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한 후 십계명을 다시 펼쳐도 되나요”
새벽기도를 끝내고 나오는 길에 한 청년이 목사를 붙들었다. “목사님, 저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었다고 들었는데, 왜 저는 다시 십계명을 책상 앞에 붙여 두고 싶은 마음이 들까요. 이게 신앙의 후퇴인가요, 진보인가요.” 정직한 질문이다. 그리고 이 한 질문 위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가장 미묘한 균형 하나가 흔들린다.
문제의 이름은 율법의 셋째 용도(tertius usus legis)다. 칼뱅이 「기독교 강요」 2권 7장 6절부터 12절에서 정리한 율법의 세 용법 가운데 마지막 — 곧 이미 거듭난 신자에게 율법이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가라는 물음이다. 첫째 용도는 시민적 용도(사회의 외부 행동을 통제), 둘째는 거울 용도(죄인에게 자기 모습을 비춰 그리스도께로 몰아감), 그리고 셋째가 안내 용도다. 셋째 용도는 자유의 길인가, 자유 위에 다시 얹는 멍에인가. 한 자리에 칼뱅과 로이드존스와 바빙크를 앉혀 두면, 같은 진리에서 갈라지는 강조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칼뱅 — “셋째가 주된 용도다”
칼뱅의 입장은 단호하다. 그는 셋째 용도를 단순히 셋 중 하나가 아니라 고유한 용도(usus proprius), 주된 용도(usus praecipuus)라고 불렀다. 율법의 본래 목적이 거기서 가장 온전히 드러난다는 뜻이다. 신자에게 율법은 두 가지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더 분명히 보여 주고, 게으른 육신을 깨워 순종으로 자극한다. 멍에가 아니라 사랑하는 분의 뜻을 적어 보낸 편지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 시편 119:97
다윗의 입술에서 떠나지 않은 것은 율법이었다. 그것이 멍에로 들리는 자는 아직 셋째 용도를 모른다고 칼뱅은 말한다. 멍에는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율법으로 의를 세우려는 옛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하셨다. 폐기된 것은 율법의 저주이지 율법의 내용이 아니다.
로이드존스 — “셋째 용도는 가장 미묘한 함정이 될 수 있다”
여기서 로이드존스가 같은 신학 안에서 다른 강조점을 던진다. 그는 칼뱅에 동의한다. 그러나 21세기 강단에 서서 회중을 진단하는 의사로서, 그는 한 가지를 더 말해야 한다고 본다. 셋째 용도는 옳지만, 그것이 동력의 자리에 잘못 놓일 때 가장 미묘한 위험을 낳는다.
그가 로마서 7장을 강해하면서 거듭 보여 준 것이 이것이다. 신자도 율법 앞에 서면 자기 안의 죄가 깨어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는 불신자의 외침이 아니라 거듭난 바울의 외침이다. 율법은 신자의 손에서도 죄를 자극할 수 있는 거룩한 능력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셋째 용도를 말하는 자는 갈라디아서의 경고를 한순간도 잊을 수 없다.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 갈라디아서 3:1-3
성령으로 시작한 신자가 셋째 용도를 동력으로 착각하는 순간, 다시 육체로 마치게 된다. 이것이 로이드존스의 진단이다. 한국 교회의 풍경이 이 진단을 그대로 비춘다. 주일 출석 점수표, 헌금 통계, QT 일수 자랑, 새벽기도 횟수가 모두 측정 가능한 영적 성과로 변질되어 있다. 이름은 거룩한 습관이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는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이 나를 받으시리라”는 행위 의지가 다시 부활한다. 셋째 용도라는 이름을 입었을 뿐, 실체는 첫 번째 갈라디아다.
바빙크 — 두 강조점은 한 진리의 두 면이다
바빙크는 두 사람을 화해시키지 않는다. 둘 다 옳다고 본다. 그가 「개혁교의학」에서 정리한 길은 내용과 기능을 구분하는 것이다. 율법의 내용은 영원한 거룩의 표현이며 하나님의 본성에서 흘러나오므로 폐기될 수 없다. 그러나 율법의 기능은 새 언약 안에서 변형된다. 같은 율법이 옛 언약 아래서는 저주의 칼이었으나, 새 언약 아래서는 길의 등불이 된다.
