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실의 침묵 — 부부간 성적 갈등에 대해 교회가 말하지 않는 것

침실의 침묵 — 부부간 성적 갈등에 대해 교회가 말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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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가장 많이 설교하는 주제 중 하나가 결혼이다. 그런데 결혼 안에서 가장 많은 고통을 만들어내는 영역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부부의 성적 친밀함 — 더 정확히는 그것의 부재, 불일치, 거절 — 에 대해서다.

이 침묵에는 이유가 있다. 성(sexuality)을 말하는 것 자체가 불경하다는 느낌, 목회적으로 다루기 까다롭다는 판단, 그리고 무엇보다 “그건 각자 알아서 할 일”이라는 암묵적 합의. 그러나 성경은 이 주제에 대해 놀라울 만큼 솔직하다. 그리고 그 솔직함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성경이 부부의 침실에 대해 실제로 말하는 것

먼저 바로잡아야 할 것이 있다. 기독교 역사 안에는 두 가지 극단이 번갈아 교회를 지배해 왔다. 하나는 금욕주의다 — 성은 더럽고, 영적인 것과 양립할 수 없으며, 기껏해야 출산을 위한 필요악이라는 태도. 다른 하나는 세속 문화가 밀어넣는 쾌락주의다 — 성적 만족은 권리이며, 충족되지 않으면 관계를 떠날 이유가 된다는 생각. 이 둘은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뿌리가 같다. 둘 다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는다.

성경은 제3의 길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창조 질서 자체에 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 창세기 1:27-28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 창세기 2:24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 결합이 아니다. 그러나 육체적 결합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다. 아가서가 성경의 정경(canon)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신학적 판결이다 — 부부 사이의 성적 사랑은 거룩하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 아가서 2:16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 젊은 때의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의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의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 — 잠언 5:18-19

“즐거워하라”와 “항상 연모하라”는 수동적 허용이 아니라 능동적 명령이다. 성경은 부부의 성적 친밀함을 죄악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권면한다.

의무인가, 선물인가 — 거짓 이분법을 넘어서

고린도전서 7장은 이 주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다루는 본문이다.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 위에 얼마 동안 하고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 고린도전서 7:3-5

이 본문에서 바울이 사용한 단어는 “의무(ὀφειλή, 오페일레)“다. 현대인의 귀에 이 단어는 불편하게 들린다. 사랑에 의무라니, 강제 아닌가?

그러나 본문을 주의 깊게 읽으면 구조가 드러난다. 이 의무는 일방적이지 않다.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 완전히 대칭이다. “주장하지 못한다(ἐξουσιάζω)“는 표현은 더 놀랍다. 자기 몸에 대한 권리를 배우자에게 양도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강제가 아니라 상호적 자기 비움이다.

여기서 에베소서 5장의 그리스도론적 원형이 겹쳐진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 에베소서 5:25

그리스도의 사랑은 자기를 비우는 사랑이었다. 부부의 성적 친밀함도 같은 구조 위에 놓인다. 내 필요를 채우기 위해 상대방의 몸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몸을 상대방에게 선물로 내어놓는 것. 의무이되 선물이고, 선물이되 의무인 것 —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은혜 안에서만 가능한 역설이다.

갈등의 실체 — 침실의 문제는 거실의 문제다

그렇다면 왜 이 아름다운 설계가 현실에서는 그토록 자주 무너지는가?

부부간 성적 갈등은 대부분 침실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쌓인 서운함, 해결되지 않은 분노, 말하지 못한 상처, 일상의 무관심 — 이것들이 먼저 거실에서 쌓이고, 그 결과가 침실의 거리감으로 나타난다. 성적 권태는 단순한 감각의 무딤이 아니라, 관계적 무관심이 보내는 신호인 경우가 많다.

동시에 인정해야 할 것이 있다. 출산 후 호르몬 변화, 만성 피로, 수면 부족, 과거의 성적 트라우마 — 이런 의학적·심리적 요인은 실재한다. 이것을 “믿음이 부족해서”로 치환하는 것은 영적 폭력이다. 6개월 이상 성적 불일치가 지속되거나, 트라우마가 관련되어 있거나, 대화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라면 전문 상담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선택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문제의 중심에는 대개 같은 구조가 있다. 각자 자기 필요를 중심에 놓고, 상대방이 그것을 채워주기를 기대하는 구조. “왜 나를 원하지 않는가”라는 상처받은 질문과 “왜 그것만 원하는가”라는 지친 질문이 서로를 향해 날아간다. 수치심과 분노가 뒤섞이고, 그것을 말로 꺼내기가 두려워서 침묵이 찾아온다. 그리고 침묵은 두 사람을 같은 집에 사는 낯선 사람으로 만든다.

회복의 길

개혁주의 신학의 오래된 원리가 있다. Gratia naturam non tollit, sed restaurat — 은혜는 자연을 폐기하지 않고 회복한다. 이 원리는 부부의 성적 친밀함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복음은 성(性)을 억압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복음은 성을 창조의 원래 의도대로 — 상호적 자기 비움과 기쁨의 자리로 — 되돌려 놓는다.

그 회복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첫째, 침묵을 깨는 것이다. 부부간 성적 문제를 입 밖에 꺼내는 것 자체가 이미 취약함을 드러내는 행위이고, 그 취약함 안에서 신뢰가 자란다. “나는 이것이 힘들다”는 고백이 없으면 “우리는 이것을 함께 풀어가겠다”는 약속도 불가능하다.

둘째, 자기 점검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이 왜 주지 않는가를 묻기 전에, 나는 상대방에게 무엇을 주고 있는가를 먼저 묻는 것. 이것은 성화의 가장 구체적인 형태다. 이기심, 통제, 무관심 — 이 죄들은 교회 밖에서만 작동하지 않는다. 결혼의 가장 사적인 영역에서도 어김없이 작동한다.

셋째, 함께 기도하는 것이다. 베드로전서의 경고는 구체적이다.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라 하여 귀히 여기라 이는 함께 생명의 은혜를 이어받을 자로서 그리하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 베드로전서 3:7

부부 관계의 질과 기도의 질이 연결되어 있다. 함께 무릎 꿇는 부부가 함께 누울 때 더 가까운 것은, 감상적 격언이 아니라 성경적 원리다.


결혼 안의 성적 갈등 앞에서 감정에게 마지막 말을 주지 말라. 수치심에게도, 분노에게도, 체념에게도. 대신 복음이 말하게 하라 —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 자신을 비우셨듯이, 나도 배우자를 위해 나를 비울 수 있다고. 이 자기 비움은 손해가 아니라, 은혜 안에서만 열리는 가장 깊은 친밀함의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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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i Deo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