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화면에 또 폭탄이 터졌다.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며 민간인을 살해한 자들의 얼굴 위로 ‘이슬람’이라는 단어가 겹쳐진다. 전 세계 18억 무슬림이 모두 그런 사람들인 것처럼.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 그리고 이 사실을 가장 강하게 주장하는 목소리는 다름 아닌 정통 이슬람 학자들 자신이다.
이슬람이 거부하는 이슬람
2004년 암만 메시지에서 200명 이상의 이슬람 학자들이 합의한 바가 있다. 테러는 이슬람이 아니다. 쿠란 2장 256절은 “종교에는 강제가 없다”고 선언하며, 이 구절은 무함마드가 정치적 힘을 가졌던 메디나 시기에 계시되었다 — 힘이 있을 때 강제를 금한 것이다. 초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의 전쟁법은 비전투원, 여성, 아이, 노인, 수도승의 살해를 금했다. 무슬림이 동료 무슬림을 불신자(카피르)로 선언하는 타크피르는 정통 신학에서 금지된 행위다.
극단주의자들은 이 모든 전통을 위반한다. 그리고 극단주의의 첫 번째 피해자는 무슬림 자신이다 — 테러로 인한 사망자의 다수가 무슬림이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이슬람 문명이 인류에게 기여한 바 — 고대 학문의 보존, 수학과 과학의 발전, 엄격한 윤리적 금욕 — 를 부정할 사람은 없다. 하나님의 일반은총은 기독교 밖에서도 역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물어야 한다. 극단주의가 이슬람의 본질이 아니라면, 대체 그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열심은 있으나
사도 바울은 유대인의 종교적 열심에 대해 이렇게 진단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 로마서 10:2
이 진단은 극단주의의 신학적 뿌리를 드러내는 데 놀라울 만큼 정확하다. 극단주의는 열심의 문제가 아니라 그 열심이 향하는 방향의 문제다. 그리고 그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신학적 구조다.
첫째, 의지주의의 문제다. 이슬람 신학에서 선과 악은 알라의 명령에 의해 결정된다. 알라가 명했으므로 선이다. 이 구조에서는 명령의 내용이 무엇이든 — 설령 폭력이라 해도 — 신적 권위로 정당화될 여지가 생긴다. 반면 기독교는 하나님의 본성 자체가 선이라고 고백한다. 명령이 선한 것은 선하신 분이 명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을 명하신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요한일서 4:8
둘째, 구원의 불확실성이다. 이슬람의 구원론은 미잔(저울)의 비유로 요약된다. 선행과 악행을 저울에 달아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다. 원죄를 인정하지 않으니 대속이 필요 없고, 은혜가 구조적으로 부재한다. 이 불확실성 앞에서 순교는 매력적인 지름길이 된다 — 천국행이 보장되는 유일한 길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율법은 요구하되 능력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외적 강제가 내면의 변화를 대신하게 된다.
셋째, 삼위일체와 타우히드의 차이다. 이것이 가장 깊은 뿌리다. 이슬람의 타우히드(절대적 유일신론)에서 알라는 영원 전부터 홀로 존재한다. 관계 없는 신이다. 반면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사랑의 교통 안에 계신다. 관계 자체가 하나님의 본성이다. 관계 없는 신은 본질상 사랑일 수 없다. 사랑은 대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 신관의 차이가 타자에 대한 태도를 결정한다 — 절대적 의지의 관철이냐, 관계적 사랑의 초대이냐.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슬람은 성육신과 십자가를 거부한다. 원수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모델이 부재한 곳에서, 극단주의는 그 공백을 칼로 채운다.
우리의 거울
여기서 정직하게 고백해야 할 것이 있다. 십자군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신의 이름으로 칼을 든 시절이 있었다. 성지를 탈환한다는 명분 아래 벌어진 폭력은 복음에서 명백히 이탈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칼을 드는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 마태복음 26:52
신약성경에는 성전(聖戰) 명령이 없다. 십자군은 복음의 실패가 아니라 복음을 버린 결과였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기독교는 자기비판의 자원을 가진다 — 십자가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에 의해 죽으신 하나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칼이 아닌 사랑
그렇다면 복음은 극단주의의 뿌리에 어떻게 응답하는가?
구원의 불확실성에 대해, 복음은 저울을 치운다.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 로마서 3:25-26
칭의(稱義)는 저울질을 종결시킨다. 하나님의 의와 자비가 십자가에서 동시에 만족되었으므로, 인간이 칼로 하나님의 명예를 수호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스스로의 의를 스스로 세우셨다.
외적 강제에 대해, 복음은 내면의 변화를 약속한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 에스겔 36:26
율법을 칼끝에 세워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마음 안에서 역사하여 돌 같은 마음을 살과 같은 마음으로 바꾸신다.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행동의 변화는 노예의 순종에 불과하다. 복음은 노예가 아니라 자녀를 만든다.
폭력에 대해, 복음은 원수 사랑을 명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 마태복음 5:44
이 명령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이 먼저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로마서 5:8
원수였던 우리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 — 이 복음 안에서만 원수 사랑은 감상이 아닌 현실이 된다. 칼로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기는 것, 강제로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을 여는 것. 이것이 복음의 방식이다.
4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 고린도후서 10:4-5
두려움이 아닌 긍휼
무슬림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의 시선은 두려움이 아니라 긍휼이어야 한다. 신학은 분명히 비판하되, 사람은 깊이 사랑해야 한다. 바울도 한때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었다. 그를 변화시킨 것은 칼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 로마서 10:14
극단주의의 소식 앞에서 분노하거나 두려워하기는 쉽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다른 반응을 요구한다 —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을 신뢰하고, 기도하며, 다가가는 것이다. 복음은 가장 깊은 어둠도 뚫을 수 있는 빛이기 때문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 로마서 1:16
유대인에게도, 헬라인에게도 — 그리고 무슬림에게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