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블로그는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합니다. 이 글은 최대한 중립적으로 작성됐으며, 개혁주의적 견해는 글 하단 ‘개혁주의의 견해’ 섹션에 별도 표기합니다.
그 수도사의 이름
A5편에서 우리는 위클리프의 불태워진 뼈와 후스의 강에 뿌려진 재를 보았다. 중세 교회는 그들을 지웠다고 믿었다. 그러나 사상은 타지 않았고, 재는 유럽 전역으로 흘러갔다. 100년 뒤, 비텐베르크의 한 수도사가 교회 문에 못을 박았을 때 — 그 망치 소리가 바꿔놓은 것은 교회만이 아니었다. 유럽 전체가 달라졌다.
그 수도사의 이름은 마틴 루터. 그리고 그 못이 터뜨린 것은 종교개혁이었다.
만약 오늘날 누군가 당신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있는 사람이 과연 있습니까?” 이것은 현대인의 질문이 아니다. 500년 전, 한 수도사가 밤마다 흘린 땀과 눈물 속에서 던진 바로 그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서방 교회를 둘로 갈랐다.
타임라인 — 종교개혁의 흐름
| 연도 | 사건 |
|---|---|
| 1440s | 구텐베르크, 금속 활자 인쇄술 발명 |
| 1516 | 에라스무스, 그리스어 신약성경 출판 |
| 1517 | 루터, 95개 조항 발표 |
| 1519 | 쯔빙글리, 취리히에서 독자적 개혁 시작 |
| 1520 | 루터, 3대 논문 발표 |
| 1521 | 보름스 의회 — 루터, 철회 거부 |
| 1522 | 루터, 독일어 신약성경 번역 완료 |
| 1529 | 마르부르크 회담 — 루터와 쯔빙글리, 성찬론 대립 |
| 1531 | 쯔빙글리, 카펠 전투에서 전사 |
| 1534 | 루터, 독일어 구약성경 번역 완료 |
| 1536 | 칼뱅, 「기독교강요」 초판 출판 |
| 1541 | 칼뱅, 제네바 귀환 — 본격적 개혁 시작 |
| 1545–1563 | 트리엔트 공의회 — 천주교의 대응 |
| 1559 | 칼뱅, 제네바 아카데미 설립 |
| 1564 | 칼뱅 사망 |

왜 이때 폭발했는가 — 종교개혁의 배경
종교개혁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았다. A5편에서 살펴본 면죄부 남용, 교황권의 비대화, 아비뇽 유수와 서방 대분열 — 이 모든 것이 지하에서 압력을 축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압력만으로는 폭발하지 않는다. 불꽃이 필요했다. 16세기 초, 네 가지 불꽃이 동시에 일었다.
면죄부 — 한계를 넘다
A5편에서 다룬 면죄부 문제는 16세기 초에 극한에 달했다. 교황 레오 10세(재위 1513–1521)는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대규모 면죄부를 발행했다. 독일에서 이 면죄부 판매를 담당한 도미니코회 수사 요한 테첼은 A5편에서 인용한 대로 — “헌금 궤에 동전이 떨어져 쨍 하고 울리는 순간, 연옥에서 영혼이 뛰쳐나온다” — 는 식의 노골적인 판촉을 벌였다. 이것이 루터의 분노에 직접 불을 붙였다.
