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지하철에서 한 친구가 말했다. “나는 기독교 자체는 괜찮아. 문제는 교회야. 교인들이 제일 위선적이더라.” 이 말은 지난 20년간 한국에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가장 자주 입에 올린 문장일 것이다. 그리고 이 말에는 — 정직하게 말하자면 — 상당 부분 사실인 구석이 있다. 대형교회의 세습과 성추문, 재정 비리, 교권 정치.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 때문에 모독을 받았다는 사도의 탄식(롬 2:24)이 오늘 한국 교회의 거울이 되었다.
그러나 이 글은 변명하는 글이 아니다. 동시에 납작 엎드려 비판을 통째로 수용하는 글도 아니다. 이 글은 “교회에 위선자가 많다”는 비판을 진지하게 따라가 보려는 글이다. 그 비판을 끝까지 따라가면, 비판자가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 도달한다. 비판자가 사용하는 기준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그 기준이 결국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지.
첫 번째 뒤집기 — 비판자의 자본은 누구에게서 빌려 온 것인가
잠시 멈춰 생각해 보자. 위선이 왜 잘못인가? 겉과 속이 다른 것이 왜 그토록 분노할 일이어야 하는가. 만약 인간이 순수한 우연의 산물이고 도덕이 집단의 편의를 위한 합의에 불과하다면, 외적 언행과 내적 욕망의 불일치는 기껏해야 사회적 비용의 문제일 것이다. “위선자”라는 단어에 담긴 그 도덕적 분노 — 인간이 진실해야 한다는 확신, 말과 삶이 일치해야 한다는 요구 — 는 어디서 왔는가.
그 기준은 자연 진화에서 나오지 않는다. 진화는 생존에 유리한 위장을 오히려 장려한다. 그 기준은 세속 법률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법은 공적 규범 위반만 처벌할 뿐, 위선 자체를 처벌하지 않는다. 위선을 죄라고 부를 수 있는 도덕적 문법은, 역사적으로 추적해 보면 한 사람의 산상수훈에서 왔다.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 마태복음 23:27-28
“교회에 위선자가 많다”고 비판하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그리스도의 기준으로 그리스도인을 재고 있다. 그는 기독교의 도덕적 자본을 빌려 쓰면서 그 자본을 빌려준 은행을 고소하고 있다. 이 사실 자체가 기독교의 반증이 아니라, 기독교 도덕이 얼마나 깊이 이 문화의 바닥까지 스며들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두 번째 뒤집기 — 병원에 환자가 많다는 사실이 병원을 반증하는가
그러면 교회는 왜 이렇게 생겼을까. 기독교는 처음부터 자기를 어떤 모임이라고 주장했는가. 예수 자신의 입에서 나온 정의는 명료하다.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 마태복음 9:12-13
교회는 “의인들의 전시관”이 아니다. 교회는 “죄인들의 회복실”이다. 병원의 문을 열고 들어가 환자가 많다고 놀라는 사람은 없다. 병원은 본래 환자가 모이는 장소다.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아픈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떠난다. 이 분노의 구조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한국 교회가 깊이 반성해야 할 지점이 있다. 한국 교회는 지난 수십 년간 “교회는 복 받은 사람들의 모임,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거짓된 인상을 심었다. 번영 복음, 성공 간증, 즉각적 완전주의가 강단을 점령했다. 그 결과 교회 문턱을 넘는 사람들이 병원에 들어가는 심정이 아니라 성공 세미나에 들어가는 심정으로 왔다. 그리고 “성공한 신자”들이 사실은 넘어지고 우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속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속인 것은 복음이 아니라, 복음을 성공 서사로 번역한 강단이었다.
세 번째 뒤집기 — 성화는 순간인가 여정인가
비판자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20년째 교회 다니는 저 집사는 왜 저렇게 여전히 욕심이 많은가? 기도 많이 하면 사람이 좀 바뀌어야 하지 않는가?”
이 질문은 성화(sanctification)라는 교리를 오해한 데서 나온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3장은 이렇게 고백한다. 성화는 “전인격에 걸쳐 일어나되, 이 세상에서는 불완전하며, 매 부분마다 부패의 잔재가 남아 있다. 이로부터 성령과 육체 사이의 지속적이고 화해 불가능한 전쟁이 일어난다.” 이것은 2천 년 된 기독교가 신자의 삶에 대해 말해 온 일관된 진술이다.
그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교회 안의 평범한 집사를 살필 필요도 없다. 사도 바울 자신이 성숙의 절정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 로마서 7:18-19
바울은 위선자였는가. 아니다. 바울은 정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죄를 숨기지 않았고,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정죄 없음(롬 8:1)을 움켜쥐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 그는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 불렀다. 사도가 자기를 그렇게 불렀다면, 교회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집사가 여전히 죄와 씨름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독교의 실패인가, 아니면 기독교가 처음부터 약속한 그대로인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갈라디아서 5:17
갓난아기가 처음 걸음마를 배울 때 수없이 넘어진다. 그 아기를 보고 “이 사기꾼! 걷는 척하면서 사실은 걷지 못하지 않느냐!”라고 외치는 사람은 없다. 기독교인의 거룩함은 그렇게 걷기 시작한 아기의 걸음과 같다. 넘어진다. 많이 넘어진다. 그러나 다른 점이 하나 있다.
