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가 교회를 안 가려 해요.”
이 한 문장에 기독교 부모의 두려움이 압축되어 있다. 신앙을 물려주고 싶은데 아이는 거부한다. 기도도 해보고, 회유도 해보고, 때로는 강제도 해본다. 그래도 마음이 돌아오지 않으면, 부모는 자신을 심문하기 시작한다 —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이 질문이 아프지만, 더 아픈 것은 이 질문 아래 숨어 있는 전제다. 우리는 자녀의 신앙이 부모의 노력에 달려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실패하면 자책하고, 성공하면 자부한다. 그런데 성경은 부모에게 전혀 다른 자리를 부여한다.
소유주가 아니라 청지기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 시편 127:3
이 구절을 ‘축복’으로만 읽으면 절반만 읽은 것이다. ‘여호와의 기업’이라는 표현은 소유권의 선언이다 — 다만 그 소유권이 부모에게 있지 않다. 자녀는 하나님의 것이다. 부모는 이 기업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다.
청지기는 주인이 아니다. 주인의 뜻에 따라 관리할 뿐이다. 이것은 부모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부모의 권위에 정확한 근거를 부여한다. 부모가 자녀에게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자기가 낳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셨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권위의 방향도 하나님이 정하신다.
한나는 이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어머니다. 간절히 구해 얻은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의 성전에 바쳤다.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내가 기도한 바 내 소원을 허락하셨으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 사무엘상 1:27-28
소유한 적이 없기에 내어줄 수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린 것이다.
”노엽게 하지 말라”가 먼저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 에베소서 6:4
바울이 이 문장을 어떻게 구성했는지 주목하라.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명령 앞에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경고가 놓여 있다. 순서가 신학이다.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만드는 방식은 여러 가지다. 비현실적 기대, 일관성 없는 규칙, 감정적 폭발, 그리고 — 한국 교회에서 특히 흔한 — 신앙과 성적을 동일선상에 놓는 태도. “기도하면 SKY 간다”는 말은 복음이 아니다. 하나님을 입시 도우미로 전락시키는 기복신앙이다. 아이가 이런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린다면, 돌려야 할 것은 아이의 마음이 아니라 부모의 신학이다.
바울이 말하는 ‘주의 교훈과 훈계’는 학원 시간표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 전체를 관통하는 방향이다.
쉐마: 가르침은 교실이 아니라 삶에서 일어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 신명기 6:4-7
쉐마의 교육 방식을 보라. “앉았을 때, 길을 갈 때, 누워 있을 때, 일어날 때” — 이것은 특정 시간이 아니라 모든 시간이다. 신앙 교육은 일요일 아침 교회로 가는 차 안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실망 앞에서 어떻게 기도하는지, 부당한 일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 그 일상 전체가 교실이다.
자녀는 부모의 말을 듣기 전에 부모의 삶을 본다. 우리가 전수하는 것은 교리 지식이 아니라 교리를 살아가는 방식이다.
원리와 보장 사이 — 잠언을 오독하지 말라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 잠언 22:6
이 구절은 수많은 부모에게 위로가 되었지만, 동시에 수많은 부모에게 짐이 되었다. ‘가르쳤는데 떠났다면, 내가 잘못 가르친 것인가?’ 여기서 잠언 문학의 장르를 이해해야 한다. 잠언은 언약적 약속이 아니라 지혜의 원리다. “이러이러하면 대체로 이러하다”는 경향성의 진술이지, “반드시 이런 결과가 보장된다”는 계약이 아니다.
이것을 증명하는 가장 뼈아픈 사례가 제사장 엘리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 사무엘상 2:12
“내가 그의 집을 영원히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일렀노니 이는 그의 아들들이 자기를 저주받을 일을 하되 그가 금하지 아니함이니라” — 사무엘상 3:13
엘리는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 그런데 그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엘리의 실패에는 그의 책임이 있었다 — 아들들을 금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이 본문은, 부모의 신앙이 자녀에게 자동으로 전수되지 않는다는 냉정한 현실을 보여준다. 이것이 가르치는 바는 부모 책임의 소멸이 아니다. 오히려 부모의 신실한 노력과 하나님의 주권 사이의 긴장 그 자체를 직시하라는 요청이다.
부모는 증인이지, 구원자가 아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신학적 경계선을 그어야 한다. 회심은 성령의 일이다. 부모가 아무리 신실하게 가르치고, 모범적으로 살고, 눈물로 기도해도 — 자녀의 마음을 여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부모의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드는가? 전혀 아니다. 법정에서 증인은 결과를 결정하지 않지만, 증인 없이는 재판이 진행되지 않는다. 부모는 자녀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는 최초의, 가장 가까운 증인이다. 증언은 부모의 책임이고, 판결은 하나님의 주권이다.
그리고 이 증언은 부모 혼자의 몫이 아니다. 신명기의 쉐마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게 주어진 명령이듯, 자녀 양육은 언약 공동체의 책임이다. 교회학교 교사, 청년 멘토, 장로와 집사, 옆자리에 앉은 성도 — 이 모든 사람이 한 아이를 둘러싼 증인석에 앉아 있다. 부모가 쓰러져도 공동체가 일으키고, 부모가 미처 보지 못한 것을 공동체가 보완한다.
그러므로
“우리 아이가 교회를 안 가려 해요.” 이 문장 앞에서, 성경은 부모에게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한다.
첫째, 당신의 삶이 곧 설교다. 앉았을 때와 걸을 때, 누웠을 때와 일어날 때 — 하나님을 사랑하는 당신의 삶을 보여주라. 강요가 아니라 삶으로 증언하라.
둘째, 최선의 증언을 다한 후,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라. 자녀는 당신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업이다. 한나처럼 맡기라. 당신은 구원자가 아니라 증인이다. 증언을 다했다면, 나머지는 성령께 맡기라.
부모됨의 가장 큰 역설이 여기 있다. 움켜쥘수록 놓치고, 내려놓을수록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다. 우리가 아이의 손을 놓는 것이 아니다. 아이의 손을 하나님의 손에 올려놓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