이 변형을 지탱하는 것이 동력의 차이다. 두려움이 동력이면 시내산이 다시 서고, 감사가 동력이면 시온산의 빛이 임한다. 같은 십계명이 한 사람에게는 법전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아버지의 편지다. 차이는 책에 있지 않고 읽는 자의 가슴에 있다.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 갈라디아서 3:24-25
여기서 초등교사(παιδαγωγός)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 역할이 변형된다. 어린아이를 학교로 끌고 가던 종이, 이제는 같은 길을 함께 걷는 친구가 된다. 길은 같다. 동행자의 자리가 달라졌을 뿐이다. 그리고 신자가 그 길을 즐거워할 수 있게 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 로마서 7:22
율법을 즐거워할 수 있는 자만이 율법을 안내자로 둘 수 있다. 율법을 여전히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같은 율법이 다시 멍에가 된다.
분기점 — 율법을 볼 때 무엇을 보는가
세 사람의 강조점은 한 분기점에서 갈라지고 다시 만난다. 신자가 율법을 펼칠 때 그 너머로 그리스도를 보는가, 아니면 율법 자체를 보는가. 그리스도를 보는 자에게 셋째 용도는 자유의 길이 된다. 율법 자체를 보며 점수를 세기 시작하는 자에게는 같은 셋째 용도가 새 멍에로 변한다. 칼뱅은 첫 번째 가능성을 변호했고, 로이드존스는 두 번째 위험을 경계했고, 바빙크는 둘 다 같은 동력의 문제임을 보여 주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86문이 이 통합을 가장 단정하게 표현한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모든 비참에서 구원받았다면, 우리는 왜 여전히 선한 일을 행해야 합니까.” 답은 이렇다. “우리의 모든 삶 전체로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개혁주의 윤리의 중심에 있는 감사의 윤리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감사해서, 점수를 따려고가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응답하려고. 같은 십계명이 같은 손에 들려도 동력이 바뀌면 다른 책이 된다.
한국 교회의 두 절벽
이 균형이 무너질 때 한국 교회는 익숙한 두 절벽 사이를 오간다. 한쪽에서는 반율법주의의 값싼 은혜가 흐른다. “은혜 시대에 율법은 끝났다”는 가벼운 설교가 신자의 거룩의 추구를 마비시킨다. 다른 쪽에서는 율법주의의 새 멍에가 자란다. 측정 가능한 종교 행위들이 신앙의 점수표가 되어 신자의 양심을 짓누른다. 두 절벽은 정반대를 향하지만 뿌리는 같다. 둘 다 셋째 용도의 정당한 자리를 잃었다. 한쪽은 율법을 폐기해 안내자를 잃었고, 다른 쪽은 율법을 동력의 자리로 끌어올려 안내자를 다시 주인으로 만들었다.
지도와 연료
가장 단순한 비유로 정리하면 이렇다. 율법은 지도이지 연료가 아니다. 연료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 고린도후서 5:14
지도가 없으면 신자는 길을 잃는다. 셋째 용도를 부정하는 반율법주의의 결과다. 연료가 잘못되면 신자는 같은 길 위에서 다시 노예의 자리로 돌아간다. 셋째 용도를 동력으로 오용하는 율법주의의 결과다. 칼뱅은 지도의 필요성을, 로이드존스는 연료의 정체성을, 바빙크는 둘이 함께 가야 하는 이유를 가르쳤다.
신자의 손에 들린 십계명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회심한 후 십계명을 다시 책상 앞에 붙여도 되는가. 답은 분명하다. 붙여도 된다. 다만 그것을 법전으로 붙이지 말고 아버지의 편지로 붙이라. 같은 종이, 같은 글자, 같은 명령이지만 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다시 시내산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시온산의 빛이다. 차이는 종이에 있지 않고 가슴에 있다.
셋째 용도는 자유인가 멍에인가. 답은 양쪽 모두다 — 어떤 동력 위에 서 있는가에 따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가슴을 강권할 때 셋째 용도는 신자의 자유의 노래가 되고, 자기 의가 다시 일어설 때 같은 셋째 용도는 자유 위에 얹는 새 멍에가 된다. 개혁주의 신학이 우리에게 주는 결론은 율법을 더 많이 가르치라는 것도, 덜 가르치라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를 동력으로 두고 율법을 길의 등불로 삼으라는 것이다. 그제야 신자의 손에 들린 십계명은 무거운 책이 아니라 사랑하는 분이 보내신 편지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