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질문, 두 개의 확신
개혁주의 신학을 처음 접한 사람이 가장 먼저 부딪히는 난관이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택자만을 위한 것이라면,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논리 퍼즐이 아니다. 이것은 설교자가 강단에 서기 전에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실존적 문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둘은 충돌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먼저 한정속죄가 정확히 무엇을 주장하는지를 오해 없이 들어야 한다.
속죄의 의도 — 하나님은 막연히 죽으시지 않았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묘사할 때 놀라울 정도로 구체적이다. 예수께서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 요한복음 10:11-12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 요한복음 10:27-28
“양을 위하여”라는 표현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이것은 속죄의 의도를 드러낸다. 그리스도는 막연히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두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주신 특정한 사람들을 실제로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바울은 이것을 더 날카롭게 표현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 로마서 8:32
여기서 “우리”는 누구인가? 문맥을 보면 분명하다 — 바로 앞 절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 “미리 정하신 자”, “부르신 자”, “의롭다 하신 자”, “영화롭게 하신 자”(롬 8:29-30)로 이어지는 구원의 황금 사슬 위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 사슬의 한 고리다. 끊어질 수 없는 고리.
만약 그리스도가 모든 인류의 죄를 동일한 방식으로 짊어지셨다면, 논리적으로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거나(만인구원론), 아니면 그리스도의 속죄가 실제로 아무도 구원하지 못하고 단지 구원의 가능성만 열어둔 것이거나. 전자는 성경이 명백히 부정하고, 후자는 십자가를 반쪽짜리 사역으로 격하시킨다.
도르트 신경(1619)은 이 균형을 정교하게 잡는다. 제2장 3항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무한한 가치와 존귀를 지닌다”고 고백하면서도, 8항에서는 “아버지의 뜻과 의도에 따라 택자들에게 효력을 미친다”고 선언한다. 속죄의 가치는 무한하되, 속죄의 의도는 특정하다.
그렇다면 왜 ‘누구든지 오라’고 외치는가
여기서 많은 사람이 멈춘다. “속죄가 택자만을 위한 것이라면, ‘누구든지’라는 초청은 거짓이 아닌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님의 뜻에 두 차원이 있다는 성경적 구분에서 찾아야 한다.
성경은 분명히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명령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 로마서 10:13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 요한계시록 22:17
이 초청은 가식이 아니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제안하신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것을 하나님의 “드러난 뜻”(revealed will)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복음 안에서 “회개하고 믿으라”는 명령을 모든 사람에게 진정으로 내리신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에게는 “작정의 뜻”(decretive will)이 있다. 누가 실제로 이 초청에 응하게 될 것인지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달려 있다. 이 두 뜻은 모순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 안에서 공존한다.
이것을 이해할 때, 설교자의 자세가 분명해진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비밀 작정의 집행자가 아니다. 그는 복음의 전령이다. 회중석에 누가 택자이고 누가 아닌지를 설교자는 알지 못하며, 알 필요도 없다. 하나님이 그것을 숨기신 데는 이유가 있다 — 바로 그 숨김이 자유로운 복음 선포의 신학적 근거가 된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 신명기 29:29
무릎과 강단 — 신학자이자 전도자로 사는 법
이 긴장을 가장 잘 체현한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한정속죄를 가장 강하게 믿은 설교자들이었다. 그들은 서재에서 속죄의 범위를 엄밀하게 논증한 바로 그 입으로, 강단에서는 “누구든지 오라”고 목 놓아 외쳤다. 이것은 자기모순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가 동시에 참이었기 때문이다.
신학적 논리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실패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준다. 그리스도가 죽으신 사람은 반드시 구원받는다. 한 명도 빠지지 않는다. 이 확신이야말로 전도의 힘이 된다. 만약 속죄가 단지 ‘가능성’이라면, 설교자의 호소는 결국 인간의 결단에 달린 불확실한 제안에 불과하다. 그러나 속죄가 실제적이고 효과적이라면,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기 백성을 불러 모으실 것이라는 확신 위에서 외치는 것이다.
동시에, 복음의 자유로운 제공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설교자에게 주어진 임무는 청중을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죄인에게 그리스도를 내어드리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전도 현장에서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정밀한 논리 체계가 아니라, 복음을 담대히 선포하는 용기다.
긴장 속에서 경배하라
한정속죄와 복음의 보편적 제공 사이의 긴장을 완벽하게 ‘해소’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긴장은 유한한 인간의 논리가 무한한 하나님의 지혜를 다 담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긴장을 ‘모순’으로 치부하는 것 역시 잘못이다.
성경은 양쪽 모두를 가르친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위해 죽으셨다. 그리고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진심으로 제공된다. 우리가 이 두 진리 사이에서 할 일은 한쪽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두 진리를 모두 붙들고 그 위에서 경배하는 것이다.
서재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이 실패하지 않음을 묵상하라. 강단에서는, 그리고 삶의 모든 자리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담대히 외치라 — “오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