인쇄술 — 사상의 날개
1440년대, 독일 마인츠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금속 활자 인쇄술을 발명했다. 이전에는 책 한 권을 필사하는 데 수개월이 걸렸다. 인쇄술은 이것을 며칠로 줄였다. 루터의 95개 조항이 2주 만에 독일 전역에 퍼진 것, 루터의 저작이 수십만 부씩 팔린 것은 인쇄술 없이는 불가능했다. 종교개혁은 인쇄술이 가능하게 한 최초의 미디어 혁명이기도 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 — “원전으로 돌아가자”
14–15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로마 문헌에 대한 관심을 되살렸다. 인문주의자들의 모토는 “원전으로 돌아가자”(Ad fontes)였다. 이 원칙이 성경 연구에 적용되었을 때, 결과는 폭발적이었다. 학자들은 중세 내내 사용해 온 라틴어 불가타 역이 원본 히브리어·그리스어 텍스트와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다.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성경 (1516)
네덜란드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1466–1536)는 1516년, 그리스어 원문에 기초한 신약성경을 출판했다. 이것은 단순한 학술서가 아니었다.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은 불가타 역의 오류를 드러냈다. 예를 들어, 불가타 역이 마태복음 4:17에서 “고해하라(poenitentiam agite)“로 번역한 구절을, 에라스무스는 그리스어 원문에 따라 “회개하라(metanoeite)” — 즉 마음을 바꾸라는 뜻 — 로 수정했다. 이 차이는 거대했다. 전자는 고해성사 제도를 뒷받침하고, 후자는 내면의 진정한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이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손에 들고 로마서를 읽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바뀌었다.
마틴 루터 (1483–1546)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번개와 수도원
1483년 독일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난 마틴 루터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1505년 7월, 그는 폭풍우 속에서 번개에 거의 맞을 뻔했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루터는 외쳤다 — “성 안나여, 살려 주소서!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그는 맹세를 지켜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입회했다.
수도원에서 루터는 모범적인 수도사였다. 금식, 기도, 고해를 지극 정성으로 수행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서는 한 가지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죄인인 내가 어떻게 설 수 있는가?”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두려워했다. 의로운 하나님은 죄인을 심판하시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마틴 루터 초상 —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the Elder), 1526년. 크라나흐는 루터의 친구이자 비텐베르크의 궁정 화가로, 여러 점의 루터 초상화를 남겼다.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탑의 경험 — 로마서 1:17
루터의 삶을 뒤바꾼 것은 비텐베르크 대학 탑의 서재에서 로마서를 읽던 순간이었다. 이것을 흔히 “탑의 경험(Turmerlebnis)“이라 부른다. 루터는 로마서 1:17을 읽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로마서 1:17
루터는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의”를 새롭게 이해했다. 하나님의 의는 죄인을 심판하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죄인에게 선물로 주시는 의였다. 인간이 스스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받는 것이었다. 루터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 “마치 낙원의 문이 열린 것 같았다.”
이것이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 alone) —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의 핵심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선언한 진리가 1,500년의 시간을 뚫고 한 수도사의 심장에 다시 꽂힌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 로마서 3:28
95개 조항 (1517년 10월 31일)
이신칭의의 확신을 품은 루터에게, 테첼의 면죄부 판매는 참을 수 없는 모순이었다. 구원이 오직 믿음으로 주어지는 은혜라면, 돈으로 살 수 있는 면죄부란 무엇인가?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 교회(Schlosskirche) 문에 95개 조항(학술 토론 제안서 형태)을 내걸었다. 조항의 핵심은 면죄부 비판이었다. 루터는 교황이 연옥의 형벌을 면제할 권한이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고, 참된 회개는 교회의 문서가 아니라 신자의 내면에서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터가 95개 조항을 교회 문에 못 박다” — 페르디난트 파우벨스(Ferdinand Pauwels), 1872년. 루터가 실제로 문에 못을 박았는지는 역사적 논란이 있으나, 이 장면은 종교개혁의 상징이 되었다.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95개 조항은 원래 라틴어로 작성된 학술 토론 제안이었다. 루터의 의도는 교회 내부의 학문적 논쟁이었지, 교회와의 결별이 아니었다. 그러나 인쇄술의 힘으로 이 문서는 독일어로 번역되어 2주 만에 독일 전역으로, 한 달 만에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루터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폭풍이 시작된 것이다.
3대 논문과 결별 (1520)
이후 3년간 루터의 사상은 급속히 발전했다. 1520년, 루터는 세 편의 결정적 논문을 발표했다.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An den christlichen Adel deutscher Nation) — 루터는 로마 교회가 세 겹의 벽(교황은 세속 권력 위에 있다, 교황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 교황만이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으로 자신을 보호한다고 비판하고, 독일의 세속 지도자들에게 교회 개혁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여기서 루터는 만인 제사장직 — 모든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이 제사장이라는 교리 — 을 선언했다.
