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단, 새 얼굴 2부: 네스토리우스주의 — 그리스도 안의 두 인격

옛 이단, 새 얼굴 2부: 네스토리우스주의 — 그리스도 안의 두 인격

#역사신학#이단#교리사#기독론#네스토리우스

“예수님이 죽으신 거지, 하나님이 죽으신 건 아니죠”

한 청년부 모임. 청년 한 명이 진지한 얼굴로 묻는다. “전도사님, 십자가에서 정말 하나님이 죽으신 거예요? 신은 죽을 수 없잖아요.” 전도사가 웃으며 답한다. “좋은 질문이야.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이 인간으로 죽으신 거지, 하나님이 죽으신 건 아니야. 신성은 죽을 수 없거든.”

이 답변은 한국 강단에서 셀 수 없이 반복되어 왔다. 의도는 거룩하다. 하나님의 무변성(immutability)을 지키려는 본능이다. 그러나 이 한 문장이 5세기 콘스탄티노플의 한 총대주교가 단죄받은 바로 그 자리에 청년부를 데려다 놓고 있다는 사실은, 말한 사람도 들은 사람도 알지 못한다.

오늘의 새 얼굴은 이렇게 고요히 강단으로 들어온다. 큰 소리로 외치는 이단보다 더 위험한 것이, 정통의 입을 빌려 들어오는 이단이다.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 — 같은 그리스도, 다른 강조

5세기 초, 동방 교회는 두 신학 학파의 긴장 속에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통합을 강조했다. “한 분이시다. 한 행위자이시다. 한 그리스도이시다.” 안디옥 학파는 두 본성의 구별을 강조했다. “신성과 인성을 혼동하지 말라. 그분의 인간적 약함과 신적 영광을 섞지 말라.”

두 강조 모두 정당하다. 정통은 결국 두 강조를 함께 붙드는 길이었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 자기 강조를 절대화하면, 곧장 이단으로 미끄러진다. 알렉산드리아 쪽으로 너무 멀리 가면 두 본성을 한 본성으로 융합하는 단성론(monophysitism)이 된다. 안디옥 쪽으로 너무 멀리 가면 한 위격을 두 위격으로 분리하는 — 그것이 네스토리우스주의다.

마리아의 호칭에서 터진 균열

콘스탄티노플의 새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c.386-c.451)는 안디옥 학파의 후예였다. 그는 강단에서 한 호칭에 충격을 받았다 — Theotokos, “하나님을 낳은 자”라는 마리아 호칭이다. 이 호칭은 4세기 후반부터 동방 교회에 자리잡고 있었고, 마리아에 대한 칭송이 아니라 그 아기가 누구신지에 대한 선언이었다. 마리아가 낳은 그 아기는 한 인간 위격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네스토리우스는 이 호칭이 “하나님이 시작점을 가진다”는 인상을 준다고 보았다. 그래서 Christotokos(“그리스도를 낳은 자”)로 바꿀 것을 주장했다. 그의 동기는 신성 보호였다. 그러나 결과는 다른 것이었다. 마리아가 낳은 인간 예수와 그 안에 거하시는 신적 로고스가 두 주체로 갈라진 것이다. 두 위격이 도덕적 일치(synapheia) 속에서 결합한 두 그리스도.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Cyril of Alexandria)가 12개 단죄(Anathemas)를 들고 일어섰고, 에베소 공의회 431년이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했다. 그러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두 학파는 여전히 서로의 위험 속에 있었다. 칼케돈 공의회 451년이 마침내 두 위험을 동시에 막는 정통 신앙고백을 세웠다.

한 위격(prosopon, hypostasis), 두 본성(physis). 그 두 본성은 혼합 없이(asynchytos), 변화 없이(atreptos), 분리 없이(adiairetos), 구별 없이(achoristos) 결합한다.

앞의 두 부정사는 알렉산드리아 쪽 위험(혼합)을 막는다. 뒤의 두 부정사는 안디옥 쪽 위험(분리)을 막는다. 칼케돈은 한쪽 학파의 승리가 아니라, 두 학파 모두에게 절제를 요구한 회의였다.

왜 두 인격이면 우리의 구원이 무너지는가

여기까지는 교회사 강의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박물관의 유물이 아니다. 두 인격으로 나누는 순간 무너지는 것은 우리의 구원 그 자체다.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신 분은 누구이신가. 만일 인간 예수만 죽으셨고 신적 로고스는 그 자리를 떠나 있었다면, 그 죽음은 한 인간의 죽음이다. 한 인간의 피는 다른 인간들의 죄를 무한히 담당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의 증언은 다르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 사도행전 20:28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사도 바울은 이 표현을 부주의하게 쓰지 않았다. 그분의 피가 무한한 가치를 가지는 이유는, 그 피를 흘리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두 위격으로 나누면 이 한 절은 거짓이 된다.

빌립보서도 같은 구조로 증언한다.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빌립보서 2:6-8

주어가 한 분이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분과 “십자가에 죽으심”의 그분이 같은 한 위격이다. 두 인격이면 비움(kenosis)은 일어나지 않는다. 한 인간이 그저 죽었을 뿐이다.

요한도 같은 한 위격을 증언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요한복음 1:14

“말씀 육신이 되어.” 두 주체가 만난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말씀 그분이 인성을 자기 위격 안으로 취하신 것이다.

한 위격 두 본성 — 정통의 정밀한 문법

칼뱅은 「기독교 강요」 II.13-14에서 이 신비를 다루며 거듭 강조했다. 위격은 본성이 아니다. 본성은 “무엇인가”(what)를 묻는 범주이고, 위격은 “누구인가”(who)를 묻는 범주다. 그리스도 안에는 두 개의 “무엇” —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 — 이 있다. 그러나 그 둘을 소유하시는 “누구”는 한 분, 영원하신 성자다.

