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뿌리를 찾아서 A7: 개신교의 분화 — 청교도에서 오순절까지

교회의 뿌리를 찾아서 A7: 개신교의 분화 — 청교도에서 오순절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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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합니다. 이 글은 최대한 중립적으로 작성됐으며, 개혁주의적 견해는 글 하단 ‘개혁주의의 견해’ 섹션에 별도 표기합니다.

왜 이렇게 교회가 많은가

A6편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하나의 질문을 남겼다 — “오직 성경”이라는 원칙이 놀라운 자유를 주었지만, 누가, 어떻게 성경을 해석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하나가 아니었기에 개신교는 분화해 갔다. 그 분화는 약점인가, 복음이 다양한 토양에서 꽃피운 증거인가?

오늘날 한국만 해도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오순절 교회 등 수십 개의 개신교 교단이 존재한다. 처음 교회에 온 사람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는데, 왜 이렇게 다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종교개혁 이후 400년의 여정을 따라가야 한다. 그 여정에는 교리서를 쌓아 올린 학자들, 심장이 뜨거워진 설교자들, 바다를 건넌 선교사들, 그리고 성령의 불길 속에서 방언을 말한 이름 없는 사람들이 있다.


타임라인 — 종교개혁 이후 400년

연도사건
1618–164830년 전쟁 — 유럽 종교전쟁의 종결
1620필그림 파더스, 메이플라워호로 북미 이주
1643–1649웨스트민스터 총회 — 신앙고백·교리문답 작성
1675슈페너, 「경건한 소원」 출판 — 경건주의 시작
1727모라비안 공동체, 헤른후트에서 부흥 경험
1738요한 웨슬리, 올더스게이트 체험 — “심장이 이상하게 뜨거워졌다”
1740–17421차 대각성 운동 (에드워즈, 휫필드)
1792윌리엄 캐리, 인도 선교 출발 — 근대 선교 운동의 시작
1800s2차 대각성 운동 — 캠프 미팅, 부흥회 문화 확산
1865허드슨 테일러, 중국 내지선교회 설립
1886학생자원운동(SVM) — “이 세대에 세계 복음화”
1906아주사 거리 부흥 — 오순절 운동의 기점
1910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
1910s–1920s근본주의-자유주의 논쟁 본격화

선교 확산 지도


정통주의와 경건주의 — 머리와 심장의 갈등

교리의 체계화 (17세기)

종교개혁 이후 한 세대가 지나자, 루터파와 개혁파 모두 자신들의 신학을 정밀하게 체계화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이 시기를 개신교 정통주의(Protestant Orthodoxy)라 부른다. 루터파에서는 1580년 「일치신조(Formula of Concord)」가, 개혁파에서는 1618–1619년 도르트 총회(Synod of Dort)가 예정론을 포함한 교리를 정리했다. 교리의 정밀화는 필요한 작업이었다 — 종교개혁이 열어젖힌 문으로 갖가지 해석이 쏟아져 들어왔기에, 무엇이 정통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가려야 했다.

그러나 교리가 정밀해질수록, 일부에서는 신앙이 머리의 지식으로 굳어가고 있다는 위기감이 커졌다. 바른 교리를 고백하면서도 삶은 변하지 않는 신자(信者)들, 교리 논쟁에는 열정적이면서 이웃의 고통에는 무관심한 교회 — 이것이 경건주의의 반동을 불렀다.

경건주의의 등장

1675년, 루터파 목사 필립 야코프 슈페너(1635–1705)는 「경건한 소원(Pia Desideria)」을 출판했다. 그는 교회에 여섯 가지 개혁을 제안했다 — 성경의 더 깊은 연구, 만인제사장직의 실천, 지식뿐 아니라 실천으로서의 신앙, 신학 논쟁에서의 사랑, 목회자의 경건한 삶, 설교의 영적 갱신. 슈페너는 교리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교리가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슈페너의 제자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1663–1727)는 할레 대학을 중심으로 경건주의를 제도화했다. 고아원, 학교, 약국을 세우며 신앙의 사회적 실천을 보여주었다. 경건주의는 또한 선교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 할레에서 훈련받은 선교사들이 인도까지 파송되었다.

