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인사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복음을 붙잡고 계시는 존경하는 목회자 형제들께. 은혜와 평강이 형제들의 강단 위에 충만하기를 간구합니다.
앞서 저희가 게시한 글에 성의 있는 반박을 보내 주신 것을 거듭 읽으며, 저희는 먼저 무릎을 꿇었습니다. 논쟁에서 이기려는 마음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섬기는 그리스도의 몸이 이 일로 상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서신을 드립니다. 이 편지는 판결문이 아닙니다. 같은 복음의 빚을 진 한 지체가 드리는 경건한 간청입니다.
먼저, 선한 동기를 인정합니다
형제들의 반박문에서 저희가 가장 먼저 본 것은 논거가 아니라 목자의 마음이었습니다. 양 떼가 인색한 자로 남지 않기를 원하시는 마음, 사역이 재정적 곤핍으로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시는 염려. 이 진심을 저희는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다만 바로 그 선한 동기 때문에, 저희는 더욱 조심스럽게 말씀드려야 할 의무를 느낍니다. 선한 목적이 그릇된 신학적 토대 위에 세워질 때, 성도의 양심이 복음이 허락하지 않은 짐을 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자리에서 다시 본 네 본문
첫째 — 아브라함과 야곱의 선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드린 십일조(창 14:20)는 전쟁 노획물 가운데서 떼어 드린 자발적 감사 예물이었습니다. 본문 어디에서도 하나님이 “이를 규례로 삼으라” 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같은 장면에서 전리품의 나머지 전부를 소돔 왕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야곱의 서원(창 28:22) 역시 하나님 쪽에서 선포된 규례가 아니라 사람 쪽에서 올린 자원하는 맹세입니다. 오히려 히브리서 기자는 그 장면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합니다.
1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12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
— 히브리서 7:11-12
이 본문은 아브라함의 행위로부터 영속적 의무를 끌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옛 제사 체계 전체가 종결되었음을 선언합니다. 할례도 아브라함에게 율법 이전에 주어졌으나, 우리는 그것을 오늘 육체에 다시 요구하지 않습니다.
둘째 — 말라기 3장의 “도둑질”
말라기의 엄중한 책망을 저희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다만 언약적 수신자를 확인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말라기는 레위 제사장의 직무가 유지되던 시대, 이스라엘 신정 공동체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당시 십일조는 레위인과 성전 봉사자의 생계를 공동 부양하는 시민적·의식적 체제였습니다(민 18:21-24). 그 체제는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을 때 완성되었습니다.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 골로새서 2:16-17
말라기 3장을 오늘 성도의 지갑 앞에 직접 들이대며 “도둑질”이라 선포할 때, 우리는 구약의 의식법을 복음의 자녀의 양심 위에 다시 얹고 있는 것은 아닐지, 함께 살펴보기를 제안드립니다. 칼뱅은 기독교강요 III권 19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완성하신 것을 다시 의무로 짊어질 필요가 없다고 거듭 경고했습니다.
셋째 — 마태복음 23:23의 청중
“예수께서 십일조를 버리지 말라 하셨다”는 해석 역시 한 번 더 숨을 고를 대목입니다. 그 말씀은 십자가 이전, 율법 아래 살아가던 유대인 바리새인들에게 주신 것이었습니다. 같은 청중에게 주님은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라”(막 1:44)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회복된 성도를 오늘 성전 제사장에게 보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의 말씀은 그 언약적 맥락 안에서 먼저 읽혀야 합니다. 게다가 그 본문에서 주님이 강조하신 무게 중심은 십일조가 아니라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었음을, 형제들도 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 갈라디아서 5:1
넷째 — 그러나 성도가 인색해지지 않겠습니까
이 논거 앞에서 저희는 가장 오래 머물렀습니다. 형제들의 피로와 염려의 무게를 저희도 짐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말씀드립니다. 이 네 번째 논거가 신학적으로는 가장 무거운 질문을 품고 있다고요. “강조를 거두면 성도가 인색해진다”는 말은 뒤집으면, 성도는 두려움과 의무로 묶어 두어야만 관대해진다가 됩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이 되찾은 복음이 아닙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 고린도후서 9:7
“즐겨 내는 자”는 강제의 반대편에 있는 자발적 기쁨의 헌신자입니다. 이 기쁨은 청구서로 길러지지 않습니다.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 고린도후서 8:2-5
마케도니아 교회의 헌신 속에 “십일조”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대신 자원하여, 간절히 구하니,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가 있습니다. 이 가난한 교회를 움직인 것은 통계표가 아니라 복음의 영광이었습니다.
