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 안에 두 가지 현실
믿음 생활을 하다 보면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분명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이 있는데, 여전히 죄와 싸운다. 어제 은혜 충만한 예배를 드렸는데 오늘 같은 죄에 넘어진다. 그래서 묻는다 — “나는 정말 구원받은 것인가?”
이 질문이 당신을 괴롭힌다면, 역설적으로 좋은 징조다. 바울 자신이 이렇게 고백했기 때문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로마서 7:24
구원받은 사도가 왜 이런 탄식을 하는가? 그 답은 칭의와 성화의 구분에 있다. 이 구분을 모르면, 우리는 두 가지 함정 중 하나에 반드시 빠진다.
칭의: 법정에서 선언된 무죄
칭의(稱義, justification)는 법정 용어다. 하나님이 재판관의 자리에서 죄인을 향해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죄인이 실제로 의로워져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그에게 전가(imputatio)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 로마서 4:3
“여겨졌다”(λογίζομαι) — 이것은 회계 용어다. 장부에 기입하듯,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계좌에 이체된다.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이 우리의 것이 된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 로마서 3:23-24
“값 없이”(δωρεάν). 칭의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 대가 없이, 조건 없이, 오직 믿음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1장 1절은 이것을 이렇게 정리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안에 주입된 의로 인하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과 만족을 그들에게 전가하심으로 의롭다 하신다.”
칭의는 단번에 일어나며, 완전하게 완성된다. 70퍼센트 칭의란 없다.
성화: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변화
그런데 법정의 선언이 전부라면, 왜 성경은 거듭 “거룩하라”고 명령하는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 히브리서 12:14
칭의가 지위의 변화라면, 성화(聖化, sanctification)는 상태의 변화다. 법정에서 무죄 선언을 받은 사람이 이제 실제로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 과정이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죄의 잔재를 죽이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가신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 로마서 8:13
이 과정은 칭의와 달리 점진적이고, 이 땅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바울조차 인정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 빌립보서 3:12
성화는 평생의 전투다.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은 이렇게 경고했다 — “죄를 죽이지 않으면 죄가 당신을 죽인다”(Be killing sin or it will be killing you). 그러나 이 전투의 무기는 우리의 의지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 빌립보서 1:6
구별하되 분리하지 말라
여기서 핵심이 등장한다. 칭의와 성화는 반드시 구별해야 하지만, 절대 분리할 수 없다.
왜 구별해야 하는가? 칭의를 성화와 섞으면 구원의 확신이 무너진다. “내가 충분히 거룩해졌는가?”가 구원의 기준이 되는 순간, 누구도 확신을 가질 수 없다. 16세기 로마 가톨릭이 빠진 함정이 바로 이것이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칭의를 “의롭게 되는 과정”으로 정의함으로써 칭의와 성화를 혼합했고, 그 결과 연옥과 면죄부라는 괴물이 태어났다.
왜 분리할 수 없는가? 그리스도는 나누어질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태양에서 빛과 열이 함께 나오듯,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칭의와 성화가 동시에 흘러나온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이 말하는 이중 은혜(duplex gratia)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 고린도전서 1:30
의로움(칭의)과 거룩함(성화)이 모두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잡는 자는 그리스도 전체를 받는다. 의롭다 선언받고서 거룩해지지 않는 것은, 태양 빛은 받으면서 열은 거부하겠다는 것과 같다 — 불가능하다.
두 가지 함정, 하나의 처방
이 구분을 놓칠 때 교회에 두 가지 병이 발생한다.
첫째, 율법주의. 설교마다 “더 기도하라, 더 헌신하라, 더 충성하라.” 성도들은 지쳐 있고, 구원의 확신이 없다. 새벽기도 출석과 헌금 액수가 은연중 구원의 척도가 된다. 이것은 성화로 칭의를 삼으려는 오류다 — 이미 받은 무죄 판결을 매일 다시 증명하려는 셈이다.
둘째, 값싼 은혜. “이미 구원받았으니 어떻게 살든 상관없다.” 결신자는 넘치되 제자는 없는 교회. 이것은 칭의로 성화를 지워버리는 오류다. 바울은 이런 논리를 단칼에 끊는다.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 로마서 6:1-2
처방은 하나다 — 로마서의 순서로 돌아가라. 로마서 3-5장이 칭의를, 6-8장이 성화를 다룬다. 먼저 법정의 선언을 확신하라.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 로마서 5:1
그 위에서 전쟁터의 삶을 살아가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 로마서 6:6
구원은 시작인가, 과정인가
결론은 이것이다 — 구원은 시작이면서 동시에 과정이다. 칭의라는 확정된 시작이 있고, 성화라는 평생의 과정이 있으며, 영화라는 완성된 종착점이 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로마서 8:30
이 황금 사슬에서 탈락하는 고리는 없다. 칭의받은 자는 반드시 성화되고, 성화된 자는 반드시 영화에 이른다. 그러니 오늘 죄와의 싸움에서 넘어졌다고 절망하지 말라 — 당신의 지위는 흔들리지 않았다. 동시에, 넘어진 자리에서 편히 누워 있지도 말라 — 성령께서 당신을 일으켜 세우실 것이다.
당신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그 싸움이 헛되지 않다는 증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