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불멸 vs 부활의 몸 — 한국 장례식의 그리스 잔재

영혼불멸 vs 부활의 몸 — 한국 장례식의 그리스 잔재

#종말론#부활#장례식#한국교회#플라톤주의

부고에 적힌 한 단어

한 신자가 세상을 떠났다. 교회 게시판에 부고가 붙는다.

”○○○ 권사님께서 ○월 ○일 새벽 4시 30분 소천하셨습니다.”

문상객들이 모인다. 한 분이 유족의 손을 잡고 말한다. “이제 좋은 곳 가셨으니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다른 분이 거든다. “지금쯤 천국에서 환하게 웃고 계실 거예요.” 누군가는 방명록 옆에 적힌 한 줄을 읽는다. “고이 영면하소서.”

따뜻한 위로다. 거짓도 아니다. 그러나 이 모든 단어를 한 줄로 늘어놓고 신학적 X-레이를 쪼이면 한 가지 풍경이 떠오른다 — 몸이 빠져 있다. 영혼이 어디로 갔는지에 대한 증언만 가득하고, 그 몸이 어떻게 될지에 대한 소망은 어디에도 없다.

한국 교회는 입관 예배에서 사도신경을 외운다. 그 마지막 두 줄을 다시 들어 보자.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부고에 적힌 단어와 신경의 마지막 줄 사이에 한 시대의 거리가 있다. 한쪽은 영혼이 하늘로 부르심을 받았다 말하고, 다른 한쪽은 몸이 다시 산다 말한다. 둘은 어디서 갈라졌는가.

”소천”이라는 조어가 함축하는 신학

“소천(召天)“은 성경에 없는 단어다. 한국 교회가 20세기 후반에 만들어 정착시킨 조어다. 글자 그대로의 뜻은 “하늘로 부르심을 받음”이다. 의도는 신앙적이다 — 죽음을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이려는 표현이다.

문제는 이 단어가 함축하는 종말론이다. “하늘로 부르심을 받은” 주체는 누구인가? 단어 자체는 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일상적 용법 속에서 그 주체는 거의 자동으로 영혼으로 이해된다. 몸은 장지에 묻히고, “본인”은 천국에 가셨다는 도식이다.

이 도식이 어디서 왔는지를 추적하면 사도 시대보다 4세기 앞서 한 철학자의 임종 장면에 닿는다.

기원전 4세기, 아테네의 감옥.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마지막 강의를 한다. 플라톤이 「파이돈」에 기록한 그 장면에서,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의 일생을 이렇게 정의한다 — “죽음을 연습하는 것”. 왜냐하면 죽음이란 영혼이 몸이라는 감옥에서 풀려나 본래의 자리로 귀환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에게 몸(σῶμα, 소마)은 무덤(σῆμα, 세마)이다. 두 단어의 발음 유사성은 헬라 철학의 한 신념을 한 음절로 압축한다. 영혼은 본디 신적이고 비물질적이다. 몸은 영혼을 둔하게 하는 짐이다. 죽음은 그 짐을 벗고 이데아의 세계로 돌아가는 해방이다.

이 사상에는 진짜 위로가 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본향으로의 귀환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차분히 독배를 마실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위로의 대가는 분명하다 — 몸은 영원히 버려진다.

“소천”이라는 단어가 한국 교회의 장례 위로의 중심에 자리 잡은 순간, 우리는 무의식 중에 소크라테스의 위로를 따라가고 있다. 영혼은 하늘로 갔고, 몸은 흙으로 돌아갔으며, 그것으로 끝이다.

영혼불멸과 몸의 부활은 같은 것이 아니다

한국 강단에서 이 둘을 명확히 구별해 가르치는 일이 드물다. 그러나 둘은 정반대 방향의 종말론이다.

영혼불멸(헬라 철학의 ἀθανασία τῆς ψυχῆς)은 영혼의 자연적 본성에 근거한다. 영혼은 신적이고 비물질이므로 본디 죽지 않는다. 죽음은 영혼이 몸을 벗고 자기 본성을 회복하는 사건이다. 위로의 닻은 영혼의 본질이다.

