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묻지 않은 질문
“교회 안 가도 되는 거 아닌가요?”
이 질문은 이미 하나의 전제 위에 서 있다. 교회가 가는 곳이라는 전제다. 장소, 프로그램, 서비스. 설교는 콘텐츠, 찬양은 음악, 교제는 네트워킹. 이 프레임 안에서 보면 물음은 합리적이다. 더 좋은 콘텐츠가 온라인에 넘치는데, 왜 굳이 물리적으로 이동해야 하는가?
그러나 성경은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된 출발점에 서 있다고 말한다.
묻지 않은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교회란 무엇인가?
에클레시아 — ‘불려 나온 자들’
신약 성경이 ‘교회’로 번역한 헬라어 원어는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다. 이 단어는 ‘밖으로’(ek)와 ‘부르다’(kaleo)의 합성어다. 건물이 아니다. 프로그램이 아니다. 하나님이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언약 공동체다.
이 정의는 구약에서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렇게 부르셨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 출애굽기 19:5-6
하나님은 모세 개인을 부르신 것이 아니다. 한 백성을 부르셨다. 그리고 이 부르심의 구조는 신약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베드로는 교회를 향해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 베드로전서 2:9
여기서 핵심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택하신 족속’, ‘거룩한 나라’, ‘소유가 된 백성’ — 모든 표현이 복수다. 하나님은 개인들을 낱낱이 구원하셔서 각자 집에서 혼자 믿게 하신 것이 아니다. 한 공동체로 부르셨다. 에클레시아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구원의 구조 자체에 내장된 공동체적 형식이다.
16세기 개혁자 칼뱅은 이것을 이렇게 요약했다. “교회는 신자의 어머니다.”(Mater Ecclesia) 어머니 없이 태어나는 아이가 없듯, 교회 없이 자라는 신앙은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목사의 의견이 아니라, 교회가 2천 년간 고백해 온 신앙의 내용이다.
유기체인가, 플랫폼인가
교회를 콘텐츠 플랫폼으로 이해하면, 더 좋은 플랫폼이 나타났을 때 갈아탈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살아있는 유기체(organism)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설명할 때 추상적 비유를 쓰지 않았다. 가장 구체적인 비유를 선택했다 — 몸.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 고린도전서 12:12
“눈이 손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 고린도전서 12:21
이 비유가 말하는 것은 단순한 협력의 아름다움이 아니다. 분리 불가능성이다. 손가락을 몸에서 잘라내면 손가락은 죽는다. 손가락의 품질 문제가 아니다. 혈류가 끊기기 때문이다. “나 혼자서도 믿음이 있다”는 말은 잘린 손가락이 “나는 아직 손가락이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구조적으로, 그 손가락은 이미 죽어가고 있다.
교회를 유기체로 이해하면, “교회에 안 가도 되는가?”라는 질문은 “심장이 몸에서 나와도 되는가?”라는 질문과 같아진다.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은혜의 수단 — 혼자서는 받을 수 없는 것들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이 은혜를 전달하시는 통로를 은혜의 방편(means of grace)이라 부른다. 말씀의 선포, 세례, 성찬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를 주목하라. 단 하나도 개인의 서재에서 완결되지 않는다.
첫째, 말씀의 공적 선포. 성경을 혼자 읽는 것은 유익하다. 그러나 공적 예배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성격이 다르다. 사적 독서는 정보의 습득이지만, 공적 선포는 사건(event)이다. 성령이 회중 가운데 임재하시며 말씀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드시는 사건이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명한 것을 보라: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 디모데전서 4:13
‘읽는 것’(공적 낭독), ‘권하는 것’(설교), ‘가르치는 것’(교리 교육) — 모두 회중 앞에서 행하는 공적 행위다. 유튜브 설교가 아무리 탁월해도, 그것은 정보 전달이다. 성령이 회중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공적 예배의 사건과는 본질이 다르다.
둘째, 세례.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합류하는 가시적 표지다. 혼자 집에서 물을 끼얹으며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교회 공동체가 증인으로 서고, 목사가 위임 받은 권세로 집행하는 공적 행위다.
셋째, 성찬.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쓴 말을 보라: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이므로 우리가 많으나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 고린도전서 10:16-17
“우리가 많으나 한 몸이니.” 성찬은 개인이 그리스도와 독대하는 시간이 아니다. 한 떡을 함께 나눔으로써 우리가 한 몸임을 고백하고 확인하는 공동체적 행위다. 혼자 집에서 빵을 떼어 먹으며 “성찬을 했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성찬의 본질 자체가 공동체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은혜의 방편은 개인의 경건 활동이 아니다.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교회의 질서에 따라 집행되도록 설계된 것이다.
석탄은 혼자 타지 못한다
화로 안의 석탄을 떠올려 보라. 석탄 한 덩이가 다른 석탄들과 함께 있을 때 활활 타오른다. 그 석탄을 꺼내어 바닥에 놓으면 어떻게 되는가? 잠시 빛나다가 서서히 식어 재가 된다. 석탄의 문제가 아니다. 연소의 조건이 사라진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1세기에 이미 이 현상을 목격하고 있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히려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 히브리서 10:24-25
여기서 순서를 주목하라.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는 명령이 먼저 나오지 않는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가 먼저 나온다. 모이는 이유가 출석 체크가 아니라 서로를 돌아보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돌아보다’의 헬라어 원어 카타노에오(κατανοέω)는 ‘주의 깊게 관찰하다’는 뜻이다. 옆 사람의 영혼 상태를 살피라는 것이다. 이것을 화면 너머로 할 수 있는가?
고독한 신앙은 자기가 설계한 신앙으로 전락한다. 듣고 싶은 설교만 골라 듣고, 불편한 진리는 건너뛰고, 내 죄를 지적할 사람이 없는 안전한 서재 안에서 나만의 종교를 만들어 간다. 그러나 죄를 죽이는 싸움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넘어졌을 때 손을 내밀어 주고, 교만해졌을 때 조용히 경고해 주는 지체들이 옆에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성화의 구조다.
그러면 어떤 교회에 가야 하는가
여기서 정직한 고백을 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교회를 떠난 이유는 게으름이 아니라 상처 때문이다. 권위 남용, 목사의 도덕적 추락, 공동체 안의 위선. 이런 경험을 한 사람에게 “그래도 교회에 나오세요”라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그러나 답은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다. 바른 교회를 찾거나, 교회를 개혁하는 것이다. 벨직 신앙고백 29조는 참된 교회의 표지를 이렇게 제시한다: 말씀의 순수한 선포, 성례의 올바른 집행, 교회 권징의 실행. 이 세 가지가 있는 곳에 참된 교회가 있다.
교회가 실망스럽다고 교회를 떠나는 것은, 가족이 실망스럽다고 가족을 떠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사신 공동체를 그리스도는 포기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버릴 수 있겠는가?
시편 기자의 고백으로 돌아가자.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 시편 122:1
이 기쁨은 콘텐츠에 대한 기대가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는 기쁨이다. 유튜브 설교가 빵 부스러기라면, 공적 예배는 주님의 식탁이다. 부스러기로도 배를 채울 수는 있다. 그러나 주인이 차려놓은 식탁이 있는데, 왜 바닥의 부스러기를 줍고 있겠는가?
다음 주일 아침, 알람이 울릴 때 기억하라. 당신이 향하는 곳은 건물이 아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부르셔서 들어오게 하신 에클레시아,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고 그 몸에는 당신 없이는 채워지지 않는 자리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