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 진리에 피곤한 세대
오늘의 청년들은 진리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 가짜 진리에 피곤한 것이다. 평생을 광고의 약속과 정치의 수사와 소비문화의 공허 속에서 살아온 이 세대에게, “내가 진리다”라고 외치는 모든 목소리는 이미 한 번씩 배신을 건넨 적이 있는 목소리처럼 들린다.
이 피로는 두 개의 이름으로 응집되어 있다. 하나는 세속주의다. 찰스 테일러가 “내재적 틀”(immanent frame)이라 부른 세계관 —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도 완결되는 자기충족적 우주를 상상하는 능력이다. 또 하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거대서사를 불신하고, 모든 진리 주장을 권력의 효과로 의심하고,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선언하는 해석학적 태도다.
교회는 이 두 얼굴 앞에서 자주 당황한다. 어떤 이는 싸움을 피해 달아나고, 어떤 이는 시대에 맞추려고 복음을 각색한다. 둘 다 잘못이다.
진단 1 — 포스트모더니즘의 자기모순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날카로운 명제들은 스스로의 칼에 베인다.
리오타르는 “모든 거대서사는 불신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 명제 자체가 모든 서사를 관통하는 거대서사다. 데리다는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썼다. 그러나 이 선언은 그 자체로 텍스트 바깥의 실재에 대한 보편 주장이다. 푸코는 “모든 진리는 권력 효과”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주장 역시 어떤 권력의 효과일 뿐이며, 우리가 그것을 믿어야 할 이유는 남지 않는다.
이것을 철학자들은 “수행적 자기부정”(performative self-contradiction)이라 부른다. 회의주의는 자신의 회의를 확신의 형태로 주장하는 순간 회의주의이기를 멈춘다. 벨직 신앙고백 14조가 말하듯, 인간 이성은 타락으로 손상되었으나 소멸되지 않았다. 바로 그 손상된 이성이 자신의 총체적 무능을 주장하려는 순간 자신이 아직 살아 있음을 증명해 버린다.
진단 2 — 교회 안에 들어온 세속주의
더 무서운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니라, 세속주의가 교회 안에 들어와 앉은 모습이다. 사회학자 크리스천 스미스는 그것을 “도덕적 치료적 이신론”(Moralistic Therapeutic Deism, MTD)이라 불렀다. 그 신조는 대략 이렇다.
“하나님은 당신이 착하게 살고 행복하기를 원하시며, 필요할 때 거기 계신다.”
이것은 복음이 아니다. 이것은 치료 문화에 신(神)이라는 이름표를 붙인 것이다. 죄를 말하지 않고, 칭의를 말하지 않고, 대속의 피를 말하지 않는 설교는 복음이 아니다. 암 환자에게 암을 말하지 않는 의사는 친절한 것이 아니라 직무를 유기하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3장까지 세 장을 써서 인간의 전적 타락을 증명했다. 처방 이전에 진단이다. 오늘의 강단이 잃어버린 것은 바로 이 진단의 용기다. 사람들이 죄인임을 전제하는 것과 보여 주는 것은 다르다.
처방 1 — 계시의 실증성
기독교 신학은 인간 이성이 끌어올린 구성물이 아니다. 헤르만 바빙크가 강조했듯이 계시는 본질상 주어진 것(das Gegebene)이다. 일반계시가 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 로마서 1:20
그리고 특별계시가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요한복음 1:14
포스트모더니즘이 정당하게 공격한 것은 계시를 인간 이성으로 환원하려 했던 근대 자유주의 신학이지, 계시 자체가 아니다. 우리는 슐라이어마허와 함께 무너질 이유가 없다. 성육신은 관념이 아니다. 역사 안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포스트모던이 모든 서사를 불신할 때에도, 이 서사는 증언자와 순교자와 빈 무덤을 남겼다.
처방 2 — 내면은 기준이 아니다
포스트모던의 가장 달콤한 거짓말은 “네 안에서 진실하게 느껴지는 것이 곧 너의 진리다”라는 속삭임이다. 오늘의 청년들은 이 말을 해방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성경은 이에 대해 단호하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 예레미야 17:9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 감정론』은 바로 이 지점에 칼을 꽂는다. 감정은 억압해야 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타락한 마음에서 솟아나는 감정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고장난 나침반을 믿고 바다로 나가는 것과 같다. 참된 감정은 성령이 새롭게 하신 “새로운 감각”(new sense)에서만 흘러나온다.
그러므로 참된 진정성은 자기 안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 발견되지 않는다. 우물 바닥으로 내려가면 수평선이 보일 것이라 믿는 일과 같다. 참된 자아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 골로새서 3:3
처방 3 — 은혜는 자연을 회복한다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회복한다”(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restaurat). 바빙크의 이 문장은 포스트모던 시대 변증의 방향을 결정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드러낸 갈망들 — 서사를 향한 굶주림, 공동체를 향한 향수, 파편화된 경험을 진지하게 받아 달라는 요청 — 은 거절해야 할 목록이 아니다. 복음은 이 갈망들을 더 풍성하게 성취한다. 기독교는 가장 큰 서사다. 창조·타락·구속·완성. 이보다 더 크고 더 아름다운 이야기는 인류가 써 내지 못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포스트모던 세대는 논증보다 아름다움에 반응한다. 계몽주의는 논증으로 싸웠다. 그러나 오늘의 마음은 삼단논법이 아니라 십자가의 역설적 아름다움 앞에서 무너진다. 하나님은 단지 선하고 능력 있으신 분이 아니라, 아름다우신 분이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최고의 아름다움이며, 참된 회심은 이 아름다움을 보는 새로운 눈이다. “논증이 머리를 설득한다면, 아름다움은 마음을 침략한다.”
결론 — 굴복하지도, 마케팅하지도 않는다
복음은 포스트모던에 굴복할 수 없다. 복음은 포스트모던을 마케팅할 수도 없다. 우리가 할 일은 넷이다.
첫째, 진단적 설교의 회복 — 죄를 증명하는 로마서 1-3장의 용기. 둘째, 계시의 실증성 — 성육신은 역사다, 빈 무덤은 사건이다. 셋째, 하나님의 아름다움 — 성례·공동체·용서·십자가의 역설이 세속의 갑옷을 뚫는다. 넷째, 성령의 체험적 증거 — 포스트모던이 그토록 찾는 “진정성”의 유일한 원천은 인간의 기법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다.
거대서사에 피곤한 세대 앞에서, 교회는 더 작은 이야기를 내놓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더 큰 이야기를 — 만물을 창조하시고 육신이 되어 오셨으며 다시 오실 분의 이야기를 — 부끄럽지 않게 선포해야 한다. 그 이야기는 마케팅이 필요 없다. 그 이야기는 아름답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