「교회의 바빌론 포로」(De captivitate Babylonica ecclesiae) — 루터는 로마 교회의 7성례 중 5개(견진, 혼인, 신품, 종부, 고해)를 성경적 근거가 없다고 부정하고, 세례와 성찬 두 가지만을 성례로 인정했다. 또한 화체설을 비판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 — 루터 신학의 아름다운 요약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의 자유로운 주인이며,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의 가장 충실한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종속된다.” 믿음으로 얻는 자유가 이웃을 향한 사랑의 봉사로 나아간다는 역설이다.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에게 60일 안에 주장을 철회하라는 칙서(「주여, 일어나소서, Exsurge Domine」)를 보냈다. 루터는 이 칙서를 비텐베르크 성문 앞에서 공개적으로 불태웠다. 다리는 끊어졌다.
보름스 의회 (1521) — “여기 내가 서 있습니다”
1521년 4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는 루터를 보름스 제국 의회에 소환했다. 황제는 안전 통행증을 발급했다 — 후스가 같은 약속을 받고도 화형당했음을 루터는 잘 알고 있었다.
의회에서 루터는 자신의 저작들이 탁자 위에 놓인 것을 보았다. 심문관이 물었다 — “이 책들이 당신의 것이냐? 그 내용을 철회할 의향이 있는가?”
루터는 하루의 숙고 시간을 요청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 “성경과 명백한 이성으로 납득되지 않는 한, 나는 철회할 수 없으며 철회하지 않겠습니다. 양심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올바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 내가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이 선언은 개인의 양심이 교황과 공의회의 권위에 맞선 순간이었다. 물론 루터가 말하는 “양심”은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에 포박된 양심이었다.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 디모데후서 3:16-17
보름스 의회 이후 카를 5세는 루터를 제국 추방자로 선언했다. 그러나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루터를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밀히 보호했다. 루터는 이 성에서 약 10개월간 은둔하며,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1522년 9월에 출판된 이 “9월 성경”은 독일어 문학의 기념비이자, 평신도가 성경을 직접 읽는 시대를 연 혁명이었다. 구약 번역은 1534년에 완성되었다.
울리히 쯔빙글리 (1484–1531) — 취리히의 개혁
루터가 비텐베르크에서 불을 지피고 있을 때, 스위스 취리히에서는 또 다른 개혁자가 독자적으로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울리히 쯔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는 스위스의 사제이자 인문주의 학자였다.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아 성경 원전을 직접 연구했고, 1519년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터(Grossmünster) 교회 사제로 부임하면서 연속 강해 설교(lectio continua) —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설교하는 방식 — 를 시작했다. 이것은 당시 관행이던 교회력에 따른 발췌 설교와 완전히 달랐다.
쯔빙글리의 개혁은 루터와 무관하게 시작되었다. 그는 에라스무스의 신약성경과 교부 문헌을 연구하며 독자적으로 “오직 성경”의 원리에 도달했다. 1522년, 쯔빙글리는 사순절 금식 규정을 공개적으로 위반하는 것을 지지하며 개혁의 신호탄을 올렸고, 이후 성상 철거, 수도원 해산, 미사 개혁을 추진했다.
마르부르크 회담 (1529) — 갈라선 두 개혁
루터와 쯔빙글리는 같은 적(로마 교회)에 맞서 싸우고 있었지만,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1529년, 헤센의 필립이 두 사람을 마르부르크에 초청하여 개신교 진영의 통합을 시도했다. 이것이 마르부르크 회담이다.
두 사람은 15개 조항 중 14개에 합의했다. 그러나 15번째 — 성찬론 — 에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루터는 “이것은 내 몸이다(Hoc est corpus meum)“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했다. 빵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가 실재하신다(이른바 공재설, Consubstantiation — 빵은 빵으로 남되, 그리스도가 함께 현존하신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탁자 위에 분필로 “HOC EST CORPUS MEUM(이것은 내 몸이다)“이라 쓰고, 논쟁이 격해질 때마다 천을 걷어 이 글자를 가리켰다고 전해진다.
