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새신자의 친구 새봄이에요.
오늘은 조금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 볼게요. 사실 저도 오랫동안 밤마다 이 질문을 붙들고 있었거든요.
월요일 오후의 그 질문
수련회 마지막 날 밤, 촛불 앞에서 눈물이 쏟아졌던 기억이 있으신가요. 옆 사람의 훌쩍임과 낮은 찬양 속에서 “아, 하나님이 여기 계시는구나” 하고 처음 느꼈던 그 밤이요.
그런데 집에 돌아온 다음 주 월요일, 지하철 안에서 어제의 감격을 떠올려 보면 마음이 참 이상해요.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 거예요. 주일 예배에서는 옆 집사님이 손 들고 우시는데 저는 왜 이렇게 메말라 있는 걸까. 밤이 되면 같은 질문이 올라와요.
“나는 그날 정말 구원받은 걸까. 그 눈물이 가짜였던 건 아닐까. 지금 이렇게 감정이 식어버린 나는, 정말 거듭난 사람이 맞긴 한 걸까.”
이 질문을 붙들고 오신 분이라면, 먼저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이 질문으로 힘들어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정말 많은 분들이 지나는 자리거든요.
저도 그 자리에 있었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스물아홉 살 봄에 똑같은 질문으로 2년 가까이 시달렸어요. 회사에서 번아웃이 왔고, 그즈음 가까운 친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그때부터 기도가 나오지 않았어요. 찬양도 들어오지 않았고, 성경을 펴도 글자만 보였어요.
교회에 앉아서 속으로 “나는 모태신앙이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이게 다 가짜였던 걸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어요. 부끄러워서요.
그 이야기의 끝은 뒤에서 나눌게요. 지금은 한 가지만요. 감정이 식은 자리에서도 구원의 확신을 찾을 길이 있어요. 저도 그 길을 걸었거든요.
감정이 식었다고 거듭남이 사라진 건 아니에요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게 하나 있는 것 같아요. “뜨거운 감정 = 구원받은 증거”라는 등식이요. 한국 교회 부흥회 문화가 우리 안에 이 등식을 깊이 박아 둔 것 같아요. 그래서 감정이 뜨거우면 “나는 구원받았다”고 안심하고, 감정이 식으면 “나는 아닌가 봐” 하고 무너져요.
그런데 감정은 파도예요. 바다의 조류는 깊은 데서 한 방향으로 흐르는데, 파도는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해요. 파도 높이를 재서 조류의 방향을 알 수는 없어요. 우리가 정말 봐야 할 건 파도의 높이가 아니라, 마음 깊은 데서 흐르는 방향이에요.
감정이 식었다고 그 방향이 사라진 건 아니에요.
요한일서가 알려주는 세 가지 작은 표
사도 요한은 이 불안을 너무 잘 알고 있었나 봐요. 그래서 요한일서를 쓰면서 곳곳에 “이로써 우리가 안다” 는 문장을 박아 뒀어요. “너의 뜨거운 감정으로 안다”고 하지 않고, 이 세 가지 작은 표를 알려줘요.
첫째, 죄가 점점 불편해져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요한일서 1:9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던 작은 거짓말, 누굴 미워했던 마음, 속으로 부러워했던 것 — 이런 게 어느 순간 마음에 걸리기 시작해요. 들킬까 봐 무서운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기가 부끄러운 느낌이요. 이 불편함이 올라온다는 것 자체가 성령께서 일하고 계신다는 작은 표예요.
둘째, 교회 사람들이 조금씩 가까워져요.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 요한일서 3:14
여기서 “완벽하게 사랑하라”는 게 아니에요. 요한이 쓴 말은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예요. 마음의 방향이 건너왔다는 뜻이에요. 교회 사람들이 완벽하게 좋아 보이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들의 기쁜 일에 같이 기뻐하고, 아픈 일에 마음이 쓰이는 작은 움직임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표예요.
셋째, 말씀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 요한일서 2:3
이것도 “완벽한 순종”이 아니에요. 말씀을 읽다가 “아, 이렇게 살고 싶다” 는 마음이 아주 작게라도 올라오는 것, 어겼을 때 괜히 마음이 걸리는 것 — 이게 표예요. 거듭나지 않은 마음은 말씀을 귀찮은 규칙으로만 느끼거든요.
싸움이 있다는 것 자체가 살아 있다는 뜻이에요
이 세 가지를 읽고 또 불안해지실 수도 있어요. “나는 죄를 자백해도 또 짓는데. 교회 사람들 사랑하려 해도 미움이 올라오는데. 말씀대로 살고 싶은데 번번이 넘어지는데.”
그런데 바로 그 괴로움이, 이미 답이에요.
죽은 사람은 싸우지 않아요. 거듭나지 않은 마음 안에는 싸움이 없어요. 그냥 한 방향으로 흘러가요. “나는 왜 이 죄를 끊지 못하는가” 라며 괴로워하는 그 신음 소리 자체가, 당신 안에 새 생명이 이미 살아 있다는 증거예요.
제 이야기의 마지막
앞에서 잠깐 꺼냈던 제 이야기로 돌아갈게요.
2년 가까이 메말라 있던 그 시기에, 어느 주일 새벽 설교 본문이 이사야 43장 1절이었어요.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 이사야 43:1
저는 그날 처음으로 울었어요. 그런데 그게 뜨거운 눈물이 아니라, 조용한 눈물이었어요. “내가 하나님을 붙잡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나를 붙잡고 계셨구나” 하는 느낌이었어요. “너는 내 것이라” — 그 한마디가 2년 동안 찾아 헤매던 모든 답이었어요.
그날 이후 감정이 다시 늘 뜨거워진 건 아니에요. 지금도 어떤 주일은 여전히 메말라 있어요. 그래도 이제는 알아요. 내 감정이 아니라 그분의 붙드심이 먼저라는 걸요.
오늘 밤, 세 가지만 조용히 물어보세요
월요일 오후, 감정이 식어서 불안하신 분이라면 이 세 가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봐 주세요.
첫째 — 나는 요즘 작은 죄에도 조금 불편해졌나요.
둘째 — 교회의 누군가가, 아주 작게라도 마음에 쓰이기 시작했나요.
셋째 — 말씀대로 살고 싶다는 마음이, 어슴푸레하게라도 올라오나요.
이 중 하나에라도 “음, 조금은 그런 것 같아요”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수련회의 뜨거운 눈물보다 바로 그 조용한 방향성이 훨씬 더 믿을 만한 증거예요.
그리고 하나 더요.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정말 거듭났을까” 하고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면, 그 흔들림 자체가 이미 답이에요. 성령께서 깨워주시지 않은 마음은 이런 질문조차 올라오지 않거든요. 돌은 자기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묻지 않아요. 당신이 지금 묻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살아 있는 심장이 뛰고 있다는 증거예요.
하나님, 저도 오늘 이 자리에 있어요. 감정이 식은 마음, 불안한 마음 그대로 가지고 왔어요. “너는 내 것이라” 하신 그 말씀을 오늘 제게도 들려주세요. 제 손을 잡아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