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하나님이 왜 아이들의 고통을 허용하는가

선한 하나님이 왜 아이들의 고통을 허용하는가

#변증#신정론#고통#악의문제#십자가

두 청중에게 쓰는 편지

이 글을 쓰기 전에 잠시 멈춘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두 사람이 던지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서재에 있다. 책상 위에 도킨스와 흄이 펼쳐져 있고, 커피는 식었다. 그는 논리의 정합성을 따진다. 전능하고 선한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왜 무고한 아이가 고통받는가. 이 물음은 그에게 지적 퍼즐이다.

다른 한 사람은 병원 복도에 있다. 작은 손의 온기가 아직 손바닥에 남아 있고, 간호사가 건넨 종이컵의 커피는 식었다. 그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 이유를 물을 기력조차 없다.

이 두 사람에게 같은 언어로 대답하는 것은 실패한다. 서재의 청중에게는 엄밀함이, 복도의 청중에게는 임재가 필요하다. 그러나 기독교의 응답은 결국 하나의 장소에서 만난다. 십자가다.

무신론의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가

먼저 서재의 청중에게 말한다.

악의 문제가 무신론의 가장 강력한 무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무기가 무신론자 자신의 손을 벤다. 아이의 고통이 “잘못되었다”고 선언하려면, 그 선언이 기대고 있는 도덕적 지평이 실재해야 한다. 그러나 맹목적 우주에서 진화한 신경 발화가 “이것은 부당하다”고 판결할 자격을 어디에서 얻는가. 분자의 춤에는 정의가 없다.

무신론자가 아이의 고통 앞에서 분노할 때, 그 분노 자체가 그의 세계관을 배반한다. 분노는 “이 세계는 이래서는 안 된다”는 판단을 전제한다. 그 전제는 이 세계 바깥에 있는 선의 실재를 이미 빌려 쓰고 있다. 악의 문제는 하나님 없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는 제기조차 되지 않는다.

전통 신정론의 한계

그러나 서재의 청중에게도, 병원 복도의 청중에게도, 우리는 값싼 대답을 건넬 수 없다.

자유의지 변호는 유아의 고통 앞에서 무너진다. 아이는 아직 의지를 행사한 적이 없다. 영혼-만들기 변호는 신생아의 고통이 누구의 성품을 단련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믿음이 부족해서”, “숨겨진 죄 때문에”라고 말하는 번영 신학의 언어는 욥의 친구들의 언어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책망하신 신학이다.

성경이 제시하는 가장 정직한 출발점은 타락의 우주적 파급이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 로마서 8:20

아담 한 사람의 범죄가 피조세계 전체에 죽음과 고통을 들여왔다. 갓난아이의 고통조차 이 거대한 시스템의 일부다. “불공정하지 않은가”라는 항변은 정당하다. 그러나 같은 유기적 연대성이 구원에서도 작동한다는 사실을 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 연대성은 저주의 통로일 뿐 아니라 은혜의 통로이기도 하다. 한 사람 안에서 무너진 것을, 한 사람 안에서 되살리시는 것이 복음의 문법이다.

그러나 설명은 위로하지 못한다

여기까지가 신학의 정돈된 논의다. 그러나 병원 복도의 부모에게 이 논증을 던지는 것은 잔인함이다. 정합성은 슬픔을 덮지 못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설명이 아니라 한 사람을 내민다.

욥기 전체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끝까지 이유를 말씀하지 않으신다. 대신 나타나신다. “네가 어디 있었느냐”(욥 38:4). 욥은 해답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났다. 성경은 고통의 문제를 논리로 닫지 않고, 얼굴로 연다.

그 얼굴이 결국 나사렛에서 나타난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 요한복음 11:35

우주의 창조자가, 죽은 자를 살리실 능력이 있는 분이, 무덤 앞에서 우셨다. 무력해서가 아니다. 고통이 얼마나 실제적인 상실인지 아시기에 우셨다. 하나님은 고통을 바깥에서 설명하시지 않고, 고통 안으로 걸어 들어오셨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 이사야 53:4-5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악의 문제에 논리로 답하신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응답하셨다. 겟세마네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우신 그분이, 바로 당신의 아이가 고통받던 그 침대 곁에 계셨던 분이다. 그분도 울고 계셨다.

아이들에 대한 소망

다윗은 갓난아이를 잃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 사무엘하 12:23

이것은 절망이 아니다. 소망의 문장이다. 다윗은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다.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 마태복음 19:14

그리스도의 팔은 신학자의 분류보다 넓다. 언약 안에서 태어나 스스로 신앙을 고백할 시간을 얻지 못하고 떠난 아이들에 대하여, 도르트 신경은 “경건한 부모가 그들의 자녀가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에 속해 있음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달콤한 감상이 아니라 언약의 논리다.

그리고 종착점

이 모든 것의 끝은 새 창조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 요한계시록 21:4

이 구절의 동사는 “닦는다”이다. 설명한다가 아니다. 눈물의 이유를 연설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주신다. 신정론의 마지막 답은 논증이 아니라 그 손길이다.

오늘, 두 청중에게

서재의 청중에게 말한다. 악의 문제가 하나님 존재를 반박한다고 생각했다면, 그 문제가 실은 하나님 없이는 제기조차 되지 않음을 보라. 그리고 그 문제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우주의 주변에서 설명문을 내려보내시는 분이 아니라, 역사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와 아들을 고통 밖에 두지 않으신 분임을 보라.

병원 복도의 청중에게 말한다. 나는 당신의 왜에 답할 수 없다. 어떤 설교자도 5단계 해답을 건넬 수 없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안다. 당신의 눈물은 세어진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 시편 56:8

하나님은 한 방울도 땅에 허비되도록 두지 않으신다. 이해하기 전에, 붙드십시오. 이해는 새 창조에서 온다. 붙드는 것은 오늘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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