쯔빙글리는 “이것은 내 몸을 의미한다(significat)“로 읽었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상징적 행위이지, 빵 안에 그리스도가 물리적으로 현존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합의는 결렬되었다. 루터는 쯔빙글리에게 “당신과 나는 다른 영을 가졌다”고 말했다. 개신교 진영은 출발 단계에서 이미 하나가 되지 못했다. 이 분열은 오늘날까지 루터교와 개혁교회(칼뱅주의)를 구분하는 핵심 지점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쯔빙글리의 죽음
쯔빙글리의 개혁은 취리히를 넘어 스위스 여러 칸톤으로 확산되었지만, 천주교를 고수하는 칸톤들과의 갈등은 무력 충돌로 번졌다. 1531년 10월, 제2차 카펠 전투에서 쯔빙글리는 군종 목사로 전선에 나갔다가 전사했다. 47세였다.
쯔빙글리의 죽음으로 취리히 개혁은 주춤했으나, 그의 후계자 하인리히 불링거가 사역을 이어받았고, 이후 칼뱅의 개혁과 합류하여 개혁주의 전통(Reformed tradition)을 형성하게 된다.
장 칼뱅 (1509–1564) — 종교개혁의 체계화
루터가 종교개혁의 불을 지폈다면, 칼뱅은 그 불에 구조를 부여했다.
프랑스의 젊은 인문주의자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은 프랑스 누아용에서 태어났다. 파리에서 인문학과 법학을 공부한 칼뱅은 1530년대 초 개신교 신앙으로 회심했다. 프랑스에서 개신교에 대한 박해가 강화되자 스위스로 망명했고, 1536년, 불과 26세의 나이에 종교개혁 신학의 기념비적 저작을 발표했다.
「기독교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기독교강요」는 종교개혁 신학의 가장 체계적인 요약서다. 1536년 초판(6장)에서 시작하여 1559년 최종판(80장, 4권 구성)까지 칼뱅은 평생에 걸쳐 이 책을 확대·개정했다. 이 책은 성경,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교회, 성례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교리 전체를 성경에 근거하여 논리적으로 서술한 작품이다.
칼뱅의 핵심 신학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의 주권. 칼뱅 신학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다. 역사의 모든 사건, 인간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궁극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예정론. 칼뱅은 구원이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근거한다고 가르쳤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어떤 이들을 구원으로, 어떤 이들을 유기(遺棄)로 예정하셨다. 이것은 차갑고 기계적인 교리가 아니라,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고백이다 — 구원이 인간의 연약한 결심에 달려 있다면 누가 확신을 가질 수 있겠는가? 구원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작정에 근거하기에 확실하다.
언약 신학. 칼뱅은 하나님이 인간과 맺으신 언약을 통해 구속사 전체를 이해했다. 구약과 신약은 단절이 아니라 하나의 은혜 언약의 전개이며, 교회는 이 언약 공동체의 연장이다.
제네바 — 종교개혁의 실험실
1536년, 칼뱅은 제네바를 경유하던 중, 기욤 파렐의 강력한 설득(거의 협박에 가까운)으로 제네바에 머물게 되었다. 이후 한 차례 추방(1538–1541)을 겪은 뒤, 1541년에 돌아와 죽을 때까지 23년간 제네바의 개혁을 이끌었다.
칼뱅은 제네바에 장로제(presbyterian polity)를 확립했다. 목사, 교사, 장로, 집사의 네 직분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이 체제는 교황제(천주교)도 감독제(루터교, 성공회)도 아닌 제3의 교회 정치 모델이었다. 장로들은 교인들의 선거로 선출되었으며, 목사와 장로가 합동으로 교회를 치리했다.
1559년, 칼뱅은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유럽 전역에서 학생들이 모여드는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여기서 훈련받은 목사와 선교사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개혁을 확산시켰다.
- 프랑스: 위그노(개혁교회 교인)가 급성장하여, 1560년대에는 프랑스 인구의 약 10%가 개혁교회에 속했다.
