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봄, 같은 전화가 걸려온다. “목사님, 대학에 들어간 우리 아이가 요즘 밝아졌어요. 선배들이 좋은 사람들이라는데, 그게 좀 이상해서요.” 밝은 또래, 훈련된 미소, 건강 체조·문화 봉사·인문학 강의. 몇 주가 지나서야 청년은 자신이 어디에 들어왔는지 알게 된다. 그때는 이미 감정과 관계의 사슬이 채워진 뒤다. 그리고 가장 깊은 안쪽 방에서, 어떤 집단은 성적 학대를 “영적 의식”으로 포장한다. 교주의 몸이 곧 “성령을 전수하는 통로”이며, 거부하는 자는 “영적 미성숙”이라는 논리가 작동한다.
이 글은 그런 집단—교주를 메시아로 신격화하며 성적 착취를 성례로 위장하는 카리스마적 한국 신흥 종파—의 구조를 성경과 개혁주의 신앙고백의 빛으로 해부한다. 그리고 그 그늘에서 상처 입은 이들에게 참된 대제사장을 가리킨다.
거짓 메시아의 첫 번째 표지 — 이적이 아니라 교리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 사람이 그렇게 영향력이 있고, 수많은 사람이 체험을 한다는데, 정말 거짓일까요?” 주님은 이 질문에 이미 답하셨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 마태복음 24:24
신명기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선지자가 이적을 보이고 그 이적이 실제로 이루어진다 해도, 그가 가르치는 도가 하나님을 떠난다면 따르지 말라고 명한다(신 13:1-3). 판별의 기준은 카리스마의 크기가 아니다. 체험의 강도도 아니다. 오직 그가 전하는 도가 성경의 하나님께 속해 있는가이다.
칼뱅은 『기독교강요』 IV권 2장에서 참 교회의 표지를 둘로 못 박았다. 말씀의 순전한 선포와 성례의 바른 집행. 이 집단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역전시킨다. 말씀은 교주 한 사람의 비밀 해석으로 독점되고, 성례는 그 몸과의 접촉으로 사유화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선언한 것이 여기서 그대로 성취된다: “교리에서, 예배에서, 또는 교회 규율에서 심하게 타락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사탄의 회당이 된다”(WCF 25.4).
두 번째 표지 — 그리스도의 중보 직분을 찬탈하는가
한 인간이 “나를 통해야만 구원에 이른다”, “나와의 신비적 연합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말할 때, 그는 단순히 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만의 자리를 찬탈하고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 디모데전서 2:5
사도 바울은 마지막 때의 불법의 사람을 이렇게 묘사했다.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 내세우느니라”(살후 2:4). 교주를 “재림 주”, “보혜사의 실체”, “육체로 온 메시아”라 선포하는 순간, 이 본문은 예언이 아니라 진단이 된다.
세 번째 표지 — 양심을 범죄자로 만든다
가장 잔인한 폭력은 주먹이 아니다. 피해자의 도덕적 직관을 죄로 만드는 일이다. “그 일”을 당한 뒤 자매는 운다. 토한다. 도망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집단은 말한다. “그 수치심이 바로 너의 영적 미성숙이다. 너의 육적 생각이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는다.”
여기서 칼뱅이 말한 sensus divinitatis—하나님을 향한 내재적 감각—의 윤리적 대응물인 양심이 공격당한다. 바울은 이방인에게도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이 있다고 말했다(롬 2:15). 피해자가 느끼는 혐오·거부·저항은 결함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영혼 안에서 울리시는 내적 증언이다. 청교도들이 양심을 “작은 법정”(conscientia)이라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도 요한은 경계를 분명히 긋는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 요한일서 4:1
체험은 권위가 아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어떤 교주의 계시로도 정지되지 않는다. 바울은 이미 고린도 교회에 “음행하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고전 5:9) 명령했다. “영적 맥락”이라는 접두어가 붙는다고 해서 음행이 음행이 아닌 것이 되지는 않는다.
세 겹의 독점화 — 왜 이 구조는 반드시 착취로 귀결되는가
거짓 종교의 해부학은 세 겹의 독점 구조로 환원된다.
계시의 독점. 교주만이 성경을 옳게 푼다. 성경은 평신도에게 닫힌 책이 된다. 중보의 독점. 교주를 통해야만 구원에 이른다. 디모데전서 2:5가 유린된다. 도덕의 사유화. 교주의 행위는 일반 도덕률 위에 있다. 일반계시(롬 1:19-20)가 무효화된다.
이 세 독점이 한 사람에게 모이는 순간, 성적 착취는 시간 문제일 뿐이다. 권력 구조가 이미 구축되었기 때문이다. 종교적 황홀과 성적 충동은 둘 다 “자아를 초월하려는 욕구”와 연결된다. 이 초월 욕구가 비틀린 위계와 결합할 때, 교주의 몸은 “신적 접촉의 매개”로 신화화되고, 착취는 “성례”의 외피를 두른다. 이것은 고대 영지주의가 이미 걸어간 길이다. 초대 교회는 이것을 즉각 이단으로 정죄했다.
상처 입은 이에게 — 참 대제사장께로
이 글을 읽는 이 중 누군가는 이미 저 문 안쪽을 지나온 이다. 또 누군가는 그 집단을 떠나왔지만 여전히 “내가 잘못한 것인가”라는 물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듣기 바란다. 틀린 것은 당신이 아니다. 당신을 속인 것이 그들이다. 당신이 그 순간 느낀 혐오, 수치, 도망치고 싶은 마음—그것이 사탄의 방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그 음성을 침묵시킨 자들이 사탄의 도구였다.
그리고 한 분이 기다리신다. 착취하지 않으시는 대제사장이시다.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 히브리서 4:14-16
당신의 연약함을 이미 아신다. “신비적 순종”을 요구하며 당신의 몸을 빼앗아 간 자가 아니라, 당신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신 분이다. 회복의 길은 가짜 중보자를 떠나 참 중보자께로 나아가는 그 한 걸음이다. 그 한 걸음을 돕는 목회자·상담사·형제 자매가 교회 안에 있다. 시편을 오래 함께 읽어 줄 이들이 있다. 판단하지 않고 “네가 틀린 게 아니다”라고 말해 줄 이들이 있다.
목자의 임무는 둘이다. 양을 이리로부터 지키는 것, 그리고 이리에게 물린 양을 안고 돌아오는 것. 교회는 후자의 부름 앞에 여전히 서 있다. 그리고 은혜의 보좌는, 지금도, 담대히 나아오라 부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