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질문 앞에서 교회는 오랫동안 두 가지 실패를 반복해 왔다. 하나는 정죄다. 성욕을 입 밖에 꺼내는 것 자체를 부끄러운 일로 만들어, 성도들이 혼자서 전쟁을 치르게 했다. 다른 하나는 침묵이다. 불편한 주제를 피함으로써, 결국 세상의 목소리가 그 빈자리를 채우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주제를 피하지 않는다. 아가서가 정경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나님이 성적 사랑을 어떻게 보시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가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 아가 1:2
문제는 성욕의 존재가 아니다. 문제는 성욕의 방향이다.
하나님이 설계하신 것
창세기는 인간의 성적 결합을 창조의 클라이맥스 가까이에 배치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 창세기 2:24
“한 몸”이라는 표현은 성적 욕구를 전제한다. 하나님은 이 욕구를 인간에게 심어 놓으신 뒤 “심히 좋았더라”고 선언하셨다. 몸의 욕구를 원리적으로 악하다고 보는 시각은 기독교가 아니라 영지주의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한 대로,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다 — 회복한다(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restaurat). 칼뱅도 동일한 원리를 확인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영적 측면에만 부여된 것이 아니라, 몸을 지닌 전인격적 존재에게 부여되었다. 성욕은 그 형상의 일부다.
그러므로 성욕 앞에서 그리스도인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수치가 아니라 감사다.
선물이 무기가 될 때
그러나 우리는 에덴이 아니라 에덴 밖에서 살고 있다. 타락 이후 성욕은 변질되었다. 야고보서는 그 과정을 정밀하게 해부한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 야고보서 1:14-15
성욕 자체가 죄가 아니다. 그러나 내주하는 죄(indwelling sin)는 이 선한 욕구를 통로 삼아 작동한다. 욕구가 하나님의 설계를 벗어나 자기 만족의 최종 목적이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성욕이 아니라 정욕이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경고하신 것도 바로 이 전환점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 마태복음 5:28
이 말씀은 성적 끌림 자체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욕구가 정욕으로 전화하는 마음의 운동 — 상대를 인격이 아닌 대상으로 환원하고, 언약 밖에서 소유하려는 의지적 방향 전환 — 을 가리킨다.
다윗의 비극이 이를 증명한다. 눈길이 탐심이 되고, 탐심이 간음이 되고, 간음이 살인이 되었다. 죄는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항상 더 멀리 끌고 간다.
로마서는 이 왜곡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밝힌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 로마서 1:24-25
성적 왜곡은 독립된 도덕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기를 거부한 결과다. 성욕이 하나님보다 크게 느껴지는 순간, 그것은 이미 우상이 되어 있다.
욕망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방향을 바꾸는 것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하지 말라”는 금지 목록인가?
아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분석했듯이, 의지는 항상 가장 강한 동기를 따른다. 금지만으로는 정욕을 이길 수 없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영혼의 갈증이 더 깊은 곳에서 채워져야 한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 시편 42:1
싸움의 본질은 욕망의 말살이 아니라 욕망의 방향 재정립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유혹보다 더 크고 달콤하게 느껴질 때, 의지는 방향을 바꾼다. 썩은 물을 탐내는 것은 맑은 시냇물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갈라디아서 5:16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 로마서 8:13
죄 죽임(mortification)은 성령의 사역이다. 우리의 몫은 성령께 의존하면서 구체적으로 싸우는 것이다. 욕망이 발생하는 단계에서 차단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정욕을 대체하며, 말씀과 공동체 안에 자신을 두는 것이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 앞에서 보여 준 무기는 도덕적 결의가 아니었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다만 당신은 금하였으니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 창세기 39:9
하나님 의식 — 이것이 요셉의 방패였다. 그리고 그는 도망쳤다. 도망은 비겁함이 아니라 지혜다.
이미 넘어진 자에게
이 글을 읽으며 수치심에 눌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미 넘어졌다고, 너무 멀리 와 버렸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성경은 정죄가 아니라 은혜를 먼저 내민다.
다윗은 간음과 살인 뒤에 시편 51편을 썼다. 그가 호소한 근거는 자기 회개의 진정성이 아니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 시편 51:1
다윗은 자신의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의 헤세드(인자, 언약적 사랑)를 근거로 삼았다.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이 먼저 건네신 것은 심판이 아니라 생수였다. 바울도 같은 진리를 선언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로마서 8:1
은혜가 먼저, 명령이 나중이다. 이것이 복음의 순서다.
교회가 해야 할 일
미혼 청년에게는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 소그룹이 어떤 설교보다 실제적인 방패가 된다. 기혼 성도에게는 결혼 안의 성적 친밀함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임을 가르쳐야 한다. 바울은 이것을 권고가 아니라 의무로 말했다.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 고린도전서 7:3
비자발적 독신의 자리에 놓인 이들에게도 교회는 말해야 한다. 바울은 독신을 열등한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로 보았다.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 고린도전서 7:7
그리고 넘어진 성도 앞에서 교회는 정죄의 손가락이 아니라 복음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
성욕은 죄가 아니다. 창조의 선물이다. 그러나 타락한 세상에서 이 선물은 끊임없이 왜곡의 압력을 받는다.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욕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욕망이 본래의 자리를 되찾도록 하는 것이다.
당신의 죄보다 그리스도의 피가 더 크다. 이것이 출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