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능하신 하나님이 천사의 반역 직후에, 혹은 에덴의 미혹이 끝난 그 순간에 사탄을 소멸시키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더 나아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신 이후에도 왜 마귀의 활동은 역사 내내 허용되는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흔히 두 극단으로 떠밀린다. 한쪽은 이원론 — 하나님과 사탄이 대등한 두 힘이며 하나님은 아직 이기지 못하셨다는 상상. 다른 한쪽은 방임론 — 하나님은 악에 무관심하시다는 냉소. 성경은 둘 다 거절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허용(permissio) — 주권자의 손에 매어 있는 사슬이다.
허용은 방임이 아니다
욥기 1–2장은 이 문제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본문이다. 사탄은 하나님께 나아와 고발하고,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후에야 욥을 건드린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 욥기 2:6
사슬의 길이는 하나님이 정하신다.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라”는 경계선 자체가 사탄이 피조된 반역자이지 대등한 적수가 아님을 증언한다. 칼뱅은 『기독교강요』 1권 14장에서 이를 강조했다. 하나님은 악을 허용하시되 결코 악의 조성자(auctor mali)가 아니시다. 벨직 신앙고백 13조 역시 “마귀들과 우리의 모든 원수들”조차 하나님의 섭리 아래 움직인다고 고백한다.
따라서 “왜 즉시 멸하지 않으시는가”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한순간에 사탄을 소멸시킬 수 있으시다. 질문의 진짜 축은 이것이다. 왜 하나님은 즉시 멸하지 않는 쪽을 택하셨는가.
즉각적 진멸이 불가능한 네 가지 이유
1. 구속사의 내적 논리
창세기 3:15은 최초의 복음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 창세기 3:15
이 선언 자체가 뱀의 즉각적 소멸을 배제한다. 여자의 후손이 장차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는 드라마가 흘러야 한다. 만일 하나님이 에덴 직후 사탄을 제거하셨다면, 그리스도의 성육신·광야 시험·십자가의 승리는 쓰일 수 없는 서사가 된다. 둘째 아담이 첫 아담이 실패한 바로 그 자리에서 승리하시기 위해, 시험자는 그 자리에 있어야 했다.
2. 하나님의 영광의 대비
악의 존재는 하나님의 긍휼을 더 영광스럽게 드러내는 배경으로 쓰인다. 로마서 9장의 바울 논증이 이것이다.
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 로마서 9:22–23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 이 구절이 핵심이다. 진노의 그릇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는 자기 목적이 아니라, 긍휼의 그릇(택자)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무대다. 에드워즈가 『구속사』에서 그린 그림도 이것이다. 흑암이 없으면 빛의 영광은 측량되지 않고, 반역의 심연이 없으면 은혜의 심연도 드러나지 않는다.
3. 택자의 회개의 시간
베드로후서 3장은 종말의 지연을 정면으로 다룬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베드로후서 3:9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약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돌아오지 않은 택자가 있기 때문이다. 사탄의 활동이 허용되는 그 시간은 동시에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는 시간이다. 가라지 비유에서 주인이 “가만 두라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마 13:30) 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라지를 즉시 뽑으면 알곡도 뽑힌다.
4. 십자가는 이미 결정적 승리다
여기서 결정적 오해 하나를 풀어야 한다. 하나님이 사탄을 아직 끝내지 않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결정적으로 끝내셨다. 다만 그 집행의 마지막 단계가 역사의 끝에 위치해 있을 뿐이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 히브리서 2:14
“멸하시며”의 헬라어는 καταργέω — 무력화하다, 권세를 박탈하다. 골로새서 2:15은 같은 진리를 다르게 선포한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십자가에서 사탄은 법적으로 패배했다. 고발자는 더 이상 택자를 정죄할 수 없다(롬 8:33–34). 존 오웬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거듭 강조한 것처럼, 구속은 완성된 사역(opus perfectum)이다.
그렇다면 왜 활동은 남아 있는가. 사탄의 법적 권세는 박탈되었으나, 그의 활동은 종말의 완성까지 허용된다. 왜? 택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사탄을 이기는 경험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 로마서 16:20
주목하라. 너희 발 아래다. 사탄의 최종 진멸조차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도록 계획되었다.
현대인의 질문에 답할 때
이 교리를 고통 중에 있는 이에게 전할 때는, 욥의 친구들의 실수를 피해야 한다. 그들은 옳은 말을 잘못된 태도로 했고 하나님은 그들을 책망하셨다(욥 42:7). 욥기의 결말이 가르치는 바가 있다. 욥은 “왜?”에 대한 명제적 답을 받지 못했다. 대신 하나님을 직접 만났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 욥기 42:5
신정론의 궁극적 답은 논문이 아니라 인격이다. 하나님은 악의 문제에 대해 논문을 쓰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셨다. 갈보리 앞에서 “왜 악을 허용하시는가”라는 질문은 “왜 하나님이 친히 고난 속으로 들어오셨는가”라는 더 깊은 질문으로 이동한다. 이 이동이 일어나지 않으면 신정론은 철학 놀이로 끝난다.
오늘을 위한 세 가지
첫째, 이원론의 유혹을 거절하라. 사탄의 사슬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 둘째, 조급함을 부끄러워하라. 종말이 지연되는 것은 하나님의 무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이며, 그 긍휼의 시간 속에 나 자신도 부르심을 받았다. 셋째, 고통의 자리에서 물러서지 말라. 계시록의 성도들은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이겼다(계 12:11). 사탄의 존재는 우리 증언의 무대이며, 우리의 견인이 증명되는 공간이다.
하나님은 즉시 멸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즉시 멸하지 않으신 그 오래 참으심 속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었고, 교회의 탄생이 있었고,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의 회심이 있었다. 사탄의 남은 시간은 하나님의 약함이 아니다. 그 시간은 당신을 향한 긍휼의 문이 아직 닫히지 않았다는 증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