경건주의에서 파생된 또 하나의 중요한 움직임은 모라비안 공동체다. 니콜라우스 폰 친첸도르프(1700–1760) 백작이 박해받는 후스파 후예들을 자신의 영지에 받아들여 세운 헤른후트 공동체는 1727년, 100년간 끊이지 않은 24시간 연쇄 기도를 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카리브해, 그린란드, 아프리카까지 복음을 전했고, 훗날 요한 웨슬리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청교도 운동 — 끝나지 않은 종교개혁

영국 종교개혁의 독특한 경로

영국의 종교개혁은 대륙과 달랐다. 헨리 8세(재위 1509–1547)가 교황과 결별한 것은 교리적 확신이 아니라 이혼 문제 때문이었다. 이후 에드워드 6세 때 개신교적 개혁이 진행되었으나, 메리 1세가 천주교를 복원하며 개신교도를 박해했다(“피의 메리”).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는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아 성공회(Anglican Church)를 정착시켰다 — 외형은 천주교에 가깝되, 교리는 개신교에 기울인 “중도(via media).”

청교도의 불만

이 타협에 만족하지 못한 이들이 있었다. 청교도(Puritans)는 성공회가 아직 “정화(purify)“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들은 주교제 대신 장로제를, 기도서 중심의 예배 대신 설교 중심의 예배를, 잔존하는 천주교적 요소의 완전한 제거를 요구했다. 청교도는 단일 교파가 아니라 성공회 안팎에서 개혁을 추구한 광범위한 운동이었다.

1643–1649년, 영국 내전 시기에 소집된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청교도 신학의 결정판을 만들어냈다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교리문답」, 「소교리문답」. 이 문서들은 이후 전 세계 장로교·개혁교회의 신앙적 기초가 되었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제1문

새 세계로

1620년, 종교적 자유를 찾아 102명이 메이플라워호에 올랐다. 이들은 성공회에서 아예 분리한 “분리주의” 청교도였다. 이후 1630년대에는 보다 온건한 청교도들이 대규모로 매사추세츠에 이주했다(“대이주”). 이들은 단순히 박해를 피한 것이 아니라, “언덕 위의 도시(a city upon a hill)” — 하나님의 뜻에 따른 이상적 공동체를 세우겠다는 비전을 품고 있었다.

청교도가 북미에 심은 씨앗은 미국 개신교의 뿌리가 되었다. 교육에 대한 열정(하버드, 예일이 목회자 양성을 위해 설립되었다), 개인의 양심에 대한 존중, 노동을 하나님 앞에서의 소명으로 보는 직업 윤리 — 이 모든 것이 청교도의 유산이다.


감리교와 웨슬리 형제 — “심장이 이상하게 뜨거워졌다”

요한 웨슬리 (1703–1791)

18세기 영국은 산업혁명의 초입에서 심각한 사회적 격변을 겪고 있었다. 교회는 대체로 상류층의 제도였고, 도시로 밀려든 노동자들은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버려져 있었다. 이 시기에 성공회 사제 요한 웨슬리가 등장했다.

웨슬리는 옥스퍼드에서 동생 찰스, 조지 휫필드 등과 함께 규칙적인 경건 생활을 실천하는 모임(“홀리클럽”)에 참여했다. 그러나 정작 웨슬리 자신은 구원의 확신이 없었다. 1738년 5월 24일, 런던 올더스게이트의 한 집회에서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듣던 중, 웨슬리는 기록한다 — “심장이 이상하게 뜨거워졌다”(I felt my heart strangely warmed). 이것이 그의 회심 체험이었다.

웨슬리 채플의 존 웨슬리 동상 — 런던 웨슬리 채플(Wesley’s Chapel) 앞의 존 웨슬리 동상. 1778년 웨슬리가 직접 설립한 이 예배당은 오늘날에도 감리교의 “모교회(Mother Church)“로 불린다. 사진: Paul the Archivist,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이후 웨슬리는 50년간 약 25만 마일을 여행하며 4만 번 이상 설교했다. 교회가 받아주지 않는 광부와 노동자들에게 야외 설교를 했고, 수천 명이 들판에 모여 복음을 들었다. 웨슬리는 성공회를 떠날 의사가 없었다 —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을 성공회 사제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세운 “반(班, class)” 모임과 순회 설교자 체계는 그의 사후 독립적인 교파, 즉 감리교(Methodist Church)로 발전했다.

웨슬리 신학의 특징

웨슬리의 신학은 칼뱅주의와 구별되는 몇 가지 강조점을 가졌다.

  • 선행 은혜(prevenient grace):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 이전에도 모든 인간에게 작용하여 복음에 응답할 가능성을 열어준다
  • 성화 강조: 칭의 이후의 삶, 즉 점진적으로 거룩해지는 과정을 강조했다. 웨슬리는 “완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 — 이 땅에서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 사회적 거룩: 개인의 경건이 사회적 책임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노예제 반대, 교도소 개혁, 빈민 교육에 적극적이었다

동생 찰스 웨슬리(1707–1788)는 6,000곡 이상의 찬송가를 작곡하여 감리교의 신학을 노래로 만들었다. “만 입이 내게 있으면” 등 오늘날에도 불리는 찬송 다수가 그의 작품이다.


