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인이라면 신앙을 버려야 한다”는 속설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에는 하나의 공식이 자리 잡았다. 과학 = 이성 = 지성인, 신앙 = 감정 = 미신. 이 공식에 따르면 과학자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모순이며, 신앙을 가진 순간 그는 과학자 자격을 절반쯤 반납한 셈이 된다.
그런데 이 공식을 한 번이라도 정면으로 검증해 본 사람은 드물다. 관성처럼 받아들여진 전제 위에서 신앙인은 방어에 급급하고 불신자는 승리감에 취한다. 그러나 공식의 뿌리를 파 보면 어느 쪽도 세워지지 않는 얕은 지반이 드러난다. 과학과 신앙의 충돌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범주의 혼동이며, 이 혼동을 풀면 오히려 과학이 깊어질수록 경외도 깊어진다는 옛 전통이 다시 선명해진다.
하나님은 두 권의 책을 쓰셨다
개혁주의 전통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문제에 답을 가지고 있었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 1권 5장에서 하나님이 두 권의 책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다고 가르쳤다. 하나는 자연의 책(liber naturae)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의 책(liber Scripturae)이다. 시편 기자는 그 첫 번째 책을 이렇게 노래한다.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 시편 19:1-4
바울은 이 자연의 증언이 단순한 시적 수사가 아니라 법정적 증거라고까지 말한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 로마서 1:20
그렇다면 자연을 가장 가까이에서 읽는 사람, 곧 별의 궤도를 계산하고 세포의 구조를 들여다보는 과학자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는 창조주가 쓰신 첫 번째 책의 한 문장을 정성껏 해독하고 있는 것이다. 현미경 한 칸, 수식 한 줄은 본래 예배의 재료다.
다만 칼뱅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죄로 인해 인간의 시력이 흐려졌기 때문에, 자연의 책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성경이라는 안경(oculis Scripturae)을 써야 자연이 보여주는 영광의 의미가 비로소 초점을 맞춘다. 두 책은 경쟁하지 않는다. 한 분 저자께서 쓰셨고, 서로를 해석한다.
”과학이 신앙을 제거했다”는 주장의 범주 오류
그렇다면 왜 충돌이 있다고 느껴지는가. 그 원인은 두 책의 장르를 혼동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어떻게(how)를 묻는 방법론이다. 별이 어떻게 움직이는가, 세포가 어떻게 복제하는가. 신앙은 왜(why)와 누가(who)를 다룬다. 이 별은 왜 존재하는가, 누가 이 생명을 빚으셨는가. 망원경으로 영혼을 찾지 못했다고 영혼이 없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자로 음악을 재지 못했다고 음악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사용한 도구가 애초에 그 대상을 포착하도록 설계되지 않았을 뿐이다.
바빙크는 이것을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회복한다”(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icit atque restaurat). 창조 질서는 구원 질서의 적이 아니다. 오히려 우주가 수학적으로 기술 가능하다는 것, 그 질서를 인간의 이성이 포착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신학적 사실이다. 우연의 먼지 회오리에서는 법칙이 생겨나지 않고, 무의미에서는 의미가 읽히지 않는다. 요한은 그 이유를 정확히 가리킨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요한복음 1:1-3
창조주의 로고스(λόγος)가 우주에 새겨져 있고, 인간은 그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 그래서 우주는 읽힌다. 과학이 가능한 것 자체가 기독교 유신론의 전제 위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과학사는 누구의 편인가
대중적 통념과 달리 근대 과학의 설계도를 그린 사람들은 거의 모두 유신론자였다. 케플러는 천체의 궤도를 계산하며 “하나님을 좇아 그의 생각을 생각한다”고 고백했다. 뉴턴은 「프린키피아」와 거의 같은 분량의 신학 저작을 남겼다. 로버트 보일은 기독교 변증서를 썼고 유언으로 변증 강좌를 설립했다. 마이클 패러데이는 평생 소규모 교단의 평신도 장로로 예배를 인도했다.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캐번디시 연구소 입구에 새기게 한 구절은 시편 111편 2절이었다.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크시오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다 기리는도다
— 시편 111:2
오늘날에도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이끈 프랜시스 콜린스는 무신론자였다가 C. S. 루이스를 읽고 회심한 후 복음주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한다. 이들이 신앙을 양보하면서 과학을 한 것이 아니다. 우주가 무질서한 우연이 아니라 인격적 창조주의 이성적 작품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법칙을 탐구할 가치가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신앙은 그들의 과학을 억압하지 않았다. 오히려 과학에 동기를 주었다.
그럼에도 믿지 못하는 이유
여기까지 오면 문제가 다시 솟아난다. 이 모든 논증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끝내 하나님을 거부한다. 그 이유는 대체로 과학 자체가 아니다. 의사 출신의 한 설교자는 이 지점을 단호하게 진단한다. 사람이 신앙을 거부하는 가장 흔한 이유는 데이터 부족이 아니라 자존심이다. “나는 모든 것을 스스로 파악할 수 있어야만 믿겠다”는 선언은 엄밀히 말해 과학의 결론이 아니라 타락한 마음의 자기 주장이다. 과학은 그것을 지지해 준 적이 없다.
골로새서는 과학자와 농부와 어린아이 앞에 동일하게 서 있는 한 사람을 가리킨다.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 골로새서 1:16-17
은하의 질량이 그 안에 서 있고, 분자의 결합이 그 안에 서 있다. 과학자가 발견하는 모든 법칙은 이미 그분께 속해 있었다. 그러므로 과학자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사실 거꾸로 된 질문이다.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그가 날마다 해독하고 있는 그 책의 저자를, 과연 모른 척하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연구실의 불빛 아래에서, 실험대의 침묵 속에서, 수식이 갑자기 풀리는 그 순간의 작은 전율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두 번째 책이 첫 번째 책을 향해 건네는 초대다. 현미경을 내려놓고, 페이지를 넘겨 보라는 초대. 그곳에서 우주의 저자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