여기서 정통이 발전시킨 정밀한 문법이 communicatio idiomatum(속성의 교통)이다. 한 위격에 속한 모든 행위와 속성은 두 본성 모두에 귀속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
  •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행 3:15)

바울도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라고 말하는데, 이 반사실 가정문은 바로 그 ‘영광의 주’가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음을 전제한다.

이 표현들이 의미를 가지려면 두 본성이 한 위격 안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신성은 그대로 죽지 않으면서도, 그 신성을 가지신 분이 인성으로 죽으셨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처음의 청년부 장면으로 돌아가자. “예수님이 인간으로 죽으신 거지, 하나님이 죽으신 건 아니에요.” 이 말의 어디가 문제인가. 신성이 죽지 않는다는 것은 옳다. 그러나 communicatio idiomatum을 잃으면, 그 말은 곧장 두 인격으로 미끄러진다. 정통의 표현법은 이것이다.

신성은 죽을 수 없으나, 신성을 가지신 그분은 인성으로 죽으셨다. 그래서 그 한 죽음이 무한한 가치를 가진다.

한 단어 차이다. “예수님이”가 아니라 “신성을 가지신 그분이.” 그러나 그 한 단어가 칼케돈과 네스토리우스를 가른다.

오늘의 새 얼굴

5세기 콘스탄티노플의 그림자는 오늘 네 가지 얼굴로 강단과 책상에 들어와 있다.

첫째 얼굴 — 자유주의 신학. “역사적 예수는 한 평범한 갈릴리 사람이었고, 부활 신앙 속에서 교회가 그를 신적 그리스도로 고백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이래 자유주의 신학의 이 도식은, 인간 예수와 신적 그리스도를 두 다른 주체로 분리한다. 형식적으로는 정확히 네스토리우스다. 그들은 Theotokos가 아니라 Christotokos조차도 받지 않을 것이다.

둘째 얼굴 — 신영지주의의 “그리스도 의식”. 동방 종교와 결합한 일부 신영지주의는 “예수는 한 인간이었으나 그에게 그리스도 의식이 임했고, 우리도 그 의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신성을 인간에게 일시적으로 내려앉는 비인격적 에너지로 환원한다. 두 주체로의 분리가 더 극단화된 형태다.

셋째 얼굴 — 일부 신흥종교의 메시아 강림설. “어떤 시대 어떤 사람에게 그리스도가 강림하셨다.” 이만희 류의 한국 신흥종교 메시아론, 통일교의 재림론 모두 이 구조다. 인간 한 명이 있고, 그에게 신적 영이 임한다. 두 인격이다. 정통 기독교가 가르치는 한 위격 두 본성의 성육신이 아니다.

넷째 얼굴 — 한국 강단의 무의식적 표현들. 이것이 가장 가깝고 가장 미묘하다.

  • “예수님이 죽으신 거지 하나님이 죽으신 게 아닙니다.”
  • “예수님은 인성으로는 모르셨지만 신성으로는 아셨다.” (이 표현 자체는 정통이지만, 한 위격 안에서의 통합을 명시하지 않으면 두 위격으로 미끄러진다.)
  • “그분의 인성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한계가 그분의 인성이라는 한 위격 귀속이 빠지면 두 주체가 된다.)

이 표현들 자체가 무조건 이단인 것은 아니다. 정통 기독론 안에서 충분히 다듬어 쓸 수 있다. 그러나 한 위격 안에서라는 단서를 빼는 순간, 강단은 자기도 모르게 5세기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간다.

그리고 마리아의 호칭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짚어야 한다. Theotokos라는 호칭이다. 개혁주의는 마리아 숭배·중보 기도·무염시태·승천 교리를 분명히 거부한다. 마리아는 한 죄인이며, 은혜로 구원받은 한 자매다. 그러나 Theotokos 호칭은 마리아에 관한 호칭이 아니라 예수에 관한 호칭이다.

그것은 이렇게 선언한다. “마리아가 낳은 그 아기는 한 인간 위격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 호칭을 거부하는 것은 마리아를 낮추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낮추는 일이다. 칼뱅도 청교도 신학자들도 이 호칭의 정통성을 인정했다. 우리도 동일하다.

한 위격이 흘리신 한 방울의 피

매튜 헨리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의 피 한 방울은 온 세상의 죄를 씻고도 남는다 — 그것이 하나님의 피이기 때문이다.” 이 한 문장에 칼케돈의 모든 신학이 들어 있다.

만일 두 위격이라면, 십자가에서 흘러내린 그 피는 한 인간의 피일 뿐이다. 한 인간의 피는 한 인간의 죄를 위해서도 부족하다. 그러나 그 한 위격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 한 위격이 인성으로 그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 그 피는 무한한 죄의 값을 치른다. 당신의 죄도, 나의 죄도, 다 거기서 끝났다.

당신이 다음번 강단에서 “예수님이 죽으신 거지 하나님이 죽으신 건 아닙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 마음속으로 한 단어를 보태라. “신성을 가지신 그분이 인성으로 죽으셨다.” 그 한 단어 보탬이 칼케돈을 지키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의 구원이 무한한 토대 위에 서 있게 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 디모데전서 2:5

한 분 중보자. 한 위격. 두 본성. 이 한 분 안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시고, 사람이 하나님을 만난다. 그 한 분이 흘리신 한 방울의 피가, 영원의 무게를 가진다. 네스토리우스가 결국 놓친 것은, 바로 그 한 방울의 무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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