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 너무 클 때
말기 암 환자가 병실 침대에서 신음한다. 진통제의 효과는 갈수록 짧아지고, 회복의 가능성은 사라진 지 오래다. 사랑하는 가족은 환자의 고통을 지켜보며 무너진다.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이렇게 고통받는 것보다 편안하게 보내드리는 것이 더 인간적인 것 아닌가?”
이 질문은 추상적 윤리학의 문제가 아니다. 병실에서, 호스피스 병동에서, 가족회의에서 실제로 오가는 물음이다. 고통이 극심하고 죽음이 임박했을 때, 그 죽음을 앞당기는 것이 자비인가? “존엄한 죽음”이라는 이름은 왜 이토록 설득력 있게 들리는가?
이 시리즈의 1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기능이 아니라 존재임을 확인했다. 2편에서는 그 원칙을 생명의 시작에 적용했다. 이제 같은 질문을 생명의 끝에 던진다. 형상이 존재 자체에 있다면, 고통으로 기능이 무너진 사람 — 의식이 흐려지고,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 — 에게서 형상이 사라지는가? 그 사람의 생명을 끊는 것이 “존엄”인가?
생명의 주인은 누구인가
안락사 논의의 첫 번째 갈림길은 소유권이다. 내 생명은 내 것인가?
현대 사회는 “자기결정권”을 거의 절대적 가치로 세운다. 내 삶이니 내가 끝낼 권리가 있다는 논리다. 그러나 성경은 이 전제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19 너희 몸이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 고린도전서 6:19-20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편에서 낙태의 자기결정권을 다룰 때 이 구절을 살펴보았지만, 생명의 끝에서도 같은 원칙이 관통한다. 우리의 몸과 생명은 하나님의 소유다. 인간은 생명의 청지기(rentmeester)이지 소유자가 아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 사무엘상 2:6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 신명기 32:39
생명을 주시고 거두시는 권한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것을 섭리 교리로 정교하게 다듬어 왔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 제1권 16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일반적 보존이 아니라 개별적 통치(particularis gubernatio)다. 참새 한 마리도 아버지의 뜻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 10:29).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의 죽음의 때를 누가 결정할 수 있는가?
시편 기자는 이 신뢰를 이렇게 고백한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 시편 139:16
우리에게 정해진 날들이 하나님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 그 날들을 인간이 앞당기는 것은 섭리에 대한 신뢰의 포기다. 적극적 안락사 — 약물 투여 등으로 의도적으로 생명을 종결하는 행위 — 는 바로 이 지점에서 제6계명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살인하지 말라” — 출애굽기 20:13
이 계명의 근거는 창세기 9장 6절에 있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 창세기 9:6
살인 금지의 이유는 단 하나 —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 제135-136문답은 제6계명이 금하는 바를 이렇게 해설한다: “우리 자신과 이웃의 생명을 불법적으로 빼앗는 모든 것”, 그리고 이 계명이 요구하는 바는 “우리 자신과 이웃의 생명을 합법적으로 보존하려는 모든 주의 깊은 노력”이다. 의도가 선하더라도 — 고통을 끝내려는 연민이더라도 — 선한 의도가 죄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찌하리요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느냐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 하니 그들이 정죄받는 것은 당연하니라” — 로마서 3:8
적극적 안락사와 연명치료 중단은 같은 문제인가
여기서 반드시 해야 할 구별이 있다. 많은 사람이 “안락사”라는 하나의 단어 아래 전혀 다른 두 가지 행위를 뒤섞는다.
적극적 안락사(active euthanasia)는 약물 투여 등 직접적 행위로 환자의 생명을 종결하는 것이다. 이것은 의도적 살해이며, 성경이 금하는 바가 명확하다.
소극적 안락사(passive euthanasia) — 더 정확히는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 — 는 다른 성격의 행위다. 회복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게 인공호흡기나 심폐소생술 등 연명장치를 더 이상 적용하지 않는 것이다.