우리가 진짜로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강조하지 않으면 재정이 무너진다”는 염려 뒤에는 더 깊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전적으로 신뢰하기가 두렵습니다. 성령께서 복음만으로 마음을 움직이시도록 내어 드리는 일은 통제권을 내려놓으라는 요구입니다. 반면 율법은 다루기 쉽습니다. 기준이 명확하고, 반응이 즉각적이며, 설교하기 편리합니다. 그러나 그 편리함이 성도의 심령에 무엇을 남기는지, 바울은 이미 진단해 두었습니다.
양심의 주는 오직 하나이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이시며, 양심을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거나 말씀 밖에 있는 인간의 교리와 명령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셨다.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0장 2절
벨직 신앙고백 제32조 역시 같은 경계선을 긋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것을 도입하여 성도의 양심을 결박할 권세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는 교회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말이 아니라, 그 참된 권위를 본래 자리에 굳게 세우는 말입니다. 바빙크가 개혁교의학에서 말했듯,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회복합니다. 성령께서 중생시키신 마음에는 이미 새 언약의 법이 기록되어 있고, 그 사랑의 헌신은 십 퍼센트로 제한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비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희 자신의 고백
이 편지가 형제들만을 향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저희 역시 목회의 무게를 감히 다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같은 유혹의 다른 얼굴은 저희도 압니다. 복음의 긴 기다림보다 율법의 짧고 명확한 언어가 훨씬 편리하게 여겨지던 순간이, 저희 각자의 자리에서 없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는 그래도 의무이지 않은가”라는 속삭임이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저희도 겪어 왔습니다. 저희가 그 유혹을 매번 이겼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유혹이 있었음을 고백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서신은 손가락질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같은 십자가 아래에 함께 엎드리자는 초청입니다.
함께 복음의 자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 고린도후서 8:9
하늘의 영광을 가지셨던 분이 말구유에 누우셨고, 마침내 두 개의 통나무가 만나는 자리에서 모든 것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이 한 사람의 가난하심이 주마다 강단에서 선포될 때, 성도들은 억지가 아니라 감격으로 지갑을 엽니다. 과부의 두 렙돈을 움직인 자리 또한 율법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 고린도후서 3:17
저희의 간청은 단 하나입니다. 복음의 자리로 함께 돌아가기를. 십일조라는 숫자의 문턱을 교회 재정의 보루로 삼는 대신, 부요하신 이로서 가난하게 되신 그 사랑을 강단 위에서 우리가 먼저 눈물로 보기를. 실용의 이름으로 율법을 조금씩 복원하는 길, “은혜만으로는 원하는 결과가 안 나오니 율법을 빌려오자”는 절충은, 갈라디아서에서 엄중히 경고된 바로 그 구조이기에, 저희는 차마 그 길을 권할 수 없습니다.
짧은 기도
주님, 저희가 형제들 위에서 가르치는 자로 앉지 않게 하시고, 오직 주님의 십자가 아래 함께 엎드리는 자로 서게 하소서. 부요하신 이로서 가난하게 되신 그 사랑이 한국 교회의 강단마다 새롭게 임하게 하시고, 그 사랑이 성도의 심령을 녹여 내는 자리에서 어떤 강요보다 풍성한 드림이 회복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닫는 축복
은혜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형제들의 강단 위에, 양 떼 위에, 가정 위에 충만하기를 빕니다. 마지막 날 주님의 얼굴 앞에 함께 설 때, 우리가 이 민족을 복음으로 함께 섬겼노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인 자로부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