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단, 새 얼굴 10부: 도나투스주의 — 저 목사가 준 세례는 유효한가

옛 이단, 새 얼굴 10부: 도나투스주의 — 저 목사가 준 세례는 유효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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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목사에게 세례받은 게 유효한가요?”

한 자매가 교역자실 문을 두드렸다. 눈이 붉어져 있었다. 몇 달 전, 자신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목사가 성추문으로 면직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는 주저하며 물었다. “제가 받은 세례 — 그게 아직 유효한가요? 그 사람 손을 거친 건데요. 다시 받아야 하지 않나요?”

이 질문은 단지 한 자매의 것이 아니다. 한국 교회가 지난 30년간 되풀이해 온 스캔들 — 당회장의 횡령, 부교역자의 성범죄, 권위 있던 목사의 이중생활 — 앞에서 많은 성도가 같은 혼란을 겪는다. 그리고 이 질문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4세기 북아프리카에서 이미 한 분파가 똑같은 질문 앞에 다른 답을 택했다가 교회를 둘로 쪼갰다. 그들의 이름은 도나투스파(Donatistae)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불길과 “traditor”라는 낙인

303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기독교 사상 가장 잔혹한 박해령을 내렸다. 교회는 파괴되고, 성경은 불태워졌으며, 성직자들은 경전을 관리에게 내어주고(tradere) 배교를 증명하도록 강요받았다. 목숨을 걸고 거부한 이들도 있었지만, 공포 앞에서 성경을 내어준 성직자도 적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붙었다 — traditor(내어준 자, 배신자). 이 라틴어가 훗날 영어 traitor의 어원이 된다.

박해가 끝나고(313년 밀라노 칙령), 311년 카르타고에서 새 주교 카이킬리아누스(Caecilianus)가 선출되었다. 그런데 그에게 안수한 주교 중 한 명이 traditor였다고 알려진 펠릭스였다. 북아프리카의 엄격한 교회는 격분했다. “배신자의 손을 거친 안수는 무효다. 따라서 카이킬리아누스는 참 주교가 아니다.” 그들은 따로 대립 주교 마요리누스를, 그 뒤를 이어 도나투스(Donatus Magnus)를 세웠다. 이렇게 북아프리카 교회는 두 개로 갈라졌다.

도나투스파의 교리는 단호했다. 배교했거나 중대한 죄를 지은 성직자가 집전한 세례·안수·성찬은 모두 무효다. 교회의 거룩은 직원의 개인적 순결에서 나오므로, 타락한 사역자가 섞여 있는 공동체는 이미 교회가 아니다. 따라서 이들에게서 세례받은 자는 참 교회로 건너올 때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

옳은 열심, 틀린 해법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이 있다. 도나투스의 분노는 부분적으로 정당했다. 박해 때 성경을 내어준 자가 회개도 없이 다시 강단에 서는 것을 그들은 견딜 수 없었다. 이 감수성 자체는 성경적이다. 교회는 거룩해야 한다. 회개 없는 배교자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직무에 복귀시키는 교회는 자기 양심을 잃은 교회다.

그러나 그들의 해법이 치명적으로 틀렸다. 그들은 교회의 거룩을 지키려다, 성례의 효력의 근거를 그리스도에게서 사람에게로 옮겼다. 이것이 도나투스주의의 구조적 오류다.

이 오류를 가장 집요하게 반박한 사람이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354-430)다. 그는 「도나투스 분파 반박」과 「세례론」에서 거듭 강조했다. 성례의 효력은 집전자의 인격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있다(ex opere operato Christi — 그리스도의 이루신 일에 근거하여). 집전자는 도구일 뿐이며, 더러운 관을 통해 흐르는 물도 그 근원이 맑다면 여전히 맑은 물이다.

성경은 이 점을 명확히 가르친다. 주께서는 자신을 배반할 유다의 손에도 떡을 들려 보내셨고, 그 떡을 받은 다른 제자들의 식사가 무효가 되었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파주의를 꾸짖으며 이렇게 못박는다.