- 네덜란드: 칼뱅주의가 스페인의 천주교 지배에 대한 저항 운동과 결합하여 독립 전쟁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 스코틀랜드: 존 녹스(John Knox, 1514–1572)가 제네바에서 칼뱅에게 배운 후 귀국하여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세웠다. 녹스는 칼뱅의 제네바를 “사도들 이래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라 불렀다.
- 잉글랜드: 청교도 운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564년 5월, 칼뱅은 54세의 나이로 제네바에서 사망했다. 그는 유언에 따라 표식 없는 무덤에 묻혔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가야 한다는 그의 신학이 죽음에서도 일관된 것이다.
5솔라 — 종교개혁의 다섯 기둥
종교개혁의 핵심 원리는 다섯 개의 “오직(Sola)“으로 요약된다. 이것은 루터, 칼뱅, 쯔빙글리가 공유한 공통 고백이며, 이후 모든 개신교 전통의 기초가 되었다.
Sola Scriptura — 오직 성경
성경만이 신앙과 삶의 최종 권위다. 교황도, 전통도, 공의회도 성경 위에 설 수 없다. 이것은 전통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을 성경에 비추어 검증해야 한다는 원리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 디모데후서 3:16
Sola Fide — 오직 믿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칭의)은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 행위, 공덕, 면죄부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받는 유일한 통로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로마서 1:17
Sola Gratia — 오직 은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다.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가 구원에 기여하는 바는 없다. 은혜는 인간이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선물이다.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 에베소서 2:8-9
Solus Christus — 오직 그리스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성인, 마리아, 교황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 디모데전서 2:5
Soli Deo Gloria — 오직 하나님께 영광
모든 것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구원도, 교회도, 인간의 삶 전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칼뱅이 자신의 문장(紋章)에 새긴 모토 — 불타는 심장을 하나님께 바치는 손 — 가 이 원리를 상징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 고린도전서 10:31
이 다섯 “오직”은 중세 교회가 쌓아올린 것을 걷어냈다. 성경 더하기 전통이 아니라 오직 성경. 믿음 더하기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 은혜 더하기 공덕이 아니라 오직 은혜. 그리스도 더하기 성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하나님 더하기 교회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영광. 종교개혁은 “더하기”를 제거한 운동이었다.
천주교의 대응 — 반종교개혁과 내부 개혁
종교개혁에 대한 천주교의 대응은 단순한 거부가 아니었다. 이 시기를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천주교 학자들은 “천주교 개혁(Catholic Reformation)“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 실제로 내부 개혁의 측면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트리엔트 공의회 (1545–1563)
천주교의 가장 중요한 대응은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ent)였다. 18년간 세 차례에 걸쳐 소집된 이 공의회는 개신교의 도전에 대해 천주교의 입장을 명확히 정리했다.
교리적 재확인. 트리엔트 공의회는 종교개혁이 부정한 핵심 교리를 재확인했다.
- 성경과 전통은 동등한 권위를 가진다 (성경만이 아니다)
- 칭의는 믿음만이 아니라 믿음과 행위의 협력으로 이루어진다
- 7성례는 모두 유효하다
- 화체설은 참된 교리다
- 연옥은 존재하며 면죄(대사)는 유효하다
내부 개혁. 동시에 트리엔트 공의회는 중세 말기 교회의 실제적 부패를 시정하는 개혁 조치도 단행했다.
- 성직 매매 금지
- 주교의 거주 의무 강화 (자기 교구에 살아야 함)
- 사제 교육을 위한 신학교(seminarium) 설립 의무화
- 면죄부 남용 규제
예수회 — 새로운 군대
1540년, 에스파냐 출신의 이냐시오 데 로욜라(1491–1556)가 설립한 예수회(Societas Iesu)는 천주교 개혁의 첨병이 되었다. 예수회는 엄격한 훈련, 교육, 해외 선교에 집중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인도와 일본까지 선교했고, 마테오 리치는 중국에서 활동했다. 예수회가 세운 학교와 대학은 유럽 전역에서 천주교의 지적 수준을 끌어올렸다.