대각성 운동 — 복음이 들판을 휩쓸다

1차 대각성 (1730s–1740s)

18세기 중반, 북미 식민지와 영국에서 거의 동시에 대규모 영적 각성이 일어났다. 미국에서 이 운동의 중심에 선 인물은 매사추세츠 노샘프턴의 목사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였다.

조나단 에드워즈 초상 — 프린스턴 대학교 소장 _조나단 에드워즈 초상. 헨리 오거스터스 루프(Henry Augustus Loop)가 조셉 배저(Joseph Badger)의 원본을 바탕으로 1860년에 그린 유화. 프린스턴 대학교 미술관 소장.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에드워즈는 1734년, 칭의에 관한 연속 설교를 통해 놀라운 회심의 물결을 목격했다. 그의 설교 “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 1741)“은 미국 문학사에서도 가장 유명한 설교로 꼽힌다.

영국에서 온 조지 휫필드(1714–1770)는 대서양을 7번 건너며 영국과 미국 양쪽에서 대각성을 이끌었다. 휫필드의 야외 설교에는 수만 명이 모였다. 벤저민 프랭클린조차 휫필드의 목소리가 얼마나 멀리까지 들리는지를 과학적으로 측정하려 했을 정도였다.

1차 대각성은 교파의 경계를 넘어 식민지 전체에 공통된 영적 경험을 만들어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것이 미국 독립의 정신적 기반을 제공했다고 본다 — 서로 다른 식민지의 사람들이 처음으로 하나의 경험을 공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2차 대각성 (1790s–1840s)

19세기 초, 더 광범위한 2차 대각성이 미국 전역을 휩쓸었다. 이 운동의 특징은 캠프 미팅 — 수천 명이 야외에 며칠간 천막을 치고 모여 설교를 듣고 회심하는 집회 — 이었다. 1801년 켄터키주 케인 릿지에서 열린 캠프 미팅에는 약 2만 명이 모였다.

2차 대각성은 미국 개신교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 침례교와 감리교의 폭발적 성장: 순회 설교자 체제를 갖춘 두 교파가 개척지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성장했다
  • 사회 개혁 운동: 노예제 폐지, 금주 운동, 여성 교육, 교도소 개혁 등이 각성 운동과 연결되었다
  • 새로운 교파와 운동의 탄생: 성결 운동(Holiness Movement)이 감리교에서 파생되어 후일 오순절 운동의 토양이 되었다

근대 선교 운동 — 땅 끝까지

윌리엄 캐리 (1761–1834)

18세기 말, 영국 침례교 목사 윌리엄 캐리는 한 가지 단순한 물음을 던졌다 —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사도 시대에만 유효한 것인가, 아니면 오늘의 교회에도 적용되는가?” 당시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전자라고 답했다. 그러나 캐리는 달랐다. 1792년, 그는 「이교도의 회심을 위한 수단의 사용에 관한 의무의 탐구」라는 소책자를 출판하고, 이듬해 인도로 떠났다.

윌리엄 캐리 초상 _윌리엄 캐리(1761–1834). “근대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 침례교 목사. 존 브라운 마이어스(John Brown Myers)의 1887년 저서에서 발췌.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_

캐리의 인도 선교는 근대 선교 운동의 상징적 출발점이 되었다. 그는 성경을 벵골어를 포함한 여러 인도 언어로 번역하고, 학교를 세우고, 사티(과부 분신) 관행에 반대하는 사회 운동에도 참여했다. 캐리의 유명한 격언이 전해진다 — “하나님께 큰 것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시도하라.

선교의 세기 (19세기)

캐리 이후, 19세기는 기독교 역사에서 선교의 세기가 되었다.

  • 허드슨 테일러(1832–1905)는 중국 내지선교회를 설립하고, 중국 복장을 입고 내륙 깊숙이 들어갔다. 서양식 선교가 아니라 현지 문화에 적응하는 선교의 선구자였다
  • 데이비드 리빙스턴(1813–1873)은 아프리카 탐험과 선교를 병행하며, 노예무역의 참상을 세계에 알렸다
  • 1886년, 미국 대학생들이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을 결성했다. “이 세대에 세계 복음화(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라는 표어 아래 수천 명의 젊은이가 선교에 헌신했다

19세기 말까지, 기독교는 유럽과 북미를 넘어 아시아, 아프리카, 태평양 군도에 뿌리를 내렸다. 한국에 복음이 도착한 것도 이 시기였다 — 1885년, 호러스 언더우드와 헨리 아펜젤러가 제물포에 상륙했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 마태복음 28:19-20


오순절 운동 — 성령의 불

아주사 거리 (1906)

20세기 초, 로스앤젤레스의 한 낡은 창고 건물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1906년, 아프리카계 미국인 설교자 윌리엄 시무어가 이끄는 아주사 거리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방언을 말하고, 신유를 체험하고, 인종과 계층의 벽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다. 집회는 3년간 거의 매일 계속되었다.

