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느껴지지 않는 시간 — 참된 신자의 영적 건조기를 통과하는 법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는 시간 — 참된 신자의 영적 건조기를 통과하는 법

#신앙생활#영적성장#성화#위로

감각이 사라진 자리

일요일 아침, 예배당에 앉아 있다. 찬양이 흐르고, 설교가 이어진다. 그런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한때는 기도할 때 뜨거운 무언가가 있었다. 말씀을 읽으면 눈시울이 뜨거워지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이 계신 것 같지 않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지금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다. 34세 직장인 민준 씨처럼, 십 년 넘게 교회에 다녔고 나름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왔는데, 어느 날부터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진 것 같은 무감각이 찾아온 사람.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교회를 떠난 것도 아닌데, 마치 기도가 천장에 부딪혀 떨어지는 것 같은 시간.

이것을 역사적으로 “영혼의 어두운 밤(Dark Night of the Soul)“이라 불렀다. 그리고 이 경험은 당신만의 것이 아니다.

먼저 알아야 할 것 — 이것은 정상이다

영적 건조기를 만난 성도가 가장 먼저 듣는 말은 대개 이런 것이다. “기도를 더 해야지”, “혹시 숨긴 죄가 있는 거 아니야?”, “더 간절히 매달려 봐.” 잘 의도된 말이지만, 이것은 욥의 친구들이 범한 것과 같은 실수다 — 고통의 원인을 성급하게 진단하는 것.

물론 죄가 원인인 경우도 있다. 다윗은 범죄 후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진 경험을 이렇게 기록했다.

3 내가 토설하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 시편 32:3-4

이런 경우라면 처방은 분명하다 — 회개다. 그러나 영적 건조기의 원인은 이것 하나만이 아니다. 적어도 세 가지를 구별해야 한다.

첫째, 죄로 인한 교통 단절. 회개하지 않은 죄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로막는 경우다. 처방은 회개다.

둘째, 신체적·정신적 피로. 엘리야를 보라.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대결한 직후, 이세벨의 협박 한마디에 광야로 도망쳐 죽기를 구했다(왕상 19:4).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처방은 놀랍게도 영적인 것이 아니었다 — 잠을 재우시고, 먹을 것을 주셨다. 과로와 번아웃을 영적 실패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셋째, 하나님의 섭리적 훈련. 죄도 없고 피로도 아닌데,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임재의 감각을 거두시는 경우다. 이것이 가장 혼란스럽고, 이 글이 집중하려는 지점이다.

하나님이 숨으신다는 것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 이사야 45:15

여기서 결정적인 신학적 구별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신자를 완전히 버리시는 것(유기)과, 하나님이 임재의 감각을 숨기시는 것은 전혀 다른 사건이다.

참된 신자의 완전한 유기는 불가능하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 요한복음 10:28

도르트 신경(제5장 3조)은 참된 신자들이 은혜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 그들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운 선택과 불변하는 작정에 근거함을 고백한다. 당신의 감각이 당신을 유기하더라도, 하나님은 당신을 유기하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숨으시는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신가?

감각이 아니라 약속 위에 서는 훈련

영적 건조기에는 놀라운 역설이 숨어 있다. 이 시간은 신앙이 감각(sensus)에서 약속(promissio)으로, 경험에서 계시로, 내면의 느낌에서 그리스도의 외부적 의(justitia aliena)로 무게 중심을 옮기는 훈련의 시간이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III.2.4)에서 믿음을 이렇게 정의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향한 확고하고 확실한 지식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의 진리에 기초하며, 성령에 의해 봉인된 것.” 이 정의에 ‘느낌’이라는 단어는 없다.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86문이 정의하는 구원적 믿음에도 ‘느낌’은 등장하지 않는다. 믿음은 지식(notitia)과 동의(assensus)와 신뢰(fiducia)로 구성되며, 그 근거는 감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다.

시편 22편을 보라. 다윗은 이렇게 시작한다.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시고 돕지 아니하시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 시편 22:1-2

감각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런데 주목하라 — 다윗은 “내 하나님이여”라고 부른다. 느낌은 없지만, 언약을 붙잡고 있다. 이것이 감각을 넘어선 믿음의 모습이다. 그리고 바로 이 시편을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인용하셨다(마 27:46).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는 바로 그 자리에, 성자 하나님이 친히 들어오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느낌을 사랑하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여기서 불편하지만 반드시 마주해야 할 질문이 있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인가, 아니면 하나님에 대한 느낌인가?

시편 42편의 기자는 이렇게 노래한다.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꼬

3 사람들이 종일 내게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 시편 42:1-3

참된 갈급함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은밀한 위험이 도사린다 — 하나님 대신 하나님에 대한 느낌을 구하는 것이다. 뜨거운 기도 시간, 전율하는 찬양, 눈물이 쏟아지는 말씀 묵상 — 이런 감각적 경험이 신앙의 본질이 되어버리면, 감각이 사라졌을 때 신앙도 사라진 것처럼 느끼게 된다. 이것은 은밀한 우상숭배다.

한국 교회에 뿌리 깊은 “느낌 = 하나님의 임재”라는 등식이 바로 이 문제의 진원지다. 은사주의적 경험을 강조하는 문화, “은혜받았다”를 감정적 고양과 동일시하는 습관 — 이것이 성도들을 건조기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만든다. 개혁주의 신앙은 믿음의 근거를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신실하심에 둔다.

