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의심의 새 옷
2003년, 옥스퍼드의 철학자 닉 보스트롬은 한 편의 짧은 논문에서 충격적인 가설을 제시했다. 충분히 발달한 미래 문명이 의식 있는 존재를 모사할 만한 연산력을 가지면, 그들은 거의 확실히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돌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원본 우주”에 살고 있을 확률보다 어느 시뮬레이션 안의 거주자일 확률이 통계적으로 더 높다 — 이것이 그의 probabilistic argument다.
흥미롭지만, 골격은 새롭지 않다. 영지주의는 물질 세계를 데미우르고스의 그릇된 작품으로 의심했고, 데카르트는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에서 사악한 천재(genius malignus)가 자신을 속이고 있을 가능성을 사고 실험으로 도입했으며, 칸트는 물자체와 현상을 분리했다. 보스트롬의 가설은 이 오래된 의심을 디지털 컴퓨팅의 언어로 재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은 표현이지 문제가 아니다.
사다리의 끝
가설을 따라가 보자. 우리가 시뮬레이션이라면, 그 시뮬레이터는 누가 시뮬레이션하는가? 그 상위 시뮬레이터는 또 누가? 무한 회귀(regressus in infinitum)는 두 결말 중 하나에 도달한다. 회귀가 무한히 계속되어 어떤 실재도 근거를 가지지 못하거나, 어느 지점에서 자존하는 실재(ens a se)에 도달하거나.
후자가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와 개혁주의 정통이 말해 온 aseitas — 하나님의 자존성이다. 자기 외에 어떤 원인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다른 실재가 의존하지만 자기는 의존하지 않는 한 분. 보스트롬의 사다리는 끝까지 올라가면 결국 사다리 끝에서 하나님을 다시 발견한다. 단지 이름을 “시뮬레이터”라고 바꿔 부를 뿐이다. 유한한 시뮬레이터들의 무한한 사슬은 답이 아니다 — 그 사슬 자체의 존재 이유를 묻는 질문은 여전히 남기 때문이다.
코드는 빨강을 느끼지 못한다
가설은 또 다른 자리에서 멈춘다. 의식의 어려운 문제다. 데이비드 차머스가 1995년에 명명한 이 문제는 단순하다 — 정보 처리가 왜 주관적 경험을 동반하는가? 빛의 파장 700나노미터가 망막에 닿는 물리 과정과, 사과의 빨강이 빨강으로 느껴지는 그 1인칭 경험 사이의 간격은 어떤 신경 회로도, 어떤 코드도 메우지 못한다.
이 간격이 시뮬레이션 안에서는 더 깊어진다. 만약 우리가 시뮬레이션이라면, 우리의 의식적 경험은 어디서 오는가? 시뮬레이터의 코드 안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하는가? 그렇다면 코드 자체가 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더 큰 형이상학적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 시뮬레이터가 우리에게 의식을 부여한다고? 그러면 그 시뮬레이터는 의식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가진 인격이고, 그 인격은 어디서 왔는가? 시뮬레이션 가설은 의식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그저 위탁한다.
게다가 이 가설은 자기인지의 신뢰성을 스스로 무너뜨린다. 우리의 이성·논리·수학이 시뮬레이션의 산물이라면, 그 이성으로 도출한 “시뮬레이션 가설”이라는 결론도 시뮬레이션의 산물이다. 자기 결론의 진리값을 보장할 수 없는 가설은, 결론으로서 자격이 없다.
만지신 분
여기서 기독교의 응답은 한층 더 깊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단지 가설을 논리적으로 격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혀 다른 종류의 사건을 증언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요한복음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요한복음 1:14
말씀(Logos)이 육신(sarx)이 되었다는 선언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형이상학적 폭탄이다. 만약 물질이 환영이라면 하나님은 환영이 되신 것이고, 만약 우리가 시뮬레이션 픽셀이라면 하나님은 픽셀로 자기를 비우신 것이 된다. 이것은 기독교의 증언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사도 요한은 추상을 말하지 않는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우리의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 요한일서 1:1
만졌다 — 이 한 동사가 시뮬레이션 가설의 모든 추상을 무너뜨린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도마에게 자기 옆구리를 만지게 하셨고, 제자들 앞에서 구운 생선을 잡수셨다(눅 24:42-43). 부활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물질적 실재 안으로 들어와 그것을 새롭게 한 사건이다. 코드 안의 사건이 아니다.
진단과 처방
그렇다면 왜 이 시대 청년들은 이 가설에 매혹되는가? 진단이 필요하다. 무신론의 우주는 차갑다 — 거기에는 목적도 사랑도 도덕적 의미도 없다. 그러나 동시에 인격적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부담스럽다. 그분은 회개를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시뮬레이션 가설은 이 두 거부 사이의 타협안이다. 우주에 설계자가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설계자에게 무릎 꿇지 않아도 되는 길. 시뮬레이터는 코드를 짤 뿐,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며 당신의 죄를 묻지 않으며 당신을 위해 죽지 않는다.
이 점에서 시편 기자의 진단은 여전히 정확하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 시편 14:1
마음에 이른다 — 일차적으로 지적 입장이 아니라 도덕적 입장이라는 뜻이다. 변종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일반은총 안에서 만물은 여전히 말없이 증언한다.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 로마서 1:19-20
만물의 정교함이 “혹시 시뮬레이터의 작품일지도”로 후퇴해도, 그 시뮬레이터가 왜 그런 아름다움을 의도했는지에 대한 답은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후퇴는 결국 자존자(ens a se)에게로 향한다.
변증의 입구, 회심의 자리
여기서 변증은 자기 자리를 안다. 시뮬레이션 가설을 논리적으로 무너뜨리는 일은 길을 청소하는 일이다. 환원의 안개를 걷어내고,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답을 들을 귀를 가지게 하는 일. 그러나 청소된 길 위로 걸어와 사람을 만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회심은 논증이 아니라 성령의 일이다.
그러므로 시뮬레이션 가설에 흔들리는 청년 앞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함께 해야 한다. 첫째, 가설의 자기파괴와 의식 문제의 미해결을 정직하게 보여 주는 것. 둘째, 그 직후 만지셨던 분에게 그를 안내하는 것. 코드는 부활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분이 부활하셨고, 그 부활의 손은 지금도 의심하는 자에게 옆구리를 내미신다.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면 — 그 의식, 그 갈증, 그 의심까지도 — 코드의 산물이 아니다. 자존하시는 한 분이 당신을 부르고 계신다. 그 부름은 시뮬레이션 안에서는 결코 들려올 수 없는 부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