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 정당전쟁론은 성경적인가

전쟁과 평화 — 정당전쟁론은 성경적인가

#윤리#정당전쟁론#평화주의#롬13장#WCF23장

두 개의 구절, 하나의 질문

성경에는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듯한 두 구절이 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 마태복음 5:44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 로마서 13:4

한쪽은 원수 사랑을, 다른 쪽은 검의 정당성을 말한다. 이 긴장 앞에서 교회사는 크게 두 길로 갈라졌다. 한쪽은 검을 완전히 내려놓는 절대 평화주의, 다른 쪽은 검을 신중히 다루는 정당전쟁론이다. 개혁주의는 어느 쪽에 서 있는가, 그리고 한국 교회는 이 유산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

재세례파의 길 — 진지한 동기, 그러나 어긋난 논리

1527년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 이후 재세례파는 전쟁과 검을 원리적으로 거부했다. 오늘날 메노나이트·퀘이커·아미시가 그 계보에 선다. 본회퍼가 히틀러 앞에서 고뇌했던 양심, 베트남전 반대의 메노나이트 전통, 이들의 동기는 진지하며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 논리는 결정적으로 어긋나 있다. 그들은 산상수훈의 개인 윤리국가 정책으로 직역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나를 상해한 이웃을 향한 사적 복수 포기의 명령이지, 침략자 앞에 선 정부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는 뜻이 아니다. 바울이 롬 12장에서 “원수 갚는 것을 내게 맡기라”고 한 직후, 롬 13장에서 곧바로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한” 위정자를 등장시킨 이유가 여기 있다. 사적 보복과 공적 정의 집행은 다른 질서다.

죄론의 약점도 드러난다. 완전한 비폭력은 완전한 세상에서만 작동하는 이상이다. 현실의 히틀러 앞에서, 르완다의 학살자 앞에서 “폭력을 쓰지 않겠다”는 선언은 동기가 아무리 거룩해도 결과적으로 악의 공모자가 된다. 선의는 결과를 면제해주지 않는다.

개혁주의의 길 — 조건부 긍정

개혁주의는 검을 긍정한다. 그러나 조건부로 긍정한다. 칼뱅은 기독교강요 4권 20장에서 위정자의 검을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의 도구”로 규정했고, 이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이어받았다.

위정자에게 검을 주셨으니, 이는 선한 자들의 안전과 보호를 위한 것이며, 악을 행하는 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목적을 위하여 정당하고 필요한 경우에 새 언약 아래에서도 합법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3.2

이 조항은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한다. 검은 정당하다, 그러나 “정당하고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다. 23.3은 즉시 제한을 덧붙인다. 위정자는 “경건하고 의롭게” 검을 사용해야 하며, 교회의 영적 권위를 침해할 수 없다.

이 신학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자라나 칼뱅을 거쳐 정제된 정당전쟁 3조건이다.

  1. 정당한 권위 — 합법적 공적 권위의 결정이어야 한다. 사적 복수나 지도자 개인의 야욕은 불법이다.
  2. 정당한 원인 — 가해진 불의의 시정, 무고한 자의 보호여야 한다.
  3. 정당한 의도 — 목적은 평화의 회복이어야 하며, 원수에 대한 증오를 즐기는 마음으로 수행될 수 없다.

여기에 근대가 덧붙인 축이 비례성이다. 수단이 목적과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원리다. 히로시마 이후 이 축은 근본적으로 흔들렸다. 핵무기는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구별하지 않으며, 세대 전체와 태어나지 않은 생명까지 함께 태운다. “공포의 균형”은 은혜가 아니라 유예된 심판이다. 정당전쟁론을 진지하게 붙드는 사람일수록 핵무기 앞에서 더 두려워해야 한다.

제6계명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살인하지 말라”의 히브리어 ratsach는 사적·불법적 살인을 뜻하며, 창세기의 사형 명령이나 공적 정의 집행과 구별된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 창세기 9:6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함부로 죽이면 안 되고, 동일한 이유로 무고한 형상을 죽인 자에게 공적 정의가 집행된다. 이 논리는 전쟁에도 유비적으로 확장된다.

한국 교회의 자리 — 검과 강단

한국 교회는 이 문제를 책상 위 신학으로만 다룰 수 없다. 1950년의 전쟁은 실제 방어의 문제였고, 침략 저항이 이웃 보호의 사랑일 수 있음을 증언하는 역사다. 그 생존자와 후손이 앉아 있는 강단에서 무차별적 반전론을 설교하는 것은 신학적 무책임이다.

그러나 반대편의 위험도 같다. 우리 강단이 자주 빠졌던 두 양극단을 분별해야 한다.

첫째, 우파 애국주의의 유혹. 안보를 우상화하고 국가 이익이 예언자적 목소리를 대체하는 자리다. 강단이 태극기와 동의어가 될 때 교회는 직무를 잃는다. 한 세기 전 영국 교회 수많은 설교자가 양차 대전 중 “하나님은 영국 편이다”를 외친 것은 복음의 타락이었다. 그 타락은 언제든 한국어로 반복될 수 있다.

둘째, 진보적 반전 이데올로기. 구조적 악에 대한 분별 없이 평화를 낭만화하는 자리다. 정의를 결여한 평화는 선지자 예레미야가 경고한 거짓 평화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 예레미야 6:14

징병제 앞 청년의 양심에도 분별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적 대체복무는 “이 구체적 전쟁이 정당전쟁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신학적 판단 위에서만 성립한다. 이것을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집단의 교단 교리적 병역거부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거부는 성경적 평화주의가 아니라 국가 권위 자체를 사탄의 것으로 본 이원론의 산물이다. 자기보존 본능이나 일반적 반전주의를 “양심”으로 포장하는 것도 금물이다.

필요한 악, 영광스러운 선이 아니다

정당전쟁론은 전쟁을 정당화하는 이론이 아니라 전쟁을 제한하는 이론이다. 칼뱅이 검을 긍정한 것은 검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더 큰 피를 막기 위해서였다. 청교도 오웬은 크롬웰의 아일랜드 원정에 군목으로 동행한 뒤 훗날 그 수행의 잔혹을 고통스럽게 성찰했다. 법리적 조건을 충족해도 수행의 실제가 양심을 쉬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쓰여야 한다. 전쟁은 때로 필요하다, 그러나 결코 영광스럽지 않다. 필요한 악은 영광스러운 선으로 포장되어서는 안 된다. 검을 긍정하고, 검을 절제시키며, 언제나 검 너머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이중적 긴장, 이것이 한국 교회가 분단 현실 앞에서 짊어져야 할 자리다. 정의 위에 세워진 참된 샬롬, 선지자들이 기다린 그 평화만이 거짓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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