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 고린도전서 3:5-7

심는 사역자의 인격이 성례의 실체가 아니다. 실체는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 곧 약속의 주이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바리새인의 자리 — 권위와 사람의 분리

예수께서는 도나투스가 고민한 것과 유사한 상황을 이미 다루셨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공적 권위를 가졌지만 개인적으로는 위선자였다. 주님의 답은 단호하면서도 정교했다.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 마태복음 23:2-3

자리의 권위사람의 행실은 구분된다. 모세의 자리에서 선포되는 말씀의 권위는 선포자의 인격이 바닥나도 훼손되지 않는다. 이 원리를 교회 성례에 적용한 것이 초기 교회의 입장이었고, 종교개혁자들이 재확인한 것이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성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양심에 그분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확증하기 위해 주시는 외적 표지다”(Inst. IV.xiv.1). 표지의 무게는 표지를 전달한 우체부의 덕에 있지 않고, 표지를 보내신 왕에게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동일한 진리를 고백한다.

성례의 은혜는 그것을 집례하는 자의 경건이나 의향에 의존하지 않고, 성령의 사역과 성례를 제정하신 말씀에 달려 있다. (WCF 27.3)

한국 교회의 두 방향 오류

여기서 한국 교회의 현실로 돌아온다. 목회자의 도덕 실패 앞에서 성도는 두 방향으로 동시에 넘어질 수 있다. 한쪽은 도나투스의 오류, 다른 한쪽은 도나투스 반박의 왜곡이다.

첫 번째 방향 — 도나투스의 오류. “그 목사에게 받은 세례는 무효다. 다시 받아야 한다.” “그 교회의 성찬을 먹은 나는 더럽혀졌다.” 이렇게 말하는 성도는 자기도 모르게 성례의 근거를 그리스도에게서 사람으로 옮기고 있다. 당신의 세례는 그 목사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 28:19) 받은 것이다. 그 언약의 인은 사역자가 타락했다는 이유로 지워지지 않는다. 당신이 흔들리는 것은 자연스러우나, 당신의 구원의 언약은 흔들리지 않는다.

두 번째 방향 — 반박의 왜곡. 지난 30년 한국 교회가 반복한 더 큰 실수가 여기 있다. “성례는 유효하다”가 “목사의 죄를 덮어도 된다”로 오용되는 것이다. 이것은 도나투스 반박의 역방향 왜곡이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칼뱅도, 어느 누구도 “그러므로 범죄한 사역자를 그대로 세워 두라”고 말한 적이 없다.

성례의 유효성과 사역자의 권징은 다른 두 축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30장은 교회의 권징을 분명히 명령한다. 범죄한 직원은 공적으로 권징되어야 하며, 회개 없는 중대한 죄는 면직과 출교에까지 이른다. 교회의 객관적 거룩(성례의 유효성)과 교회의 실천적 거룩(권징의 엄정함)은 동시에 지켜져야 한다. 하나만 붙잡으면 교회는 반드시 비틀어진다.

두 축을 함께 붙드는 교회

바빙크는 교회의 거룩을 두 차원으로 구분했다. 전가된 거룩 — 그리스도의 의가 교회에 전가되어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객관적으로 거룩하다. 진행 중인 거룩 — 성도와 공동체가 성화되어 가는 과정적 거룩으로,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도나투스는 이 둘을 혼동하여, 진행 중인 거룩이 완성되지 않으면 전가된 거룩도 흔들린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주께서 가라지 비유(마 13:24-30)로 밀과 가라지가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는 교회를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그 밭을 미리 갈아엎으려 했다.

그러나 참 교회는 반대로 선다.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객관적 거룩을 믿음으로 붙잡고, 동시에 공동체의 진행 중인 거룩을 권징으로 지킨다. 당신의 세례는 유효하다 — 그리스도의 이름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락한 사역자는 권징되어야 한다 — 그리스도의 몸의 순결이 우리에게 맡겨졌기 때문이다.

한 자매의 붉어진 눈에 답해야 할 말은 이것이다. “당신의 세례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당신에게 언약의 인을 치셨고, 그 인은 어떤 사람의 손에 의해서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동시에 교회는 그 목사의 죄 앞에 침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둘은 다른 축입니다. 당신이 속한 것은 어떤 사역자의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 고린도전서 12:13

한 성령으로 세례받은 한 몸. 그 몸의 머리는 언제나 그리스도다. 머리가 흔들리지 않는다면, 몸도 흔들리지 않는다. 도나투스가 놓친 것이 바로 이 단순한 진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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