몸의 부활(히브리·기독교 신앙의 תְּחִיַּת הַמֵּתִים, ἀνάστασις νεκρῶν)은 정반대다. 인간은 영혼과 몸의 통일체로 창조되었다. 죽음은 그 통일을 깨뜨린 비정상적 사건이며, 죄가 만든 적이다. 영혼이 본디 불멸한다는 헬라적 전제는 거부된다 — 영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의식적으로 임재하는 것은 영혼의 본성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붙드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한 종착점은 영혼만의 천국이 아니라 그날 일어날 몸의 부활이다. 위로의 닻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사도 바울은 이 두 종말론의 차이를 한 문장으로 쪼개 놓았다.

“이는 우리가 옷을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 고린도후서 5:4

“벗는 것”이 헬라적 위로다. 영혼이 몸을 벗는다. “덧입는 것”이 사도의 위로다. 이 몸 위에 영광의 몸이 덧입혀진다. 한국 장례 위로 언어의 거의 전부가 “벗음”의 위로에 머물러 있다. “덧입음”의 위로는 사실상 사라졌다.

중간상태는 임시이지 종착이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 균형이 필요하다. 영혼불멸의 위로 언어를 비판한다고 해서, 신자가 죽음 직후 영혼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임재한다는 진리까지 부정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이 의식적 임재를 분명히 증언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누가복음 23:43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 빌립보서 1:23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 고린도후서 5:8

신자가 죽으면 영혼은 의식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임재한다. 영혼수면설은 거부된다. 칼뱅이 「기독교강요」 3권 25장에서 분명히 한 바, 이 의식적 임재의 위로는 정통의 핵심이다.

그러나 같은 칼뱅과 같은 바울이 동시에 강조한 것이 있다. 이 의식적 임재는 종착이 아니다. 그것은 부활의 그날을 기다리는 임시 상태다. 바로 위에서 인용한 고린도후서 5장에서 바울이 즉시 덧붙인 말이 그 증거다.

“이는 우리가 옷을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 고린도후서 5:4

영혼만의 상태는 — 비록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복된 상태일지라도 — 정상이 아니다. 인간은 영혼+몸의 통일체로 창조되었고, 그 통일이 회복되어야 비로소 구원이 완성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2장은 이 정밀한 균형을 그대로 담는다. 신자의 영혼은 죽음 직후 거룩하게 되어 즉시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전반부), 부활의 그날 몸과 다시 합하여 영원히 그분과 함께한다(후반부). 한국 강단의 문제는 32장 전반부만 반복하고 후반부를 흘려버린다는 데 있다. 그래서 위로가 절반에 머문다.

신령한 몸은 비물질이 아니다

한국 교회 장례 위로가 영혼불멸 쪽으로 기우는 데에는 한 번역 문제도 한몫한다. 고린도전서 15:44의 “신령한 몸”이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 고린도전서 15:44

“신령한 몸”이라는 표현을 한국어로 들으면 자연스럽게 “물질이 아닌 영적인 몸”으로 읽힌다. 안개 같고 구름 같은, 만질 수 없는 어떤 형체. 그러나 헬라어 πνευματικόν(프뉴마티콘)은 그런 뜻이 아니다.

같은 바울이 같은 서신 앞부분에서 같은 단어를 어떻게 쓰는지 보면 분명하다.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 고린도전서 2:14-15

여기서 “신령한 자”(πνευματικός, 프뉴마티코스)는 비물질적 사람이 아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다. 같은 어법이 부활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πνευματικόν 몸은 비물질의 몸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여 더는 부패에 종속되지 않는 몸이다.

이 결정적 차이를 부활하신 예수께서 친히 보여 주셨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 누가복음 24:39

“그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 누가복음 24:42-43

만져진다. 잡수신다. 도마는 못자국 자리에 손을 넣는다(요 20:27). 디베랴 호숫가에서 떡과 생선을 함께 드신다(요 21:13). 이 디테일들을 사복음서 기자들이 무심코 적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영혼불멸식 부활 해석을 차단하고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진짜 몸을 가지셨다. 그리고 첫 열매이신 그분의 몸이 그러하다면(고전 15:20), 그분 안에서 잠든 자들의 몸도 그러할 것이다.

“신령한 몸”의 한국어 번역이 함축하는 안개 같은 영혼이 아니다. 만져지는 몸, 알아볼 수 있는 몸, 그러나 더는 약하지도 부패하지도 않는 영광의 몸이다.

”영면”이라는 단어가 차단하는 것

장례식장 방명록 옆에 가장 자주 적히는 한 마디가 “고이 영면(永眠)하소서”다. 이 단어 또한 신학적 X-레이로 비추면 한 가지 함축이 드러난다.