오순절 운동은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경험 — 성령 강림, 방언, 능력의 역사 — 이 오늘날에도 반복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당시 주류 개신교에 충격이었다.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는 방언과 신유 같은 은사가 사도 시대에 끝났다고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 확산

초기에 주류 교회로부터 배척당했던 오순절 운동은 20세기 중반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하나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 등 오순절 교단이 조직되었고, 1960년대부터는 은사 운동(Charismatic Movement)이 기존 교단(성공회, 천주교, 루터교 등) 안에서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오늘날 오순절·은사주의 그리스도인은 전 세계에 약 6억 명으로 추산되며, 특히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기독교 운동이다. 20세기 기독교의 무게중심이 유럽·북미에서 남반구(Global South)로 이동한 데에는 오순절 운동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자유주의 vs 근본주의 — 성경을 둘러싼 전쟁

자유주의 신학의 등장 (19세기)

19세기 독일에서 시작된 성경 비평학(Higher Criticism)은 성경을 다른 고대 문헌처럼 역사적·문학적으로 분석했다.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1768–1834)는 종교의 본질을 교리가 아니라 “절대 의존의 감정”에서 찾았고, 율리우스 벨하우젠(1844–1918)은 모세오경이 여러 저자에 의해 편집되었다는 문서가설을 제시했다. 아돌프 폰 하르낙(1851–1930)은 기독교의 핵심을 교리적 체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로 요약하려 했다.

이러한 접근은 자유주의 신학(Liberal Theology)으로 발전했다. 자유주의 신학은 과학과 이성의 시대에 기독교를 재해석하려 했으나, 성경의 초자연적 요소(기적, 부활, 예언의 성취)를 축소하는 경향이 있었다.

근본주의의 반응 (20세기 초)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발로 근본주의(Fundamentalism) 운동이 일어났다. 1910–1915년, 「근본(The Fundamentals)」이라는 소책자 시리즈가 출판되어 성경의 무오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대속적 속죄, 육체적 부활, 재림 등을 기독교의 양보할 수 없는 “근본”으로 선언했다.

1920년대에는 이 갈등이 미국 문화 전면에 터졌다. 1925년 테네시주의 스코프스 재판 —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친 교사를 재판한 사건 — 은 근본주의와 근대 과학의 충돌을 상징했다.

복음주의의 등장

근본주의가 반지성적이고 분리주의적인 경향을 보이자, 1940–1950년대에 복음주의(Evangelicalism)라는 제3의 길이 등장했다. 빌리 그레이엄(1918–2018)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복음주의는 성경의 권위와 개인적 회심을 강조하면서도, 학문적 참여와 문화적 관여를 포기하지 않았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개신교 흐름이다.


오해와 진실

개신교의 분열은 종교개혁의 실패를 보여주는 것 아닌가?

분열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히 “실패”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천주교와 동방정교회도 내부에 수도회, 전례 전통, 신학 학파 등 다양한 흐름이 존재한다 — 다만 하나의 제도적 우산 아래 있을 뿐이다. 개신교의 경우, “오직 성경”의 원칙은 해석의 다양성을 허용했고, 교황이라는 단일 권위가 없었기에 그 다양성이 교파의 분화로 나타난 것이다. 분화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분화가 분쟁과 분열로 이어질 때가 문제다. 바울의 고린도전서 1장은 분열을 경고하지만, 사도행전은 복음이 다양한 문화적 토양에 뿌리내리는 것을 축복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오순절 운동은 정통 기독교에서 벗어난 것 아닌가?

오순절 운동에 대한 평가는 교파마다 크게 다르다. 비판자들은 체험 중심의 신앙이 성경적 교리를 약화시킨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오순절 운동의 주류는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 성경의 권위 등 역사적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고백한다. 오순절 운동이 비서구권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은, 이 운동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근대 선교 운동은 서구 제국주의와 결탁한 것 아닌가?

