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강아지를 천국에서 다시 볼 수 있을까 2부: 슬픔 앞에서 복음이 건네는 말

내 강아지를 천국에서 다시 볼 수 있을까 2부: 슬픔 앞에서 복음이 건네는 말

#위로#슬픔#반려동물#소망#창조론

빈 방석을 바라본다. 어제까지 거기에 웅크리고 있었다. 따뜻했다. 이제 차갑다.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아마 그 빈자리를 알 것이다. 혹은 그 빈자리 앞에서 울고 있는 누군가를 알 것이다. 이 글은 그 슬픔에 대해 말하려 한다 — 감상적으로가 아니라, 복음의 언어로.

이 슬픔은 부끄러운 것인가

교회에서 반려동물의 죽음을 꺼내기가 어렵다. “사람 구원도 급한데 동물 이야기를?” 하는 시선이 느껴진다. 그래서 많은 성도가 이 슬픔을 혼자 삼킨다. 마치 믿음이 부족한 사람만 느끼는 감정인 것처럼.

그러나 성경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 창세기 1:31

하나님이 직접 “좋다”고 선언하신 피조물이 사라졌다. 그 상실이 아프다면, 그것은 당신의 영혼이 창조의 원래 질서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원래 없어야 할 침입자다. 슬픔은 죄가 아니라 사랑의 증거다.

의인은 자기의 가축의 생명을 돌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 잠언 12:10

성경은 생명을 돌보는 마음을 의로움의 표지로 기록한다. 당신이 그 작은 생명을 사랑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마음이다.

교회가 범하기 쉬운 두 가지 실수

반려동물을 잃은 성도 앞에서, 교회는 종종 두 극단 중 하나로 빠진다.

첫 번째는 냉담이다. “동물은 영혼이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너무 집착하면 우상숭배예요.” 이것은 목양이 아니라 강의다. 욥의 친구들이 정확한 신학으로 욥의 마음을 짓밟은 것과 다르지 않다.

두 번째는 무책임한 약속이다. “천국에서 반드시 다시 만날 거야.” 1부에서 살펴본 것처럼, 동물의 사후 상태에 대해 성경은 확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성경이 침묵하는 곳에서 확신을 만들어 건네는 것은 위로가 아니라 거짓 소망이다.

두 반응 모두 결국 같은 곳으로 귀결된다 — 슬퍼하는 사람이 혼자 남는다.

그러면 복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복음의 위로는 “다시 만날 수 있다”도, “잊어버려라”도 아니다. 복음은 슬퍼하는 당신 곁에 서 계신 분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 요한복음 11:35

성경에서 가장 짧은 구절이 가장 깊은 위로를 담고 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실 능력이 있으셨다. 그런데도 먼저 우셨다. 슬픔을 고치기 전에, 슬픔 안에 들어오셨다. 그분은 당신의 눈물을 교정하지 않으신다. 함께 우신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 마태복음 10:29

시장에서 가장 값싼 새, 참새. 그 하나도 아버지의 시선 밖에 있지 않다. 당신의 강아지가 마지막 숨을 거둔 그 순간에도, 아버지는 알고 계셨다. 잊히거나 무시된 죽음이 아니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 로마서 8:26

말이 되지 않는 슬픔이 있다. 기도조차 문장이 되지 않는 밤이 있다. 그때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하신다. 존 오웬은 이렇게 말했다 — 성령은 슬픔을 부정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표현할 수조차 없는 탄식을 가지고 아버지께 나아가신다. 당신이 울기만 하고 아무 말도 못 하는 그 순간이, 이미 기도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로마서 8:28

“모든 것”에는 이 슬픔도 포함된다. 이 말은 슬픔이 좋은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 깨어진 것들마저 당신의 선을 위해 엮어 가신다는 뜻이다. 어떻게 엮으시는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그분이 엮으신다는 것은 안다.

아이가 물을 때

“엄마, 뭉치는 천국에 갔어?”

이 질문 앞에서 부모는 당황한다. “당연하지”라고 말하면 편하겠지만, 성경이 확정하지 않은 것을 확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아니”라고 잘라 말하면 아이의 마음이 무너진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야. 뭉치를 그토록 예쁘게 만드시고, 너와 함께 기쁘게 지내도록 해 주신 하나님이 나쁜 일을 하실 리 없어. 참새 한 마리도 아버지의 허락 없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어. 뭉치의 마지막 순간도 하나님이 알고 계셨단다.

거짓 약속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선하심 위에 아이의 슬픔을 내려놓는 것이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신학 강의가 아니라,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확신 — 그리고 함께 울어 주는 부모다.

위로의 닻은 어디에 내리는가

여기서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소망은 강아지와의 재회가 아니다. 우리의 소망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서 있고, 만물이 그분을 통해 새로워진다.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 골로새서 1:17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 에베소서 3:20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분이 어떤 놀라운 일을 하실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 하실 분이기에, 그 새 창조의 모습은 우리의 상상을 초과할 것이다. 거기에 당신의 강아지가 있을지 없을지 —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 세계에서 당신은 더 이상 울지 않을 것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 히브리서 12:2

빈 방석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를 바라보라. 그분은 당신의 슬픔을 아신다. 그분은 당신과 함께 우신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아니, 충분하고도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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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i Deo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