“영면”은 “영원히 잠드심”이다. 잠은 깨어남을 전제해야 잠이다. 그러나 “영원히 잠든다”는 말은 그 깨어남을 차단한다. 죽음을 평화로 단장하면서, 동시에 부활을 봉인한다.

성경은 정반대로 쓴다. 신약에서 신자의 죽음을 가리키는 가장 빈번한 동사 중 하나가 κοιμάω(코이마오, “잠들다”)인데, 그 단어가 쓰일 때마다 깨어남이 전제된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 요한복음 11:11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 데살로니가전서 4:14

성경의 “잠”은 일시적이다. 한국 교회의 “영면”은 영원하다. 한 글자 차이 같으나, 함축된 종말론은 정반대 방향이다.

우주가 함께 영화된다 — 영혼불멸 종말론의 마지막 무덤

영혼불멸 종교에서 구원받는 것은 영혼이다.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우주는 그저 잠시 빌린 무대로 폐기된다. 그러나 성경의 종말론은 정반대다. 신자가 부활할 때, 그 신자가 살게 될 곳은 영혼들의 비물질 천국이 아니다. 영화된 새 하늘과 새 땅이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 로마서 8:19-2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 요한계시록 21:1

피조물 전체가 신음하며 우리의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 영화된 신자가 영화된 우주에서 영원히 산다. 이것이 성경의 종착이다.

“소천”, “좋은 곳에 가셨다”, “영면”이라는 한국 장례 위로의 언어는 이 종말론적 우주를 모두 잘라낸다. 영혼만 빠져나간 비물질 천국으로 위로를 좁힌다. 그것은 사도의 위로가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위로다.

회복의 길 — 위로의 언어를 다시 빚는다

이 진단이 단지 신학적 정확성의 문제로 끝나서는 안 된다. 한국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장례식장에서 입에서 나가는 단어 자체다. 작은 변화가 큰 신학을 낳는다.

부고와 위로 카드의 언어. “소천하셨습니다”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드셨습니다”가 정직하다. “영면하소서”보다 “부활을 기다리며 잠드셨습니다”가 성경적이다. 처음에는 어색하다. 그러나 한 세대만 의식적으로 바꿔도 다음 세대의 위로 신학이 달라진다.

장례 설교의 두 시제. 강단은 두 시제를 함께 들려주어야 한다. 지금 — 그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의식적으로 임재하신다. 그날 —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그분이 친히 강림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살전 4:16). 한국 강단은 첫 시제만 반복하다가 두 번째이자 더 큰 위로를 잃었다.

사도신경의 마지막 줄. 입관 예배든 발인 예배든, 사도신경을 함께 외울 때 마지막 두 줄을 의식적으로 강조해 고백한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이 한 문장이 회복되면, 위로의 언어는 자연히 따라온다.

그분의 부활이 우리의 위로다

장례식장에서 우리가 말해야 할 위로는 영혼의 자연적 본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분의 부활에서 나온다. 영혼이 본디 불멸이기 때문에 위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일어나셨기 때문에 위로가 있다.

그분이 만져지는 몸으로 일어나셨기에, 우리도 만져지는 몸으로 일어날 것이다. 그분이 영혼으로만 부활하지 않으셨기에, 우리도 영혼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분이 우주를 폐기하지 않고 새 창조하실 것을 약속하셨기에, 우리의 종착은 비물질 천국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소크라테스도 위로할 수 있다. 영혼이 몸을 벗고 본향으로 돌아간다는 위로다. 그러나 그 위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빈 무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영혼의 자연적 본성으로도 충분하다.

사도의 위로는 다르다. 그것은 한 사건 위에 서 있다 — 한 분이 무덤에서 일어나셨다. 그분의 그 몸이 만져졌고 음식을 잡수셨다. 그분이 첫 열매다. 그분 안에서 잠든 자들도 그러할 것이다.

부고에 적을 단어 하나가 신학을 결정한다. 위로 카드에 적을 한 줄이 종말론을 드러낸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우리의 소망을 빚는다. 그리고 그 소망은 다시 오늘 우리의 몸으로 사는 삶을 결정한다.

오늘 한국 교회 장례식장이 회복해야 할 첫 마디는 단순하다 — “그분은 잠드셨습니다. 그러나 잠은 깨어남을 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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