종교전쟁의 시대
종교개혁은 불가피하게 정치적·군사적 갈등을 동반했다. 독일에서는 개신교 영주와 천주교 황제 사이의 전쟁이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일단락되었다 — “그 지역의 종교는 그 영주의 종교를 따른다(cuius regio, eius religio)“는 원칙이 확립된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위그노 전쟁(1562–1598)이 벌어졌고,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수천 명의 위그노가 학살당했다.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 전쟁(1568–1648)을 치렀다. 종교 갈등은 17세기 30년 전쟁(1618–1648)까지 이어져 유럽을 황폐화시켰다.
이 전쟁들은 종교개혁의 비극적 측면이다. 진리를 위한 싸움이 수많은 사람의 피를 요구했다.
오해와 진실
“루터가 95개 조항을 교회 문에 못 박았다는 것은 사실인가?”
이것은 종교개혁의 가장 유명한 장면이지만, 역사적으로는 확실하지 않다.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에 마인츠 대주교에게 편지를 보내 면죄부 문제를 제기하고 95개 조항을 동봉한 것은 확인되는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 문에 직접 못을 박았는지에 대해서는 당대의 직접적 증거가 부족하다. 이 이야기는 루터 사후에 동료 멜란히톤이 기록한 것으로, 멜란히톤 자신은 1517년 당시 비텐베르크에 있지 않았다. 다만 교회 문에 학술 토론 제안을 게시하는 것은 당시 대학 도시의 일반적 관행이었으므로, 가능성은 충분하다. 확실한 것은 95개 조항이 인쇄술을 통해 급속히 퍼졌다는 사실이며, 그것이 더 중요하다.
“종교개혁은 교회를 분열시킨 것 아닌가?”
분열은 사실이다. 종교개혁 이후 서방 기독교는 천주교와 개신교로 나뉘었고, 개신교 내부도 여러 전통으로 분화했다. 종교개혁자들 자신은 분열을 원하지 않았다 — 그들이 원한 것은 개혁이었지 분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교리적 차이가 너무 깊었고, 양측 모두 양보할 수 없는 지점에 서 있었다.
이 분열이 비극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분열한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진리의 왜곡 위에 유지되는 통합이 참된 일치인가, 아니면 진리를 회복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있는 것인가 — 이것은 오늘날에도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
“칼뱅은 세르베투스를 화형시킨 잔인한 사람 아닌가?”
1553년, 삼위일체를 부정한 미카엘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서 화형당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칼뱅이 이 처형을 지지한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칼뱅의 가장 어두운 오점이며, 현대적 기준에서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역사적 맥락은 알아야 한다. 16세기에 이단 처형은 천주교와 개신교를 막론하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던 관행이었다. 세르베투스는 천주교 측에서도 이미 사형 판결을 받은 상태였다. 칼뱅은 화형 대신 참수를 요청했으나 제네바 시의회가 거부했다. 이 사실이 칼뱅을 면죄하지는 않지만, 그를 유독 잔인한 인물로 묘사하는 것은 16세기의 맥락을 무시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성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시대의 한계 안에 있던 사람이었고, 때로는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다. 그러나 그들이 회복한 복음의 진리는 그들 개인의 결함보다 크다.
현재는 어디에 있나
제네바 종교개혁 기념비(Mur des Réformateurs). 1909년, 칼뱅 탄생 400주년과 제네바 아카데미 설립 350주년을 기념하여 건립되었다. 중앙에 기욤 파렐, 장 칼뱅, 테오도르 베자, 존 녹스의 거대한 석상이 서 있다. 사진: Ruth Nguyen,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종교개혁이 남긴 유산은 오늘날 전 세계 약 9억 명의 개신교 그리스도인에게 살아 있다. 루터교, 개혁교회(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성공회 — 이 모든 개신교 전통은 종교개혁에 뿌리를 두고 있다.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은 현대 독일어의 기초가 되었고, 성경을 모국어로 읽는다는 원칙은 전 세계 수천 개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는 운동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성경은 약 3,600개 이상의 언어로 부분 번역되어 있다.
