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나가기 시작하면 곧 마주치는 장면이 있다. 주일에는 “할렐루야”를 외치던 사람이 월요일 직장에서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한다. 봉사 자리를 두고 다투고, 뒷말이 오간다. 밖에서는 차갑던 사람이 교회 안에서만 갑자기 따뜻한 척한다.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이게 정말 교회인가? 이래도 다녀야 하나?”
솔직히 말하면, 그 실망은 정직한 감각이다. 틀린 느낌이 아니다. 교회 안에 위선과 상처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 이 실망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진단: 교회는 병원이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 마태복음 9:12-13
교회는 이미 나은 사람들의 동창회가 아니다. 아직 낫지 못한 사람들이 치료받으러 오는 병원이다. 병원에 환자가 있다고 놀랄 일이 아닌 것처럼, 교회에 부족한 사람이 있다고 놀랄 일도 아니다.
그런데 왜 30년 교인이 여전히 그 모양인가? 성경은 이것을 “성화”라고 부른다 — 믿음이 생긴 날 인격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조금씩 변해가는 과정이다. 사도 바울조차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 로마서 7:19
이것은 위선의 증거가 아니다. 성화의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의 정직한 신음이다. 오래된 교인의 부족함은 그가 가짜라는 뜻이 아니라,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성경 속 교회도 엉망이었다
혹시 초대교회는 달랐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사도 바울이 편지를 보낸 교회들의 실상을 보면 놀랄 것이다.
고린도 교회는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심지어 음행과 소송까지 있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썼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 고린도전서 3:16
갈라디아 교회는 복음을 떠나 율법주의로 돌아갔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 갈라디아서 1:6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 바울은 그 교회들을 버리지 않았다. 실망스러운 교회에 계속 편지를 쓰고, 다시 찾아가고, 끝까지 붙들었다. 왜? 그 불완전한 공동체가 여전히 그리스도의 몸이었기 때문이다.
처방: 그래도 교회를 떠나면 안 되는 이유
사람이 마음에 안 든다고 교회를 떠나는 것은, 의원이 불친절하다고 병원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병은 여전히 있는데, 치료받을 곳을 스스로 차버리는 셈이다.
성경은 이렇게 권한다.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한 일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 히브리서 10:24-25
교회는 취향에 따라 선택하는 서비스가 아니다. 설교를 듣고, 성례에 참여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일 — 이 “은혜의 방편”은 교회 밖에서 온전히 주어지지 않는다. 혼자 집에서 유튜브로 설교를 듣는 것과, 같은 죄인들 사이에 앉아 함께 은혜를 구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교회의 주인은 그 실망스러운 교인들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으니” — 에베소서 5:25
그리스도가 자기 목숨을 주고 사신 공동체다. 그분이 포기하지 않은 교회를, 우리가 사람 때문에 포기할 수 있을까?
당신의 실망에게
실망했다면, 그 마음을 부정하지 않아도 된다. 교회 안의 상처는 실재하고, 그것을 아프게 느끼는 것은 건강한 감각이다.
다만 한 가지만 기억하자. 당신도 누군가에게는 실망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누군가도 당신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을 안고 함께 치유받아가는 자리다.
병원이 마음에 안 든다고 병원을 나가지는 말자. 당신에게도 치료가 필요하고, 그곳에 의사가 계시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