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진노는 감정인가, 속성인가

하나님의 진노는 감정인가, 속성인가

#신론#진노#거룩#속죄

한국 강단에는 두 절벽이 있습니다.

한쪽 절벽에서는 진노가 외칩니다. 옛 부흥회의 잔향처럼, 죄인을 향한 위협이 회개의 유일한 동력으로 작동합니다. 다른 한쪽 절벽에서는 진노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단 한 문장 안에 모든 것이 흡수되고, 진노라는 단어는 미숙하고 시대착오적인 신인동형론의 잔재로 치워집니다.

두 절벽 모두 같은 오류를 공유합니다. 진노를 감정으로, 곧 하나님이 가끔 발하셨다가 거두시는 일시적 정서로 보는 오류입니다. 한쪽은 그 감정을 부풀려 무기로 삼고, 다른 한쪽은 그 감정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하여 삭제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진노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서 필연적으로 흘러나오는 본질의 함수이며, 사랑과 분리된 다른 신의 얼굴이 아니라 한 본질의 다른 빛입니다.


신인동감적 표현이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

성경은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후회하시고, 슬퍼하신다고 말합니다. 신학은 이러한 표현을 신인동감적 표현(anthropopatheia)이라 부릅니다.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도덕적 응답을, 시간 속을 사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계시하신 방식입니다.

이 개념을 잘못 사용하면 두 가지 정반대의 오류가 생깁니다.

첫째 오류: 신인동감적 표현이라는 라벨로 진노를 통째로 무력화시키는 것. “성경의 진노는 인간 감정의 투사일 뿐이고, 실제 하나님은 그런 응답을 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이는 본문이 견디지 못하는 환원입니다. 성경은 진노를 부수적 장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움이 죄와 마주칠 때의 핵심 반응으로 다룹니다.

둘째 오류: 신인동감적 표현을 인간 감정과 동일시하여, 하나님이 우리처럼 변덕스럽다고 상상하는 것.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어제는 진노하시고 오늘은 무관심하시며 내일은 다시 격분하시는 불안정한 존재가 됩니다.

정확한 길은 가운데 있습니다. 변덕은 부정되어야 하지만, 일관된 도덕적 응답은 긍정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외부 자극에 의해 흔들리는 수동적 정념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하심에서 능동적으로 발현되는 일관된 빛입니다. 신학이 말하는 무감수성(impassibility)은 하나님이 차갑다는 뜻이 아니라, 외부에 의해 휘둘리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거룩이 변하지 않으시기에, 죄에 대한 응답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진노가 감정이 아니라 속성인 이유입니다.


한 본질의 다른 빛 — 단순성의 교리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단순성(divine simplicity)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부분으로 구성된 존재가 아니십니다. 사랑이라는 부분과 공의라는 부분이 따로 있어 그것들을 합한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동시에 공의이시며, 두 속성이 동일한 한 본질 안에서 완전하게 통일되어 있습니다.

진노 또한 이 단순성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진노는 사랑의 반대편에 놓인 별도의 부분이 아닙니다. 진노는 거룩하심의 함수이며, 그 거룩이 죄와 마주칠 때 한 본질이 그 죄에 대해 발하는 빛입니다. 같은 태양이 얼음에는 녹임으로, 진흙에는 굳힘으로 작용하듯, 같은 거룩이 회개하는 자에게는 자비로, 회개하지 않는 죄에는 진노로 발현됩니다. 다른 두 신이 아니라, 한 분이 다르게 마주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의 자기 계시가 이 진리를 결정적으로 보여줍니다.

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 출애굽기 34:6-7

이것이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자기 이름입니다. 자비와 보응이 한 호흡 안에 함께 나옵니다. 6절을 읽고 7절을 잘라내면 한국 교회의 한쪽 절벽에 떨어집니다. 7절만 외치고 6절을 무시하면 다른 절벽에 떨어집니다. 두 줄을 함께 읽을 때만, 우리는 성경의 하나님 앞에 섭니다.


진노 없는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니다

진노가 본질적 속성이 아니라면, 십자가는 무의미해집니다. 만족시킬 무엇도 없는데, 무엇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셨겠습니까? 진노를 삭제하는 신학은 자기도 모르게 십자가를 한낱 도덕적 시범으로 격하시킵니다.

사도 바울은 회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 로마서 1:18

현재 시제입니다. 진노는 미래의 어느 날 깨어날 휴면 상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하늘로부터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는 거룩의 발현입니다. 우리가 지금 숨 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진노가 자비 안에서 더디 발현되도록 일반 은총이 그 위를 덮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 로마서 3:25

여기 “화목제물”의 헬라어는 ἱλαστήριον(힐라스테리온)으로, 단순한 화해의 상징이 아니라 진노를 흡수하여 만족시키는 제물(propitiation)을 가리킵니다. 본문은 분명히 말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나타나야 했기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무엇을 향한 의입니까? 죄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심, 곧 진노의 정당한 처리입니다.

이사야의 증언은 더 강렬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 이사야 53: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받으신 것은 사람의 폭력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진노가 아들 위에 쏟아졌습니다. 이는 분노한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을 학대한 사건이 아니라, 영원한 작정 안에서 성부와 성자가 함께 결정하시고 성자가 자원하여 그 잔을 받으신 사건입니다.

진노가 본질적이기에, 사랑의 크기는 만족된 진노의 무게로 측정됩니다. 진노가 가벼우면 십자가도 가벼워지고, 사랑도 함께 가벼워집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가 십자가의 사랑이 얼마나 거대한지를 알려면, 그 사랑이 흡수한 진노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회개의 두 동력 — 사랑과 경외

진노를 삭제한 강단에서는 회개의 동력이 사랑 하나로 축소됩니다.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시니 돌아오라”는 호소만이 남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다른 차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 시편 130:4

용서가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경외를 깊게 한다고 말합니다. 용서받은 자가 더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용서받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진노를 흡수해야 했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회개의 동력은 사랑만이 아니라 경외도 함께입니다. 사랑만으로 회개하라고 말하는 설교는, 회개의 절반을 잘라낸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 강단이 회복해야 할 균형입니다. 사랑만 말하면 감상이 되고, 진노만 말하면 율법주의가 됩니다. 그러나 진노를 통과한 사랑을 말하면, 그것이 복음입니다. 두 절벽 사이에 놓인 좁은 길은 두 절벽을 모두 인정하는 길입니다. 진노는 진짜이고, 사랑도 진짜이며, 그 둘은 다른 신의 두 얼굴이 아니라 한 본질의 다른 빛이라는 길입니다.


마주 서야 할 한 분

하나님의 진노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분의 거룩하심에서 흘러나오는 본질의 함수이며, 사랑과 분리된 별도의 부분이 아니라 한 본질이 죄와 마주칠 때 발하는 빛입니다. 의롭지 않은 신은 사랑할 자격도 없습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는 신의 사랑은 가벼워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이 두 빛이 한 점에서 만난 사건입니다. 진노는 거기서 정당하게 발현되었고, 사랑은 거기서 그 진노를 스스로 흡수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 선 자는 두 가지를 동시에 보아야 합니다. 자기 죄가 얼마나 무거웠기에 그 진노가 필요했는가, 그리고 그 진노를 스스로 받으신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거대한가.

진노를 잃어버린 강단은 사랑의 무게도 잃어버립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강단은 진노 앞에서 도망칠 곳을 잃습니다. 두 빛이 한 본질에서 흘러나옴을 보는 자만이, 떨면서 동시에 안식합니다.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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