참된 신앙은 감정(affections)을 동반하지만, 감각의 강도가 곧 신앙의 진실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감각은 은혜의 선물이지, 성숙의 지표가 아니다. 부흥의 뜨거움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느낌은 손님처럼 왔다 가지만, 하나님 자신은 언약을 따라 거하신다.

성화의 겨울 — 실패가 아니라 과정이다

자연의 성장에 겨울이 있듯, 영적 성장에도 건조기가 있다. 이것은 성화의 실패가 아니라 성화의 과정 안에 포함된 계절이다. 바빙크가 말한 대로 성화는 기계적이고 균일한 진행이 아니라 유기적 전개(organische ontwikkeling)다.

가뭄 때 식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뿌리가 더 깊이 내려간다. 수면 위의 잎사귀는 시들어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존을 위한 가장 중요한 성장이 일어나고 있다.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회복한다(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restaurat)” — 건조기도 마찬가지다.

이 계절에는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 하나는 칭의와 성화의 긴장이 선명해지는 것이다. 느낌이 사라졌을 때, 나는 무엇에 의지하는가? 내 경험인가, 나 밖에 계신 그리스도의 의(extra nos)인가? 건조기는 이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다른 하나는 성화의 심화다. 하나님은 때로 위로의 빛을 거두시지만, 은혜의 빛은 결코 거두지 않으신다. 위로가 사라진 자리에서 은혜를 발견하는 것 — 이것이 더 깊은 성숙이다.

죽은 나무는 가뭄에 반응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나무만이 목마르다. 당신의 건조함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당신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건조기를 통과하는 네 가지 닻

그렇다면 실제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영적 건조기를 즉시 끝내는 비법은 없다. 그러나 이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붙잡을 수 있는 닻이 있다.

1. 약속의 말씀에 닻을 내리라

감각이 사라졌을 때 남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 히브리서 13: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 이사야 49:15

확신(assurance)은 감각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약속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다. 느낌이 올라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약속이 내려오는 곳에 서라.

2. 은혜의 수단을 놓지 말라

비가 올 것이라 믿지 않더라도 우물을 메우지 않는 것처럼, 감각이 없더라도 은혜의 수단(media gratiae)을 버리지 말라.

말씀을 읽으라. 아무 감동이 없더라도 읽으라. 씨앗은 땅 속에서 보이지 않게 자란다.

10 이는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뿌리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 이사야 55:10-11

기도하라. 기도가 나오지 않으면, 시편이 써놓은 기도를 읽으라. 시편 42:5의 기자는 자신의 감정에 귀 기울이는 대신, 자신의 영혼에게 말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 시편 42:5

여기서 핵심적인 전환이 일어난다. 건조기에 감정은 끊임없이 속삭인다 — “하나님은 없다”, “너는 버림받았다.” 이 속삭임에 수동적으로 귀 기울이지 말라. 대신, 자신의 영혼에게 진리를 선포하라.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고, 자신에게 말하라.

공적 예배에 나가라. 개인 묵상이 메말랐을 때, 공적 예배가 불을 다시 붙인다. 설교를 통해 선포되는 말씀, 성찬을 통해 보여지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 — 이것은 시각적이고 물리적인 말씀이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지금도 당신의 양식”이라는 선언이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 히브리서 10:24-25

3. 그리스도의 객관적 사실을 묵상하라

느낌이 없을 때, 시선을 안에서 밖으로 돌리라. 나의 내면 상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이미 이루신 객관적 사실을 바라보라.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 히브리서 12:2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 이것은 내 감각과 무관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 — 이것도 내 느낌과 무관한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지금 하나님 우편에서 나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다 — 이것도 사실이다. 믿음은 이 사실 위에 선다.

4. 고통이 당신을 정죄하도록 허락하지 말라

건조기의 가장 위험한 유혹은 이것이다 — “이런 상태인 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닌 게 분명해.” 바울의 선언을 기억하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 로마서 8:38-39

“어둠”도 피조물이다. 당신의 무감각도 피조물이다. 그리고 어떤 피조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당신을 끊을 수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감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 위에 당신을 붙드신다.

봄은 반드시 온다

시편 22편은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로 시작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가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 시편 22:24

시편 88편은 성경에서 가장 어두운 시편이다. 마지막 절이 “어둠”으로 끝난다. 해결도 없고, 반전도 없다. 하나님은 이 시편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게 하셨다. 어둠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 것이다. 당신만 이런 것이 아니다.

욥은 이렇게 고백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 욥기 23:10

봄은 반드시 온다. 그리고 그 봄이 왔을 때, 건조기를 통과하며 자란 뿌리가 얼마나 깊어졌는지 비로소 알게 된다. 마른 강바닥도 강바닥이어야 비가 왔을 때 물이 흐른다. 당신이 지금 서 있는 그 메마른 자리를 떠나지 말라. 거기가 강바닥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 히브리서 11:1

믿음은 파도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파도 아래 바위를 믿는 것이다. 지금 파도밖에 보이지 않더라도, 바위는 거기 있다.

공유하기

이어서 읽기

auto_awesome

Soli Deo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