5솔라의 원리는 개신교 신학의 DNA로 남아 있다. 물론 개신교 내부에서도 이 원리들의 해석과 적용은 다양하며, 이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관계도 변화하고 있다. 1999년, 루터교세계연맹과 천주교가 「칭의에 관한 공동선언(Joint Declaration o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에 서명하여 칭의 교리에 대한 상당한 합의에 도달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분열을 완전히 치유한 것은 아니지만, 500년간의 벽에 균열이 생긴 것은 분명하다.
매년 10월 31일, 개신교회들은 종교개혁 기념일을 지킨다. 그날은 루터가 95개 조항을 내건 날이자, 복음이 다시 복음으로 선포되기 시작한 날이다.
종교개혁은 하나의 건물을 허물고 다른 건물을 세운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묻혀 있던 기초를 다시 드러낸 사건이었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 — 이것은 새로운 발명이 아니라, 바울이 로마서에서 선포하고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했던 것의 재발견이었다.
그런데 종교개혁이 열어젖힌 문은 개혁자들이 의도한 것보다 훨씬 넓었다. “오직 성경”이라는 원칙은 놀라운 자유를 주었지만, 동시에 하나의 질문을 낳았다 — 누가, 어떻게 성경을 해석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하나가 아니었기에, 개신교는 루터교, 개혁교회, 침례교, 감리교, 오순절 교회로 분화해 갔다. 그 분화는 약점인가, 아니면 복음이 다양한 토양에서 꽃피운 증거인가? 이 물음을 품지 않으면, 오늘 내가 다니는 교회가 어디서 왔고 왜 이 모습인지를 영영 알 수 없다.
개혁주의의 견해
이 글의 본문은 종교개혁의 역사를 가능한 한 중립적으로 서술하려 했다. 그러나 이 블로그는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며, 종교개혁은 우리 신앙의 뿌리 그 자체이다. 이 섹션에서는 그 고백을 솔직히 드러낸다.
이신칭의에 대하여. 개혁주의는 이신칭의(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음)를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교리(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로 고백한다. 루터의 표현이지만, 칼뱅도 동의했다. 이것이 무너지면 복음이 무너진다. 트리엔트 공의회가 “오직 믿음으로의 칭의”를 정죄한 것은, 개혁주의의 관점에서 복음 자체에 대한 정죄였다. 바울은 분명히 말했다 —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로마서 3:28). 이 진리를 회복한 것이 종교개혁의 가장 위대한 공헌이다.
오직 성경에 대하여. 개혁주의는 성경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최종 권위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전통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다 — 개혁주의는 초대교회의 신경과 공의회 결정을 존중한다. 그러나 어떤 전통도, 어떤 인간의 권위도 성경 위에 설 수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장 10항은 이렇게 고백한다 — “모든 종교적 논쟁에서 최고의 판관은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칼뱅과 제네바에 대하여. 칼뱅의 제네바는 완벽한 사회가 아니었다. 세르베투스 사건은 칼뱅의 깊은 오점이다. 그러나 칼뱅이 남긴 신학적 유산 —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고백,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체계적 해석, 교회와 국가의 구별, 직업을 통한 하나님 섬김 — 은 개혁주의의 기둥이다. 칼뱅의 문장에 새겨진 “나의 심장을 당신께 드립니다, 주여, 신속히 그리고 진심으로(Cor meum tibi offero, Domine, prompte et sincere)” — 이것이 개혁주의 신앙의 심장이다.
종교개혁의 분열에 대하여. 분열은 슬프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진리 위에 서지 않는 통합보다 진리를 택한다. 칼뱅은 이렇게 말했다 — “교회의 통합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진리의 희생 위에 세워져서는 안 된다.” 종교개혁이 교회를 나눈 것이 아니라, 복음을 왜곡한 것이 교회를 나눈 것이다. 개혁주의는 언젠가 모든 그리스도인이 복음의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되, 진리를 양보함으로써가 아니라 진리를 함께 고백함으로써 그 일치에 이르기를 소망한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 요한복음 1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