23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24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 시편 37:23-24
네 번째 — 그러나 진짜 위선은 책망받아야 한다
여기까지 읽으면 이런 반문이 따라온다. “그렇게 다 변명하면, 교회의 성추문·재정 비리도 ‘성화의 과정’이란 말인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직한 구분이 필요하다.
첫째, 자기 죄와 씨름하며 때때로 넘어지는 성도가 있다. 이 사람은 위선자가 아니다. 이 사람은 기독교가 제시한 “걸어가는 길 위의 사람”이다.
둘째, 공적으로는 의로움을 가장하면서 사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 성경이 “외식(hypokrisis)“이라 부르는 것이며,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 산상수훈에서 가장 엄한 책망을 퍼부으셨다. 교회 지도자의 성추문, 교권을 이용한 착취, 강단에서의 회개 설교와 뒷방의 부정. 이것은 교회가 세상보다 먼저 통곡하고 권징해야 할 죄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0장은 교회 권징을 명시적으로 규정한다. 권징이 살아 있는 교회는 위선을 방치하지 않는다. 한국 교회의 많은 위기는, 사실 권징을 잃어버린 데서 왔다. “서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공적 죄가 은폐되었고, “덕을 세운다”는 이름으로 권력 남용이 덮였다. 회의자가 교회에 분노할 때, 그 분노의 상당 부분은 교회가 자기 기준을 스스로 적용하지 않은 것에 대한 정당한 분노다. 복음은 그 분노를 기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복음은 그 분노에 동의한다.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마태복음 7:23
가라지의 비유(마 13:24-30)에서 주인은 알곡과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둔다. 현재 교회의 들판에는 둘이 섞여 있다. 인간의 눈으로는 완전히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추수의 날이 온다. 회의자가 어떤 교회 지도자에게 분노할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의 무게가 어떠할지를 안다면, 그 회의자의 분노는 도리어 연민으로 바뀔 것이다.
다섯 번째 — 기독교인의 정체성: “선한 사람”이 아니라 “용서받은 죄인”
여기서 가장 깊은 뒤집기에 도달한다. 기독교인이 “선한 사람”이라는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다. 기독교인은 선한 사람이 아니다. 기독교인은 “용서받은 죄인”이다. 이 두 정체성의 차이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선한 사람이 되려는 사람은 자기 선함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위장해야 한다. 흠이 드러나면 자기 정체성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서받은 죄인은 자기 죄를 숨길 필요가 없다. 자기 죄는 이미 드러났고, 이미 십자가에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요한일서 1:8-9
그러므로 복음을 정확히 믿을수록 위선의 필요가 줄어든다. 감추어야 할 자기 의가 없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교회 안에서 여전히 위선이 발견된다면 그것은 복음을 너무 믿은 탓이 아니라, 복음을 충분히 믿지 못한 탓이다. 복음이 덜 전해진 교회, 복음이 성공 서사로 번역된 교회, 복음이 도덕주의로 환원된 교회 — 거기서 위선이 번성한다. 해답은 “교회는 완벽해야 한다”는 비현실적 요구가 아니라, 복음을 더 깊이 전하는 것이다.
회의자에게 드리는 초대
교회가 위선적이기 때문에 복음이 거짓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복음이 진실이기 때문에, 위선이 드러나는 것이다. 복음의 빛이 없는 곳에서는 아무도 자기의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교회가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교회 안에 살아 있는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그 기준은 교인 평균이 아니라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 에베소서 5:25
교회를 사람의 수준에서 판단하지 말고, 교회의 머리이신 그분의 수준에서 한 번만 바라보기를 권한다. 그분은 위선자가 아니셨다. 그분은 자기 겉과 속이 완전히 일치하신 유일한 분이었다. 그분이 교회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교인들의 도덕적 우수성에 있지 않고, 자기를 내어주신 그분께 있다.
한국 교회에 실망하여 떠난 사람이라면, 뉴스 카메라가 비추는 대형교회 스캔들이 아니라, 평범한 지역 교회의 수요예배에 한 번 가보시기를 권한다. 거기서 보는 풍경은 연예인이 아니다. 하루의 피곤을 안고 앉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울면서 기도하는 어머니, 조는 아이, 자기 죄를 고백하는 중년 남성. 이것이 교회의 본모습이다. 뉴스는 이 풍경을 보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풍경이 2천 년 교회사의 대부분을 차지해 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 십자가 앞에 한 번만 서 보시기를 권한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로마서 3:10
그 의인 없는 자리에, 한 분 의인이 대신 서 계신다. 그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의를 위장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 순간 비로소 우리는 “위선자”이기를 그만두고, “용서받은 죄인”이 된다. 교회가 품은 비밀은 교인들의 도덕적 성취가 아니라, 바로 이 한 가지 전환이다.
교회에 위선자가 많다는 당신의 관찰은 옳다. 그러나 그 관찰의 끝에서 당신이 발견할 것은 교회의 파산이 아니라, 당신이 사용한 그 기준이 결국 당신 자신을 향해 되돌아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기준이 자기 자신을 향해 돌아오는 경험 — 그것이 바로 복음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