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에서 구약의 하나님을 이렇게 묘사했다. “모든 픽션을 통틀어 가장 불쾌한 캐릭터. 질투하고 자만하며, 옹졸하고 부당하며, 용서를 모르는 통제광이자 앙심 깊은 인종 청소자.” 이 문장을 처음 읽으면 두 가지 반응 중 하나가 나온다. 즉시 분노하거나, 조용히 멈칫하거나.
분노는 쉽다. 멈칫하는 쪽이 더 정직하다. 가나안 정복 본문 앞에서, 아말렉 진멸 명령 앞에서 멈칫하지 않는 신자가 있다면 — 그는 아직 이 본문을 제대로 읽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 글은 그 멈칫함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기서 출발한다.
도킨스가 들추지 않는 전제
도킨스의 고발에는 보이지 않는 전제가 있다. 창조주와 피조물이 같은 도덕 법 아래 나란히 서 있다는 전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도덕 법 아래 서지 않으신다. 거룩함이 그분의 본성이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 레위기 19:2
창조주가 피조물의 생명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있는가 — 이것이 먼저 해결되어야 할 질문이다. 없다면 구약뿐 아니라 신약도, 심판뿐 아니라 부활도 성립하지 않는다. 있다면,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셨는가”라는 질문은 남지만, “하나님이 그럴 권한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닫힌다.
도킨스는 이 첫 질문을 건너뛴다. 그는 하나님을 마치 동료 시민인 것처럼 법정에 세운다. 법정의 판사가 피고 자리에 앉은 판사를 심판할 수 있는가 — 그 범주 혼동이 그의 문장 전체에 깔려 있다.
가나안 정복: 40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
가장 뜨거운 본문부터 보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 신명기 7:1-2
이 본문이 “학살 명령”으로 요약되어 인용될 때, 사라지는 장면이 하나 있다. 아브라함 당시의 하나님 말씀이다.
“네 자손은 사 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 창세기 15:16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을 즉시 주지 않으셨다. 아모리 족속(가나안 선주민의 총칭)의 죄악이 임계점에 이르기까지, 400년을 기다리셨다. 이 기다림이 ‘학살자’의 행동인가?
400년 후, 그 땅의 상태는 어떠했는가. 하나님은 레위기 18장에서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들어갈 땅의 악을 낱낱이 고발하신다 — 근친상간, 수간, 동성 간의 제의적 간음. 그리고 한 구절이 이 목록의 무게중심을 차지한다.
“너는 결단코 네 자식을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 레위기 18:21
몰렉 제의는 수사가 아니었다. 20세기 고고학이 페니키아 카르타고의 토펫(tophet)에서 발굴한 수천 기의 유아 유골 항아리는, 이 의식이 가나안-페니키아 문화권에 걸쳐 실제로 행해졌음을 보여준다. 아이를 불에 통과시키고, 그 재를 토기에 담아 신전에 봉헌했다.
레위기 18장은 이 고발의 끝을 이렇게 맺는다.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더러워졌고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 레위기 18:24-25
주목하라. 가나안은 “이스라엘에게 밀려서” 쫓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 땅이 그 주민을 토해낸다. 이스라엘은 심판의 집행자이지 원인이 아니다. 그리고 다음 구절이 결정타다.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가 있기 전 주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 레위기 18:28
이스라엘이 같은 죄를 저지르면, 같은 땅이 그들을 같은 방식으로 토해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바벨론 포로, 기원전 586년). 이 본문은 인종 청소의 언어가 아니다. 언약적 재판의 언어다. 피고석에는 민족이 아니라 죄가 서 있다.
그 증거는 본문 안에 있다. 여리고의 기생 라합(수 2)과 기브온 주민(수 9)은 이스라엘에게 항복·합류함으로 살아남았다. 헤렘은 혈통 기반이 아니라 언약적 정렬 기반이었다. 라합은 마태복음 1장 예수의 족보에 오른다. 하나님의 재판에서 탈출구는 언제나 열려 있었다.
아말렉: 잊지 않으신 400년
또 한 본문.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 사무엘상 15:2-3
사무엘상 15장은 시간적으로 400년 후 이루어진 판결이다.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 — 출애굽기 17장의 사건이다. 그때 아말렉이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신명기는 이렇게 기록한다.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신명기 25:18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 노인, 아이, 병든 자, 지친 자. 아말렉은 광야를 도망쳐 나오는 노예 민족의 후미를 공격했다. 힘없는 자를 골라 쳤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일을 400년간 잊지 않으셨다. 사울의 손을 통해 그 판결을 집행하실 때까지.
