에서 주님은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 마태복음 22:32

구약의 족장들의 하나님과 신약의 예수의 아버지는 동일하신 분이라는 선언이다. 주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오지 않으셨고, 완전케 하러 오셨다(마 5:17). 부활하신 날, 엠마오 도상에서 주님이 하신 일은 더 분명하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 누가복음 24:27

마르키온의 가위는 이 설명을 잘라 낸다. 남는 것은 뿌리 없는 예수, 약속 없는 구속자, 역사에서 떨어져 나온 공중의 구세주다.

진노와 자비는 두 신에게 나뉠 수 없다

마르키온의 가장 정서적인 논거는 이것이었다. “구약의 신은 진노하고, 신약의 신은 사랑한다.” 많은 현대 독자들이 그를 따르게 만드는 감상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이 감상은 성경을 한 번도 끝까지 읽지 않은 자의 감상이다.

구약의 하나님을 가장 상세히 계시하는 출애굽기 34장을 보자.

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 출애굽기 34:6-7

이것이 구약의 하나님이 스스로 밝히신 자기 이름이다. 자비와 공의, 은혜와 심판이 한 호흡 안에 함께 있다. 반대로 신약의 하나님은 진노하지 않으시는가. 히브리서 기자는 시내산의 동일한 하나님을 가리켜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 히브리서 12:29

어린양이 진노의 잔을 여시는 요한계시록 6장,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치신 사도행전 5장은 신약의 책이다. 구약의 진노와 자비, 신약의 진노와 자비는 동일하신 한 하나님의 동일한 품성이 역사의 다른 시점에서 드러난 것이다. 속성을 두 신에게 분배하는 순간, 성경은 둘 다 잃는다.

마르키온을 받으면 십자가가 비워진다

마르키온주의의 치명적 결말은 그가 사랑을 보호하려다가 은혜의 기반을 허물었다는 점에 있다. 그의 체계에는 만족시켜야 할 공의가 없다. 그의 “낯선 사랑의 신”은 진노하지 않으므로, 십자가는 무엇을 위한 제사인가. 그 신에게 만족시킬 공의가 없다면 속죄는 무의미해진다. 구약의 진노 교리를 지워 버리면 신약의 속죄 교리가 무너진다. 이것이 마르키온주의의 내적 붕괴다.

바울의 복음은 이 지점을 정확히 반대로 세운다.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 로마서 3:25-26

십자가는 하나님이 의로우시면서도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유일한 자리다. 공의가 진짜로 있었기에 그것을 만족시키는 대속이 필요했다. 진노가 없었다면, 갈보리는 없다.

정경의 통일성 — 한 언약, 두 경륜

개혁주의 신앙고백은 이 문제를 정면에서 차단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장 6항은 구약과 신약을 한 은혜 언약의 두 집행 단계로 고백한다. 율법 아래의 이스라엘과 복음 아래의 교회는 동일한 구원, 동일한 중보자, 동일한 하나님을 가진 한 백성이다. 벨직 신앙고백 25조 역시 구약의 의식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을 뿐, 구약의 하나님과 그 약속은 여전히 우리 신앙의 토대라고 선언한다.

바빙크의 표현으로 다시 말하자면,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회복한다(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restaurat). 신약은 구약을 파괴하지 않는다. 구약이라는 약속을 신약이라는 성취가 끌어안는다. 그림자가 실체에 흡수되고, 예표가 실재에 삼켜진다. 창조와 구속, 언약과 성취는 한 하나님의 단일한 경륜(oeconomia Dei) 안에 있다.

역설적이게도, 교회가 신구약 66권의 통일된 정경을 확정하는 과정은 마르키온의 이단을 거치며 가속되었다. 그가 축소 정경을 들이밀자, 교회는 전체 성경이 하나라는 사실을 더욱 명시적으로 고백하게 되었다. 이단은 교회를 쓰러뜨리지 못하고, 오히려 교회가 자기 고백을 정교하게 다듬게 한다.

그의 가위는 오늘도 강단 위에 있다

문제는 21세기다. 교회는 마르키온을 파문했지만, 그의 가위는 파문하지 못했다.

한국 교회의 최근 설교 경향을 관찰하면 이런 풍경이 드러난다. 설교 본문의 대다수가 신약이고, 구약 중에서도 시편·잠언·이사야 몇 장이 반복될 뿐, 레위기·민수기·소선지서는 거의 올라오지 않는다. 찬양집회에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조용히 교체된다. QT 교재는 위로의 구절을 모으고 심판의 본문을 건너뛴다. 정경은 책꽂이에는 있지만 강단에는 없다. 이것이 오늘의 실질적 마르키온주의(practical Marcionism)다.

이 조용한 마르키온주의가 고대의 것보다 더 위험하다. 고대의 마르키온은 교리를 선언했기에 반박 가능했다. 오늘의 마르키온은 정서적 선호의 얼굴로 온다. “나는 사랑의 하나님이 좋아요”라는 말에 반박하기 어렵다. 그러나 진노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공의 없는 자비는 자비가 아니다. 십자가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

첫째, 구약을 정기적으로 설교해야 한다. 창세기·출애굽기·이사야·다니엘을 장년부 강단의 정규 편성에 올리라. 소선지서 중 최소 두 권은 1년에 한 번씩 강해하라.

둘째, 구약의 진노 본문을 회피하지 말고 그리스도로 해석하라. 가나안 정복 기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의가 종말론적으로 드러나는 예표이며, 그 진노는 결국 십자가 위로 쏟아졌다. 홍수의 물은 그리스도의 피 아래서 재해석된다.

셋째, “사랑의 하나님”과 “거룩하신 하나님”을 나누지 말라. 둘을 나누면 둘 다 잃는다. 하나의 하나님을 두 속성으로 찢는 순간, 우리는 2세기의 가위를 다시 드는 것이다.

넷째, 새신자 전도에서 창세기 3장의 타락을 생략하지 말라. 죄의 심각성을 모르면 은혜의 크기를 알 수 없다. 구약 없는 복음은 진공 속의 속삭임이다.

마르키온은 교회사의 화석이 아니다. 그는 매주 설교 본문이 선택될 때, QT 구절이 정해질 때, 찬양 가사가 수정될 때 강단에 올라온다. 그를 완전히 내려놓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신구약 66권 전체를 한 하나님, 한 언약, 한 그리스도를 향해 읽어 내는 것이다. 그분은 나뉘지 않으신다. 그분의 책도 나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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