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은 왜 2,000년째 안 오는가 — 지연의 신학

재림은 왜 2,000년째 안 오는가 — 지연의 신학

#종말론#재림#베드로후서#하나님의 인내

— 2,000년이라는 숫자가 불편한 당신에게


잘못된 질문을 바로잡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며요? 2,000년째 안 오고 있지 않습니까?”

이 물음 앞에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움찔한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다. 질문 자체가 품고 있는 전제 — “약속한 분이 약속을 어기고 있다”는 전제 — 가 무겁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 질문을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면으로 다룬다. 다만 성경의 답변은 우리의 예상과 다른 방향에서 온다.

질문을 바꿔야 한다. “왜 아직 안 오시는가”가 아니라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신가”를 물어야 한다.


조소하는 자들의 동기를 진단하라

사도 베드로는 이 질문이 교회 밖에서 끊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4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 베드로후서 3:3-4

주목할 것은 베드로의 진단이다. 그는 이 질문자들을 “지적으로 정직한 탐구자”로 부르지 않는다.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라 칭한다. 환자가 의사에게 “치료가 왜 이렇게 늦느냐”고 항의할 때, 그 동기가 진정한 치유에 대한 열망인지 처방을 피하고 싶은 도피인지를 살펴야 한다. 재림의 지연을 조소하는 자들의 속내는 대부분 후자다. “하나님이 오지 않으신다면, 나는 내 욕망대로 살아도 된다.” 이것이 그 조소의 실체다.

물론, 모든 질문이 이런 동기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진심으로 고통 가운데 주님의 오심을 갈망하는 성도의 물음은 전혀 다른 범주에 속한다. 베드로가 경고하는 것은 후자가 아니라 전자 — 재림의 약속을 편의적으로 무력화하려는 태도다.


하나님의 시간은 달력과 다르다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베드로후서 3:8-9

인간의 시간(크로노스)은 연속적 계산이다. 우리는 달력을 펼치고 2,000이라는 숫자를 세며 조바심을 낸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카이로스)은 양적 연속이 아니라 목적론적 충만함이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라디아서 4:4)라는 말은 시계가 특정 시각을 가리킨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경륜이 계획된 지점에 도달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2,000년”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지연의 증거가 아니다. 베드로후서 3:9의 헬라어 원어를 보면, “더딤”(βραδύτης)은 무관심이 아니라 오래 참으심(μακροθυμία)이다.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신다 — 당신의 택하신 백성이 땅 끝까지로부터 모여들기를.

이것은 하나님의 무능이 아니다. 하나님의 인내다. 하나님의 자비다.


날짜를 계산하는 자들을 경계하라

반대편에도 위험이 있다. 재림이 늦다고 조소하는 자들만큼이나 해로운 것은, 재림의 날짜를 알아냈다고 선포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 마태복음 24:36

이 말씀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신학적 금령이다. 날짜를 안다고 주장하는 자는 그리스도 자신보다 많이 안다고 선언하는 셈이다. 1992년 한국의 시한부종말론은 이 교만이 어떤 비극을 낳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수많은 성도가 직장을 버리고 가산을 탕진했으며, 약속된 날이 지나자 신앙 자체가 무너졌다. 세대주의적 예언 도표들도 같은 함정에 빠진다. 성경의 예언은 호기심을 채우는 퍼즐이 아니라 거룩한 삶으로의 초청이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 3권 25장에서 이렇게 논했다 — 재림의 날은 성부만이 아시며, 바로 이 “알 수 없음”이 교회로 하여금 매 순간 깨어 있게 하는 섭리의 도구라고. 언제 오실지 모르기에 항상 준비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모름”의 목적이다.


”이미” 시작되었고,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여기서 하나의 결정적 통찰이 필요하다. 종말은 미래에만 속한 사건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초림은 이미 종말을 개시한 사건이다. 그분은 이미 오셨고, 이미 죽으셨고, 이미 부활하셨다. 죄와 사망의 권세는 이미 꺾였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 완성을 보지 못한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 로마서 8:19-21

바빙크는 「개혁교의학」에서 이 구조를 “이미-아직(reeds-nog niet)“이라 불렀다. 재림 이전의 역사는 심판 유예의 공백이 아니라, 일반 은총과 특별 은총이 함께 작동하는 은혜의 시간이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왕으로 통치하고 계시며, 성령은 지금도 택하신 백성을 추수하고 계신다.

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 고린도전서 15:24-25

재림은 이 왕 노릇의 완성이다. 성령의 추수가 끝나고, 마지막 한 영혼까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올 때, 그때 주님은 오신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베드로는 이 모든 논의를 이론으로 끝내지 않는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삶의 방향을 묻는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그 요소들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 베드로후서 3:11-12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재림의 교리는 달력 계산이 아니라 삶의 방향 전환을 위해 주어졌다. 주님이 언제든 오실 수 있다는 긴장감, 그리고 아직 오지 않으셨다는 자비의 인식 — 이 두 축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형성한다.

이 두 축 위에서 성도는 세 가지를 실천한다.

첫째, 인내한다. 농부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듯,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은 수동적 포기가 아니라 능동적 신뢰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 야고보서 5:7

둘째, 거룩해진다. 재림의 소망은 현재의 삶을 방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화한다. 신랑을 기다리는 자는 흠 없이 서기를 힘쓴다.

셋째, 선교한다. 베드로후서 3:9의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는 선교의 신학적 근거다. 재림의 지연은 교회에 주어진 명령이다 — 가서 제자를 삼으라.


지연이 아니라 초청이다

2,000년의 시간은 하나님의 무관심이나 약속 파기의 증거가 아니다. 그것은 아직도 부르시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며, 아직도 추수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며, 아직도 열려 있는 회개의 문이다.

“왜 안 오시느냐”는 질문에 성경의 답은 이것이다 — 지금 오고 계신다. 한 영혼, 한 영혼씩.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까지 들어오는 그 날, 주님은 구름을 타고 오신다.

그 날이 올 때까지, 우리에게 남은 것은 날짜 계산이 아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이다. 도피도 아니고, 낙관도 아닌, 깨어 있는 삶 — 이것이 재림을 기다리는 자의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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