이 둘의 핵심 차이는 의도(intention)에 있다. 적극적 안락사의 의도는 “죽음을 유발하는 것”이다. 연명치료 중단의 의도는 “치유 불가능한 상태에서 자연적 죽음의 과정을 허용하는 것”이다. 전자는 하나님의 주권을 찬탈하는 행위이고, 후자는 오히려 섭리의 때를 받아들이는 행위일 수 있다.
바빙크의 통찰이 여기서 빛난다. 현대 의학은 일반 은총의 열매다. 그러나 일반 은총으로 죽음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다 — 죽음의 극복은 특별 은총, 즉 그리스도의 부활에 속한 영역이다.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회복한다”(gratia naturam non tollit sed restaurat). 의학 기술로 죽음의 과정을 무한정 연장하는 것은, 일반 은총의 적절한 사용이 아니라 죽음의 현실을 부정하는 근대적 오만일 수 있다.
그러므로 회복 가능성 없는 환자에게 기계적으로 연명을 강제하는 것은, 반드시 경건한 행위가 아니다. 죽음을 앞당기는 것도 죄이지만,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도 피조물의 분수를 넘는 것이다. 한국의 연명의료결정법(2018)이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을 허용하면서도 수분·영양 공급 중단이나 치사 약물 투여는 금지하는 것은, 이 구별의 정당성을 반영한다.
다만 이 경계선은 항상 신중하게 다뤄져야 한다. “죽게 놔두려는” 의도가 “빨리 죽게 하려는” 의도로 미끄러지는 것은 매우 쉽다. 그래서 교회는 이 문제에서 원칙을 분명히 하되, 개별 상황에서의 판단에는 기도와 공동체의 분별을 동반해야 한다.
”존엄한 죽음”이라는 언어를 해부한다
안락사를 옹호하는 가장 강력한 수사는 “존엄사”(death with dignity)라는 이름이다. 누가 “존엄한 죽음”에 반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아름다운 이름 뒤에는 세 가지 치명적 전제가 숨어 있다.
첫째, 고통은 무의미하다는 전제. 존엄사 담론은 고통을 제거해야 할 순수한 악(evil)으로 본다. 그러나 성경은 고통에 대해 훨씬 복잡하고 깊은 이야기를 한다. 고통은 하나님의 손 밖에 있는 무작위적 사건이 아니다.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로마서 5:3-4
고통은 성도의 인내를 빚고,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통로가 된다. 욥은 그 극한의 고통 끝에서 하나님을 “이론”이 아닌 “현실”로 만났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 욥기 42:5
이것이 고통을 미화하자는 말인가? 결코 아니다. 다만 고통에 의미가 없다는 세속의 전제가 틀렸다는 것이다. 고통 한가운데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다. 그 일을 성급하게 차단할 권리는 인간에게 없다.
둘째, 자율성이 최고 가치라는 전제. 존엄사 담론의 핵심은 “내 죽음은 내가 결정한다”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인간은 자율적 존재(autonomous being)가 아니라 관계적 존재(relational being)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존재하며,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살고 죽는다.
7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 로마서 14:7-8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 고백은 삶의 방향뿐 아니라 죽음의 때와 방식까지 주님의 주권 아래 두는 것이다. 자율성을 최고 가치로 세우는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구별을 해체하는 일이다.
셋째, 존엄의 근거를 잘못 설정하는 전제. 존엄사 담론은 말한다 — 고통 속에 누워 있는 것은 존엄하지 않다고. 스스로 결정하고 깔끔하게 마감하는 것이 존엄하다고.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가장 “존엄한 죽음”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다.
채찍에 찢기고, 못에 박히고, 온 몸이 들려 질식하며 죽어가는 그 죽음 — 세상의 기준으로 이보다 비참한 죽음이 있을까? 그러나 바로 그 죽음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가장 존엄한 순간이었다. 존엄은 고통의 부재에 있지 않다. 존엄은 존재의 가치 자체에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는 어떤 상태에서든 존엄하다 — 이것이 1편에서 세운 핵심 명제의 귀결이다.