이것은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비판이다. 19세기 선교 운동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 확장과 시기적으로 겹친 것은 사실이며, 일부 선교사들이 서양 문화를 복음과 동일시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전체를 한 붓으로 칠할 수는 없다. 허드슨 테일러는 서양식 선교를 거부하고 현지 문화에 적응했고, 윌리엄 캐리는 인도의 억압적 관습에 맞서 싸웠다. 리빙스턴은 노예무역에 반대했다. 무엇보다, 선교사들이 떠난 뒤에도 토착 교회가 독자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복음이 제국주의의 부산물이 아님을 보여준다. 오늘날 한국, 나이지리아, 브라질 교회는 서구로 역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현재는 어디에 있나

400년의 여정을 거쳐, 개신교의 지형은 놀랍도록 다양해졌다. 루터교, 개혁교회(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성결교, 오순절 교회, 그리고 이 범주에 깔끔히 들어맞지 않는 수많은 독립 교회들이 존재한다. 전 세계 개신교 그리스도인은 약 9억 명으로 추산된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기독교의 무게중심 이동이다. 1900년에 세계 그리스도인의 80% 이상이 유럽과 북미에 살았다. 2025년 현재, 그리스도인의 다수는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에 있다. 한국은 전체 인구의 약 20%가 개신교 그리스도인으로,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개신교 국가 중 하나다.

에큐메니컬 운동(교회 일치 운동)도 진행 중이다. 1910년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에서 시작된 이 흐름은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 창설로 이어졌다. 그러나 교리적 차이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일치를 향한 여정은 더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토착 기독교는 서구 선교사들이 전해준 것과는 다른 색채를 띠며, 복음이 각 문화의 토양에서 어떤 열매를 맺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종교개혁은 하나의 문을 열었다. 그 문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같은 성경을 읽으면서도 서로 다른 것을 보았다 — 어떤 이는 언약의 하나님을, 어떤 이는 뜨거워진 심장을, 어떤 이는 성령의 불을 보았다. 그들은 때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고, 때로 서로를 정죄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2천 년의 교회사를 한 줄로 요약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 교회는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존속했고, 복음은 어떤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남은 질문은 이것이다: 이 역사가 낳은 각 교파는 무엇을 믿고, 어떻게 예배하며, 왜 그런 모습이 되었는가? B부에서는 그 지형도를 펼쳐본다.


개혁주의의 견해

이 글의 본문은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의 분화를 가능한 한 중립적으로 서술했다. 그러나 이 블로그는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며, 이 역사에 대한 개혁주의적 평가를 이 섹션에서 솔직히 드러낸다.

교리의 체계화에 대하여. 17세기 정통주의가 교리를 체계화한 것은 필수적인 작업이었다. 도르트 총회(1618–1619)가 확인한 은혜의 교리 — 전적 부패, 무조건적 선택, 제한적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 — 는 종교개혁의 핵심을 보존한 것이다. 경건주의가 제기한 “삶의 경건”이라는 문제의식은 타당하지만, 교리를 경시하는 경건은 한 세대 뒤에 자유주의로 흘러갈 위험이 있다. 개혁주의는 “바른 교리와 뜨거운 경건”이 양자택일이 아니라 하나여야 한다고 고백한다.

웨슬리와 알미니우스주의에 대하여. 웨슬리의 복음 전도에 대한 열정과 사회적 관심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웨슬리의 “선행 은혜”와 “완전 성화” 교리에 동의하지 않는다. 인간의 의지가 은혜에 “협력”한다는 알미니우스주의적 구원론은 “오직 은혜”의 원칙을 약화시킬 수 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로마서 9:16

대각성 운동에 대하여. 조나단 에드워즈는 개혁주의 전통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한 사람이다. 에드워즈는 부흥이 진짜인지 거짓인지를 분별하기 위해 「신앙감정론(Religious Affections)」을 저술했다. 감정적 체험 자체가 회심의 증거가 아니라, 참된 회심은 삶의 열매로 입증된다는 원칙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오순절 운동에 대하여. 개혁주의는 성령의 사역을 존중하되, 방언·신유 등의 표적 은사(sign gifts)가 사도 시대 이후 중단되었다는 은사중지론(cessationism)을 전통적으로 지지해 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장 1항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던 이전의 방식들은 이제 중단되었다”고 고백한다. 오순절 운동의 성장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현실이지만, 체험이 교리보다 앞서는 경향은 개혁주의의 관점에서 경계해야 할 지점이다.

선교에 대하여. 개혁주의는 선교를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의 실행으로 이해한다.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는 것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모으시는 과정이다. 캐리, 테일러, 그리고 한국에 온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헌신은 이 주권적 계획 안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신 도구였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 사도행전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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