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단, 새 얼굴 1부: 아리우스주의 — '예수님은 피조물인가, 하나님인가'

옛 이단, 새 얼굴 1부: 아리우스주의 — '예수님은 피조물인가, 하나님인가'

#역사신학#교리사#삼위일체#기독론#옛이단새얼굴

누군가 당신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는가. “예수님은 위대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많은 성도가 당혹감을 느낀다. 성경을 잘 아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성경 구절을 들이밀며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는 예수님의 말씀까지 인용한다. 그럴싸하게 들린다. 경건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1,700년 전, 교회를 거의 무너뜨릴 뻔한 낡은 거짓말이다.

”그가 없었던 때가 있었다”

4세기 초,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는 간결하고 매력적인 논리를 내세웠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아들은 그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존재이니, 아버지보다 나중에 존재하기 시작한 피조물이다. 아리우스주의의 대표 표어는 한 문장이었다.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 헬라어 원문: ἦν ποτε ὅτε οὐκ ἦν

겸손해 보이는 이 진술에는 치명적인 독이 숨어 있다. 성자를 시간 안에 가두고, 창조주의 자리에서 끌어내려 피조물의 반열에 세우는 것이다. 이 논리의 배후에는 헬레니즘 철학이 자리한다. 신플라톤주의에서 하나님은 절대 불변하며 어떤 관계성도 없는 순수 단일체다. 이 전제 위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물질 세계와 접촉할 수 없으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중간 존재로 설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성경의 증언은 완전히 다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요한복음 1:1

요한은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선언한다. 여기서 “태초에”라는 말의 헬라어 ἐν ἀρχῇ는 시간의 시작점이 아니다. 시간 이전, 창조 이전에 말씀은 이미 계셨다. 요한은 “계시니라”(ἦν, 이미 존재하고 계셨다)와 “되니라”(ἐγένετο, 새로이 생겨났다)를 의도적으로 구별한다. 아리우스는 이 구별을 무시했다. 그러나 성경은 이 구별을 허락하지 않는다.

왜 이것이 구원의 문제인가

이 논쟁이 단지 4세기 학자들의 말싸움이라고 생각한다면, 한 가지를 생각해 보라. 피조물이 피조물을 구원할 수 있는가?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는 무한한 값을 요구한다. 유한한 피조물의 죽음은 — 설령 가장 거룩한 천사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 그 값을 치를 수 없다. 예수가 피조물이라면, 십자가는 한 고귀한 존재의 장렬한 순교일 뿐이다. 거기에 무한한 속죄의 능력은 없다. 우리의 죄는 여전히 우리 위에 남는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 요한일서 3:16

이 말씀이 힘을 갖는 이유는 목숨을 버리신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이 죽으셨을 때 — 그때에야 비로소 죄가 정복된 것이다. 더 나아가, 성자가 참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무엇인가? 피조물과의 연합이 어떻게 우리를 하나님께 데려갈 수 있겠는가?

아리우스주의는 성자만이 아니라 삼위일체 전체를 무너뜨린다. 한 위격이 피조물이 되면 성령도 피조물로 귀결된다. 피조물이 죽은 영혼을 살릴 수 없다. 삼위일체 중 한 위격만 흔들려도 구원 경륜 전체가 붕괴한다.

한 사람이 온 세상을 맞서다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교권 정치가 아니었다. 성도들의 구원 자체가 걸린 싸움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이 진리를 지키기 위해 홀로 섰다. 황제가 등을 돌리고, 주교들이 타협하고, 온 세상이 아리우스주의로 기울었을 때, 그는 “아타나시우스 대 세계”(Athanasius contra mundum) — 다섯 차례의 유배를 감수하면서 한 단어를 지켰다. ὁμοούσιος — “동일 본질.” 성자는 성부와 본질이 같으신 참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다.

이 단어가 성경에 직접 나오지 않는다는 반론이 있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신학 용어가 성경에 문자 그대로 등장해야만 정당한 것은 아니다. “동일 본질”은 성경이 이미 증언하는 진리를 정확하게 요약한 것이다. 이것은 철학을 성경에 강제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증언을 오류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 진리를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의 통일성 안에 삼위가 계시니, 한 본체, 한 권능, 한 영원성을 가지신 성부, 성자, 성령이시다.” (2장 3절) 또한 “삼위일체의 제2위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으로서 성부와 한 본체이시며 동등하신 분이시다.” (8장 2절)

낡은 거짓말의 새 얼굴

아리우스는 죽었지만, 그의 논리는 살아 있다.

오늘날 예수를 피조물로 가르치는 서방 기원의 단체는 수백만 명에게 같은 논리를 전파한다. 이들이 사용하는 성경 번역에서 요한복음 1:1의 “말씀은 하나님이셨다”는 “말씀은 신적인 존재였다”로 바뀌어 있다. 이것은 번역이 아니라 교리의 강제 편입이다. 자유주의 신학에서 예수를 “탁월한 도덕 교사”로 재규정하는 흐름도 본질적으로 같은 오류다. 이름만 다를 뿐, 아리우스의 정신이 살아 숨 쉬고 있다.

한국 교회의 현실도 무관하지 않다. 많은 교회가 성령님의 역사를 뜨겁게 강조하면서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어떻게 한 분 하나님이신가”를 체계적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감동만 가르치고 신앙고백서를 손에 쥐어 주지 않은 결과, 그 공백 속으로 아리우스주의의 후예들이 파고든다.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단체의 방문자와 대화를 나눈 뒤 돌아와서 “그 사람들 말이 꽤 성경적이던데요”라고 말하는 성도 — 이것이 교리 교육의 공백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이것은 추상적 논쟁이 아니다

삼위일체는 신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것은 당신이 무릎 꿇고 기도할 때,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다. 예수가 피조물이라면, 우리의 예배는 우상숭배가 된다. 예수가 하나님이시라면, 우리의 예배는 마땅한 경배가 된다. 감정의 강도가 아니라 감정의 대상이 예배를 참되게 만든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 요한일서 4:8

사랑은 본질상 관계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영원한 교통은 하나님이 냉담한 절대자가 아니심을 선언한다. 아리우스의 신은 창조 이전에 혼자였고, 본질적으로 고독한 존재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사랑 안에 계셨다. 이 사랑이 넘쳐 세상을 창조하셨고, 이 사랑이 십자가에서 스스로를 내어주셨다.

아타나시우스가 온 세상을 맞서며 지킨 것은 한 단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이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아리우스가 범한 실수의 정반대편에, 똑같이 치명적인 또 하나의 오류가 도사리고 있다. 삼위일체를 지키겠다는 열심이 오히려 삼위일체를 파괴하는 역설 — 양태론이라 불리는 그 오류를, 다음 편에서 마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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