고통과 하나님 — 피할 수 없는 질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이 질문에 완전한 답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교만이다. 그러나 성경은 침묵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 로마서 8:17b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 로마서 8:18
바울은 고통을 영광과 연결한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것은 고통을 가볍게 여기라는 말이 아니다. 고통의 무게를 충분히 인정하되, 그것보다 측량할 수 없이 더 큰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확신이다.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 고린도후서 4:8-10
그리스도인에게 고통은 막다른 골목이 아니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다. 고통은 부활을 향한 통로이지, 의미 없는 고문이 아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이것을 먼저 보여주셨다. 겟세마네에서 그분은 고통을 피하고 싶다고 솔직히 기도하셨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 14:36). 그러나 그 기도의 끝은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였다. 고통을 인정하되 회피하지 않으신 것 — 이것이 고통 앞에서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길이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1문은 이 신뢰를 이렇게 요약한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인가? 몸과 영혼 모두에서,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내 것이 아니요,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다.”
“나의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것이다.” 이 고백이 고통 한가운데서도 생명을 놓지 않는 이유다.
미끄러운 경사면 — 역사가 보여주는 경고
신학적 원칙 외에, 역사적 현실도 경고한다. 안락사를 합법화한 나라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네덜란드는 2002년 안락사를 합법화했다. 처음에는 “말기 환자의 견딜 수 없는 고통”에 한정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적용 범위는 치매 환자, 정신질환자, 심지어 “삶에 피곤한” 노인에게까지 확대되었다. 벨기에는 미성년자에게도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다. 캐나다의 MAID(Medical Assistance in Dying) 프로그램은 빈곤과 장애를 이유로 안락사를 선택하는 사례가 보고되면서 국제적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것이 바로 미끄러운 경사면(slippery slope)이다. “예외적 상황”으로 시작한 것이, 한 번 문이 열리자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라는 기준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이며, 주관적 기준은 끊임없이 낮아진다.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이 경고는 더욱 절실하다. 세계 최고 속도의 고령화, 의료비 부담, 가족 돌봄의 한계 — 이 구조적 압박 속에서 안락사 논의가 “의료 윤리”의 옷을 입고 등장하지만, 그 이면에는 경제적 압박이 윤리적 허용으로 포장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노인의 말은 진정한 자율적 결정인가, 아니면 사회가 만들어낸 수치심인가?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 앞에서
안락사를 원하는 이유 중 가장 가슴 아픈 것은 “가족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이 말 앞에서 교회가 교리만 늘어놓는다면, 우리는 진리를 가르치되 진리를 사는 것에는 실패한 것이다.
솔직히 말해야 한다. 교회의 부재가 안락사의 매력을 높인다. 고통 속에 홀로 남겨진 두려움, 돌볼 사람이 없다는 절망, 짐이 된다는 수치심 — 이것들은 교회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크게 줄어들었을 짐이다. 안락사를 원하는 많은 사람이 실제로 원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고통 없음과 혼자가 아닌 것이다.
스펄전은 평생 통풍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무엇인지 뼛속으로 알았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고통받는 이에게 건네는 말은 시편 23편 4절이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 시편 23:4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고통의 해결이 아니라 고통 안에서의 동행이 위로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동행은 교회의 손과 발을 통해 가시화된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 고린도후서 1:4
교회가 해야 할 일 — 반론이 아니라 임재
안락사에 대한 교회의 응답은 단순히 “안 된다”가 아니다. “안 된다”고 말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교회는 바리새인과 다르지 않다. 교회의 진정한 응답은 고통받는 자 곁에 있는 것이다.
첫째, 함께 있는 사역(ministry of presence).
