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있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거나, 기독교인의 위선에 분노하거나, 성경의 하나님이 폭력적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글은 그런 사람을 위해 씁니다. 달래려는 글이 아닙니다. 당신의 분노가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정직하게 들여다보자는 글입니다.
분노는 무관심보다 가깝습니다
열이 나는 것은 몸이 싸우고 있다는 뜻입니다. 분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게 화가 난다는 것은, 적어도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분은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기대가 있다는 뜻입니다. 무관심한 사람은 화를 내지 않습니다. 화를 내는 사람이 오히려 진실에 가까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하나님께 분노한 사람이 있습니다. 욥입니다. 의로운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친구들은 “네가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은 것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욥은 그 값싼 설명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법정에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 욥기 42:7
놀랍게도, 하나님은 값싼 위로를 늘어놓은 친구들이 아니라 분노하며 따진 욥의 편을 드셨습니다. 친구들의 말이 “옳지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분노에서 출발한 읽기가 가장 정직한 읽기일 수 있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비판자를 위한 읽기 경로
1부에서는 바쁜 직장인을 위해, 2부에서는 의심 많은 탐구자를 위해 각각 다른 경로를 제안했습니다. 분노를 가진 독자에게는 또 다른 순서가 필요합니다.
1. 창세기 1-3장 — 기원에서 시작합니다. 세상은 왜 이렇게 망가졌는가. “하나님이 나쁜 것 아닌가”라는 질문 앞에, 성경은 먼저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답합니다. 타락은 모든 고통의 뿌리이며, 그 뿌리를 보지 않으면 가지만 보고 화를 내게 됩니다.
2. 출애굽기 — “하나님은 강자의 편이 아닌가”라는 비판에, 이 책은 정면으로 답합니다. 출애굽기의 하나님은 노예의 편에 서서 제국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입니다. 구약의 심판이 불편하다면, 그 심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를 먼저 읽어 보십시오 — 힘없는 자를 짓밟는 권력을 향한 것입니다.
3. 욥기 — 하나님께 따지는 것이 허락된 책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정의를 의심했고, 하나님은 그를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책을 끝까지 읽어 보십시오. 답이 당신의 기대와 전혀 다를 것입니다.
4. 마가복음 — 논쟁 이전에, 인물을 먼저 만나 보십시오. 가장 짧고 빠른 복음서에서 예수라는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 — 누구를 만났고, 누구 편에 섰고, 어떻게 죽었는지를 직접 확인하십시오. 이론을 비판하기 전에 인물을 보는 것이 순서입니다.
반박 노트를 쓰세요 — 적극적으로
2부에서 질문 노트를 권했습니다. 비판자에게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반박 노트를 권합니다. 불편한 구절, 납득이 안 되는 명령, 모순처럼 보이는 대목 — 찾아내는 대로 적으세요. 피하지 마세요.
2천 년 기독교 신학은 바로 이 불편한 구절들과의 씨름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루터도 칼뱅도 분노와 의문에서 출발했습니다. 당신이 발견한 그 모순이 실제로 모순인지, 아니면 문맥을 모르고 뜯어낸 한 줄인지 — 그 판단은 반박 노트가 쌓인 뒤에야 가능합니다. 깊이 읽는 독자의 도구가 바로 그 노트입니다.
”내가 원하는 하나님”은 성경에 없습니다
여기서 하나를 정직하게 점검해야 합니다. 당신이 거부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많은 비판자가 실제로 거부하는 것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구성한 하나님입니다. 혼내지 않고, 설명해 주고, 언제나 이해해 주는 존재. 그런 하나님은 성경에 없습니다. 악에 대한 심판이 없는 하나님을 원한다면 — 그것은 동시에, 정의도 없는 하나님을 원하는 것입니다.
욥도 하나님께 답을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은 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욥이 기대한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1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 욥기 38:1-4
하나님은 욥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욥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이것은 회피가 아닙니다. 욥의 전제 자체를 흔드는 것입니다. 심판할 수 있으려면 먼저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욥은 전체를 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설득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여기까지 읽은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정직하게 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글은 당신을 설득하려고 쓴 글이 아닙니다. 설득은 글의 일도 아니고, 사람의 일도 아닙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 고린도전서 2:14
성경은 스스로 이렇게 말합니다. 순수한 지적 분석만으로는 이 책의 핵심에 닿을 수 없다고. 이것은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비판하고, 따지고, 반박 노트를 가득 채우되 — 그 과정에서 마음이 열리는 것은 성령의 일이라는 뜻입니다. 비판자의 마음도 열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노력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세 가지 읽기, 한 가지 공통점
이 시리즈에서 세 명의 독자를 만났습니다. 바빠서 성경을 묵혀 둔 사람, 의심이 많아 질문을 멈출 수 없는 사람, 그리고 분노를 품고 성경을 펼치는 사람.
출발점은 모두 달랐습니다. 그러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을 펼쳤다는 것입니다.
닫힌 책은 아무에게도 말을 건네지 않습니다. 펼쳐야 합니다. 습관으로든, 질문으로든, 분노로든 — 펼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 히브리서 4:12
이 말씀은 당신이 성경을 판단하겠다고 펼치는 순간에도, 성경이 먼저 당신을 읽고 있다고 말합니다.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분노를 가지고 오십시오. 반박 노트를 가지고 오십시오. 그리고 펼치십시오. 성경은 펼치는 자에게 말을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