도킨스에게 이것은 “인종 학살”이다. 성경에게 이것은 피해자의 피가 잊히지 않는 세계의 증거다. 어린이의 피, 노인의 피, 약한 자의 피는 하늘 앞에서 증발하지 않는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 그대로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 창세기 4:10
피해자의 피가 영원히 잊히는 세계 — 도킨스의 무신론이 그런 세계다. 그 세계가 더 도덕적인가? 아우슈비츠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똑같이 흙으로 돌아갈 뿐인 세계, 누구도 그 핏소리에 응답하지 않는 세계가, 과연 우리가 원하는 세계인가.
헤렘: 종말의 그림자가 역사 안으로 들어올 때
헤렘(חֵרֶם, 진멸)은 구약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범주다. 신약 교회에게는 이 명령이 주어지지 않았다. 왜인가?
헤렘은 종말론적 심판이 시공간 안에 선취(先取)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계시록 19장의 백마 탄 자의 진노가 역사의 끝에서 모든 족속 위에 임할 때, 그것은 가나안보다 훨씬 넓고 깊다. 구약의 헤렘은 그 최후 심판의 축소 모형이자 예고편이었다. 한 땅, 한 세대에 집중된 판결은, 장차 온 역사 위에 임할 판결의 그림자였다.
이 관점에서 보면 역설이 드러난다. 구약의 심판을 견디지 못하면서, 신약의 최후 심판은 괜찮다고 느끼는 감각은 일관되지 못하다. 전자가 “구체적이어서” 불편할 뿐이다. 여리고의 불길은 뉴스 헤드라인이 되지만, 추상적 지옥은 각주로 남는다. 그러나 성경의 논리에서 두 심판은 동일한 하나님의 동일한 거룩함이다.
히브리서는 이 연속성을 이렇게 봉인한다.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 히브리서 2:2-3
구약의 심판이 공정한 보응이었음을, 신약이 먼저 확증한다. 그리고 구약의 심판보다 더 무거운 심판이 신약을 거부하는 자에게 임함을 경고한다. 덜 심판하는 신약이 아니다. 더 집요하게 심판하는 신약이다.
모든 것이 한 지점에 수렴할 때
그런데 구약과 신약이 동일한 심판의 하나님을 드러낸다면, 어떻게 신약은 그토록 다르게 들리는가. 왜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 하시고, 탕자를 안으시고,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지 않으시는가.
답은 단 한 지점에 있다. 골고다.
구약의 모든 진노 — 홍수의 물, 소돔의 불, 가나안의 칼, 아말렉의 심판, 포로 시대의 유배 — 이 모든 것이 향하던 한 지점이 있다. 그 지점에서 하나님의 진노는 한 사람에게 쏟아졌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 이사야 53:5
가나안에 내린 불보다, 아말렉에 내린 칼보다, 십자가가 더 무겁다. 왜냐하면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에게 진노를 쏟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진노가 쏟아진 이유는, 자녀들이 가나안처럼 몰렉에게 드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도킨스의 비난은 여기서 무너진다. 진노하지 않는 신은 사랑하지도 않는 신이다. 자기 자녀가 학대당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지 않는 아버지는 사랑의 아버지가 아니다. 가나안의 불길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토펫에 던져진 아이들을 사랑하신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 그리고 그 사랑의 최종 형태는 가나안의 칼이 아니라, 자기 아들의 십자가였다.
남은 불편
그럼에도 가나안 본문은 여전히 우리를 흔든다. 그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우리 감각에게 언제나 낯선 것이어야 한다. 그 낯섦을 잃는 순간 — 구약이든 신약이든 — 우리는 성경을 우리 크기로 재단하기 시작한다.
구약의 하나님은 잔인하지 않으시다. 그분은 거룩하시다. 그리고 그 거룩하신 분이, 가나안에 보낼 심판을 자기 아들에게 돌려, 가나안의 후손이었을 수도 있는 라합의 후손 한 사람 — 예수 — 을 통해 이방인까지 구원하신다. 이것이 구약의 칼과 신약의 십자가를 관통하는 하나의 음성이다.
도킨스가 “가장 불쾌한 캐릭터”라 부른 그 하나님이, 사실은 아이들의 피를 잊지 않으시고, 약한 자의 핏소리에 응답하시며, 자기 아들을 대신 내어주신 하나님이시라는 것 — 이것이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