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이요”가 가장 무거운 말이 되는 순간
당신에게 묻고 싶다.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취업 공고에 지원서를 넣은 지 여섯 달째인가. 결혼을 앞두고 기도하는데 문이 열리지 않는가. 병원에서 “좀 더 지켜봐야 합니다”라는 말을 또 들었는가. 자녀가 교회를 떠난 지 몇 해째,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가.
“하나님, 언제까지입니까?”
이 질문을 입에 담는 순간, 우리 안에서 두 가지 의심이 동시에 고개를 든다. 하나는 ‘**혹시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듣지 못하시는 것은 아닌가’**이고, 다른 하나는 ‘들으셨는데 거절하신 것은 아닌가’이다. 두 의심 모두, 기다림의 시간을 빈 시간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공백 — 으로 전제한다.
그런데 성경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기다림은 하나님이 자리를 비우신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일하고 계신 시간이다.
하나님은 왜 서두르지 않으시는가
우리는 ‘빨리’를 선(善)으로, ‘느림’을 결핍으로 여기는 시대에 산다. 한국 교회도 이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기도를 자판기 버튼처럼 가르치고, 응답의 속도로 믿음의 크기를 가늠하는 분위기가 있다. “기도했는데 왜 안 되나요?”라는 질문 자체가, 기도는 당연히 즉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전제를 품고 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제98문은 기도의 응답이 “그분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결과만 정해놓고 물러나시는 것이 아니다. 과정의 매 순간을 주관하신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 I.16.4에서 이렇게 썼다 — 하나님은 한순간도 손을 거두지 않으신다. 기다림은 하나님이 쉬시는 때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일하시는 때다.
그렇다면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란 무엇인가?
씨앗을 생각해보라. 씨앗은 땅 속에 묻힌 후 한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땅 아래에서는 뿌리가 뻗고, 껍질이 갈라지고, 생명이 움트고 있다. 예수님은 이것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26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 마가복음 4:26-27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과정은 우리 눈에 숨겨져 있다. 그러나 과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회복한다(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restaurat). 그리고 회복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성경이 증언하는 기다림의 풍경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기다린 시간을 살펴보면, 그 길이에 압도당한다.
아브라함은 25년을 기다렸다. 창세기 12장에서 약속을 받고, 21장에서 이삭을 얻기까지. 그 사이에 불신앙이 드러났고(하갈 사건), 인내가 단련되었고, 믿음이 순금처럼 제련되었다.
요셉은 13년을 기다렸다. 구덩이에 던져지고, 노예로 팔리고, 보디발의 집에서 일하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다. 그 13년은 낭비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 세월을 통해 요셉의 성품을 빚어, 애굽 전체를 다스릴 자로 만드셨다.
이스라엘은 400년을 기다렸다. 애굽의 노예살이 400년. 한 세대가 아니라 열 세대가 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시므온. 누가복음 2장의 이 늙은 사람은 평생을 기다렸다. 성령이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약속을 주셨고, 시므온은 그 약속 하나를 붙들고 매일 성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아기 예수를 안았을 때 이렇게 고백했다.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 누가복음 2:29-30
“이제는.” 이 두 글자에 평생의 기다림이 응축되어 있다. 시므온의 그 긴 날들은 빈 시간이 아니었다. 그 세월이 그를 빚어, “이제 됩니다,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기다림은 공백이 아니라 빚으시는 시간이다
기다림의 시간에 하나님은 적어도 두 가지 일을 하고 계신다.
첫째, 우리를 정련하신다
야고보는 이렇게 쓴다.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가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 야고보서 1:2-4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기다림의 목적지는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아니다. 원하는 것 없이도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기다림의 가장 깊은 신학이다.
성화는 단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평생에 걸친 점진적 갱신이다. 그리고 기다림의 계절은 이 성화가 가장 집중적으로 일어나는 공방(工房)이다. 조급함이, 통제욕이, 자기 의존이 — 기다림의 고통 속에서 추한 얼굴을 드러낸다. 그것이 드러나야 다룰 수 있다. 성령께서는 침묵 속에서도 일하신다 — 겸손을 심고, 신뢰를 빚으시고, 자기 자신에 대한 환상을 걷어내신다.
둘째, 우리의 우상을 드러내신다
기다림은 일종의 우상 탐지기다.
취업이 안 될 때 정체성이 흔들린다면, 그것은 직업을 나의 의(義)로 삼고 있었다는 증거다. 결혼이 늦어질 때 삶 전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면, 결혼을 구원처럼 기대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진정한 신앙 감정은 선물에 대한 집착에서 선물을 주시는 분 자신에 대한 갈망으로 변해야 한다.
하나님 자신보다 하나님의 선물을 더 원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기다림은 이 질문을 정면으로 던진다.
그러면 어떻게 기다릴 것인가
시편 73편의 아삽은 형통한 악인을 보며 절규했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 시편 73:14
환경은 불공평했고, 기다림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전환점이 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 시편 73:17
환경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시각이 바뀌었다. 성소에 들어갔을 때, 아삽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전체 그림을 보기 시작했다. 기다림 속에서 무너지는 이유는 대개 하나다 — 자기 자신에게 말하게 내버려 두기 때문이다. 감정이 설교하게 두지 말고, 영혼에게 설교해야 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 시편 42:11
기다림 속에서 무너지지 않는 실천적 방법이 있다.
첫째, 은혜의 수단을 붙들라. 말씀, 기도, 예배, 성례 — 이것은 기다림의 시간에 하나님이 주신 생명줄이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이것들에서 멀어지기 쉽지만, 바로 그때가 가장 필요한 때다.
둘째,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라. 비교는 하나님을 작게 만드는 죄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다른 시간표를 가지고 계신다.
셋째, 십자가를 기억하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최종적 증거는 내 기도의 응답 속도가 아니라 십자가다. 독생자를 주신 분이 나를 잊으셨을 리가 없다.
넷째, 오늘 순종할 수 있는 한 가지 작은 일에 충성하라. 결과는 주님의 손에, 오늘의 걸음은 내 발에 있다.
‘앙망하다’ — 줄을 꼬듯 기다리는 자에게
이사야 40:31은 기다림에 지친 자에게 성경이 주는 가장 아름다운 약속이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 이사야 40:31
여기서 ‘앙망하다’의 히브리어는 카와(קָוָה)다. 이 단어에는 ‘줄을 꼬다’라는 뜻이 있다. 줄을 꼬면 한 가닥일 때보다 훨씬 단단해진다. 기다림은 나약함이 아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놓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며, 그렇게 붙들 때 우리는 단단해진다.
기다리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답변이 아니라 동행이다.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기다림을 견디는 유일한 힘이다. 응답이 오지 않아도, 응답하실 분이 내 곁에 계시다는 사실 — 그것이 기다림을 견딜 수 있게 만든다.
그러니 오늘도 부르짖으라.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 시편 13:1
이 부르짖음 자체가 관계 안에 있다는 증거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부르짖지 않는다. 당신이 여전히 부르짖고 있다면, 당신은 여전히 그분의 품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 갈라디아서 6:9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기다림은 낭비가 아니다. 때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