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예수님인가 3부: 왜 빈 무덤이 모든 것을 바꾸는가

왜 예수님인가 3부: 왜 빈 무덤이 모든 것을 바꾸는가

#예수 그리스도#부활#소망#변증학

남은 증거

2부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바울의 솔직한 경고와 마주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 고린도전서 15:17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선언이 울렸다. 빚이 갚아졌다. 그런데 바울은 부활이 없으면 그 선언이 무효라고 말한다. 왜 그런가? 빚을 갚는 것과 무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 않는가?

아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의 사건의 두 면이다. 십자가가 지불이라면, 부활은 영수증이다.


하늘의 영수증

은행에서 대출금을 완납하면 영수증이 발급된다. 영수증 자체가 빚을 갚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수증이 없다면, 지불이 실제로 이루어졌는지 누가 알겠는가?

로마서 4장 25절이 이 구조를 정확히 보여준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리심을 받으셨느니라” — 로마서 4:25

‘내줌이 되고’ — 십자가. ‘살리심을 받으셨느니라’ — 부활. 바울이 구분한 이 두 절반은 쪼갤 수 없다. 십자가에서 치러진 대가가 하나님 아버지의 공의를 실제로 만족시켰다면, 그 증거는 무엇인가? 죽은 자를 무덤에 그대로 두시는 것인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다시 살리신 것, 그것이 공개적 선언이다 — “빚이 청산되었다. 값이 치러졌다. 이 사람은 의롭다.

만약 그리스도가 무덤에 남아 계셨다면, 십자가는 한 의인의 비참한 처형에 불과했을 것이다. 로마 제국에 처형당한 수많은 유대인 중 하나. 그러나 빈 무덤은 선언한다 — 이 죽음은 다른 모든 죽음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독침이 뽑힌 죽음

부활이 확증하는 것은 칭의만이 아니다. 부활은 인류의 가장 깊은 공포 — 죽음 — 의 구조를 영구히 바꿔 놓았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 고린도전서 15:55-57

바울은 죽음을 독침이 있는 벌에 비유한다. 그리고 선언한다 — 독침이 뽑혔다고. 죽음의 독침은 죄이고, 죄의 권능은 율법인데,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를 몸소 담당하시고 부활로 죄와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이다. 벌은 여전히 날아다닌다 — 그리스도인도 육체의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독침은 이미 없다. 죽음은 더 이상 최종 심판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잠시 잠드는 것이 되었다.

이것은 관념이 아니라 실존적 확신이다. 암 선고 앞에서, 사별의 눈물 앞에서, 내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매일의 발걸음 앞에서, 빈 무덤은 선언한다 —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요한복음 11:25-26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이 질문을 마르다에게 던지셨다. 논증이 아니라 인격적 물음이다. 그리고 이 물음은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도 향해 있다.


첫 열매 — 새 창조가 시작되었다

부활이 바꾸는 것은 개인의 죽음만이 아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첫 열매(ἀπαρχή)라 불렀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 고린도전서 15:20

첫 열매는 단독이 아니다. 첫 열매는 전체 수확을 보증한다. 밀밭에서 첫 이삭을 거두었다면, 나머지 밭도 익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첫 열매라면, 그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부활은 이미 보증된 것이다.

그리고 이 약속은 인간의 영혼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성경은 놀랍게도 피조 세계 전체의 회복을 말한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 로마서 8:19, 21

부활 신앙은 영혼이 몸을 탈출하는 것이 아니다. 영지주의는 물질을 악으로 보았지만, 성경의 소망은 정반대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환영이 아니었다.

“내 손과 발을 보라 바로 나니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 누가복음 24:39

살과 뼈가 있는 몸, 그러나 성령에 의해 변화된 몸. 바울이 신령한 몸(σῶμα πνευματικόν)이라 부른 것은 ‘몸 없는 영’이 아니라 ‘성령이 완전히 주관하는 몸’이다. 구속은 물질의 폐기가 아니라 물질의 변화와 갱신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이 세계의 파괴가 아니라 이 세계의 완성이다.


지금 살아 계시다는 것

그런데 부활은 과거의 사건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서 일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 히브리서 7:25

‘항상 살아 계셔서.’ 부활은 2천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 결과는 지금 진행형이다. 그리스도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후 지금 이 순간에도 아버지 우편에서 자기 백성을 위해 간구하고 계신다. 이것이 베드로가 산 소망이라 부른 것의 실체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 베드로전서 1:3

산 소망. 죽은 소망이 아니다. 소망 자체가 살아 있다. 왜? 소망의 근거가 되시는 분이 지금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무덤에 누운 자를 근거로 삼는 소망은 무덤과 함께 썩는다. 그러나 무덤을 깨고 나오신 분을 근거로 삼는 소망은 — 무덤이 그것을 가둘 수 없다.


당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음성

부활의 아침, 무덤 앞에서 울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한마디를 하셨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하는 말이라” — 요한복음 20:16

교리가 아니었다. 논증이 아니었다. 이름이었다. 마리아라는 이름을 부르신 것이다. 그리고 마리아는 그 음성을 알아들었다.

이 시리즈를 통해 우리는 세 가지를 확인했다. 하나님이 왜 사람이 되셔야 했는지(1부),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는지(2부), 그리고 왜 빈 무덤이 모든 것을 바꾸는지(3부). 성육신의 필연성, 십자가의 충분성, 부활의 확실성 — 이 셋이 하나로 합쳐질 때, 복음이 완성된다.

그런데 이 모든 진리는 한 가지 질문 앞에서 개인적이 된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 요한계시록 3:20

지금 이 순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문 밖에 서 계신다. 두드리고 계신다. 이름을 부르고 계신다. 이 분은 과거에 살다 죽은 위인이 아니다. 지금 살아 계신 분이다. 무덤이 가두지 못한 분이다. 죽음의 독침을 뽑으신 분이다. 당신을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간구하고 계신 분이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질문 앞에서 중립은 없다. 문을 여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


Soli Deo Gloria — 오직 하나님께 영광

공유하기

이어서 읽기

auto_awesome

Soli Deo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