욥의 세 친구가 처음 했던 일은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눈을 들어 먼 곳에서 바라보매 그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칠 주야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하지 아니하였더라” — 욥기 2:12-13
칠 일 동안 침묵하며 함께 앉아 있었다. 그들의 실수는 나중에 말을 시작하면서 벌어졌다. 처음의 침묵 — 함께 있는 것 — 은 옳았다. 고통받는 자에게 필요한 첫 번째 것은 설교가 아니라 임재(presence)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 고린도전서 12:26
둘째, 완화의료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가 되는 것.
교회는 적극적 안락사에 반대할 뿐 아니라, 그 대안인 완화의료(palliative care)와 호스피스를 적극 지지하고 참여해야 한다. 고통을 관리하면서 자연적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 것 — 이것이 일반 은총의 열매인 현대 의학을 가장 적절하게 사용하는 길이다. 안락사가 생명을 끊어 고통을 끝내는 것이라면, 완화의료는 생명을 유지하면서 고통을 줄이는 것이다. 교회는 후자의 편에 서야 한다.
셋째, 연약함을 받아들이고 섬기는 공동체가 되는 것.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 갈라디아서 6:2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말에 대한 복음적 응답은 이것이다: 짐을 서로 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이다. 연약한 자가 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자를 섬기는 자리에서 은혜가 흐른다. 돌봄을 받는 자와 돌봄을 제공하는 자 모두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난다.
넷째, 가족을 돌보는 것.
간병하는 가족의 죄책감과 탈진도 교회가 품어야 할 몫이다. “더 잘해드릴 수 있었는데”라는 자책, 돌봄의 끝이 보이지 않는 소진 — 이 짐을 교회가 함께 져야 한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 시편 34:18
죽음 앞에서의 소망
안락사 논의의 근저에는 결국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고통이 두렵고, 고통 속의 죽음이 두렵다. 이 두려움에 대한 진정한 답은 죽음을 앞당기는 것이 아니라, 죽음 너머의 확실한 소망을 아는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요한복음 11:25-26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 고린도전서 15:55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마지막 단어가 아니다. 부활이 마지막 단어다. 고통의 끝은 무(無)가 아니라 영광이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쓴 편지의 한 구절은, 고통 속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가장 정직하게 보여준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 빌립보서 1:21
“죽는 것도 유익”이라는 말은 고통에서 도망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의 갈망이다. 고통을 피하려 죽음을 선택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 이 둘은 외형이 비슷해 보여도 방향이 정반대다.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 로마서 8:38-39
사망도 끊을 수 없다. 고통도 끊을 수 없다. 이 확신이 있기에 그리스도인은 고통 한가운데서도 생명을 놓지 않는다.
생명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 시리즈를 돌아보자. 1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기능이 아니라 존재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AI가 인간의 모든 기능을 모방해도 형상은 흔들리지 않는다. 2편에서 우리는 이 원칙을 생명의 시작에 적용했다. 아직 눈을 뜨지 못한 태아도 하나님 앞에 선 인격이다. 그리고 이 3편에서 우리는 같은 원칙을 생명의 끝에 적용했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환자도, 의식이 흐려진 노인도, 고통에 신음하는 말기 환자도 — 그 형상은 한 치도 줄지 않았다.
형상은 기능에 달려 있지 않으므로, 기능이 사라져도 형상은 남는다. 이것이 이 시리즈의 하나의 결론이다.
“성도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 시편 116:15
고통 속의 죽음도 여호와께 귀중하다. 조용히 떠나는 죽음만 존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채 신음하는 그 죽음도 여호와 앞에서 귀중하다. 교회는 이 진리를 선포하되, 말로만 선포하지 않는다. 곁에 앉고, 손을 잡고, 짐을 함께 지고, 부활의 소망을 속삭인다. 그것이 “존엄한 죽음”에 대한 교회의 유일한 답이다 — 죽음을 앞당기는 것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 함께 서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