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교리는 정의로운가

지옥 교리는 정의로운가

#변증#지옥#하나님의 공의#신정론

— 저울의 한쪽을 잘못 달았다


정직한 질문

유한한 생애 동안 지은 죄에 대해 영원한 형벌을 내린다 — 이것이 정의로운가?

이 질문 앞에서 기독교인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한다. 문제의 논리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70년 남짓한 인생에서 지은 잘못에 대해 끝없는 고통을 부과한다면, 이는 어떤 인간의 법정에서도 비례의 원칙에 어긋난다. 10년 형에 해당하는 범죄에 종신형을 선고하면 우리는 그것을 부정의라고 부른다. 하물며 유한한 죄에 무한한 형벌이라니.

이 물음은 회피할 수 없으며, 회피해서도 안 된다. 다만 한 가지만 확인하고 출발하자. 비례의 원칙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형벌은 죄의 무게에 비례해야 한다 — 성경도 이 원칙을 부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저울의 한쪽에 올려놓은 것이 잘못되었다.


저울의 한쪽: 시간인가, 대상인가

우리는 죄의 무게를 지속 시간으로 재고 있다. “70년 동안 지은 죄”라는 표현 자체가 이미 시간을 척도로 삼고 있다. 그러나 형벌의 비례는 시간이 아니라 범죄 대상의 존엄에 달려 있다.

같은 주먹질이라도, 길거리에서 낯선 사람을 때린 것과 법정에서 판사를 때린 것은 다르게 취급된다. 행위의 물리적 동작은 동일하지만, 대상의 권위와 존엄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법체계에서도 이미 작동하고 있는 원칙이다. 중세 신학자 안셀무스는 이 논리를 신학적으로 정식화했다: 범죄의 심각성은 범한 자의 지위가 아니라 범해진 대상의 지위에 비례한다.

그렇다면 무한하신 하나님을 향해 범한 죄의 무게는 어떠한가. 그분의 존엄이 무한하다면, 그 존엄을 거스른 반역의 무게도 유한할 수 없다. 비례의 원칙이 무너진 것이 아니다. 비례의 원칙이 정확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무한한 존엄에 대한 반역에는 무한한 심각성이 따르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 반역의 본질을 두 가지 악으로 요약한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 예레미야 2:13

죄는 단순한 규칙 위반이 아니다. 모든 선과 생명의 근원이신 분을 버리고, 스스로 대체물을 만들려 한 반역이다.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대상의 무한성이 죄의 무게를 결정한다.


지옥을 가장 많이 말씀하신 분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성경에서 지옥과 영원한 심판을 가장 빈번하게, 가장 구체적으로 경고하신 분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 마가복음 9:43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 마태복음 10:28

지옥 교리가 반지성적이거나 원시적인 공포 정치의 산물이라면, 인류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교사가 그것을 자신의 가르침 중심에 놓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예수님은 지옥을 위협의 수단이 아니라 사랑의 경보로 말씀하셨다. 건물에 불이 났을 때 “불이야!”라고 외치는 사람은 공포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구하려는 것이다.


끝나지 않는 반역

여기서 한 가지 더 짚어야 할 것이 있다. “유한한 시간 동안 지은 죄”라는 전제 자체가 재검토를 요구한다. 지옥에서의 형벌이 영원한 이유는 단순히 과거의 죄에 대한 벌이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이 아니다. 지옥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을 향한 반역을 영원히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같은 헬라어 형용사 aionios(영원한)를 두 번 사용하신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 마태복음 25:46

영생이 영원하다면 영벌도 영원하다. 같은 단어를 한쪽에서만 유한하게 읽을 근거는 없다. 지옥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다. 회개하지 않는 존재는 매 순간 새로운 반역을 쌓는다. 형벌의 영원성은 반역의 영원성에 비례한다.

데살로니가후서는 이 상태를 이렇게 묘사한다: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 데살로니가후서 1:9

주목할 표현은 “주의 얼굴을 떠나”이다. 지옥은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끝까지 거부한 자의 선택이 맞닥뜨리는 귀결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판결과 인간의 책임은 서로를 지운다.


저울의 다른 쪽: 십자가

그러나 여기서 끝난다면 이 글은 공의의 한쪽 면만 말한 것이다. 같은 하나님이 영원한 형벌을 선언하시면서, 동시에 그 형벌을 자기 아들에게 대신 지우셨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교리의 가장 결정적인 증거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요한복음 3:16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의 땀이 핏방울처럼 떨어졌다.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다. 만약 지옥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이 고통은 무엇에 대한 대가였는가? 지옥이 없으면 십자가도 없다. 속죄의 무게는 형벌의 실재를 전제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 고린도후서 5:21

바로 여기서 공의와 사랑이 만난다. 하나님은 죄를 묵인하시는 분이 아니다. 동시에, 그 심판을 직접 감당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또한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이다. 공의를 포기하지 않으시면서 은혜를 베푸신다.


경보는 울리고 있다

지옥 교리는 정의로운가? 비례의 원칙은 살아 있다. 다만 저울의 한쪽에 올려야 할 것은 “70년의 시간”이 아니라 “무한하신 하나님의 존엄”이다. 그리고 그 무한한 심판을 직접 감당하신 분이 지금 이 순간에도 한 가지를 말씀하고 계신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 사도행전 16:31

지옥은 공포의 교리가 아니다. 건물에 불이 났다고 알려주는 경보다. 그리고 그 경보를 울리시는 분은, 동시에 출구를 자기 몸으로 열어놓으신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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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i Deo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