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블로그는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합니다. 이 글은 최대한 중립적으로 작성됐으며, 개혁주의적 견해는 글 하단 ‘개혁주의의 견해’ 섹션에 별도 표기합니다.
면죄부라는 이름으로
A4편에서 우리는 동서 대분열의 이야기를 마쳤다. 분열 이후 서방 교회는 혼자만의 길을 걸었다. 교황의 권력은 더욱 강해졌고, 수도원은 유럽 문명을 보존했으며, 십자군은 성지를 향해 출발했다. 그리고 바로 그 안에서, 훗날 교회를 다시 한번 뒤흔들 폭발물이 조용히 만들어지고 있었다. 면죄부라는 이름으로.
“중세 교회”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어두운 성당, 면죄부를 파는 수도사, 마녀재판 — 아마 많은 사람이 이런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중세 교회에는 분명한 빛이 있었고, 그 빛 안에 깊은 그림자가 함께 있었다. 어둠만 보면 역사를 오해하고, 빛만 보면 역사를 미화한다. 둘 다 봐야 한다.
약 천 년에 걸친 중세(5세기~15세기)를 한 편의 글로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글에서는 서방 교회를 중심으로, 수도원 운동이라는 빛, 십자군이라는 그림자, 그리고 면죄부라는 폭발물 — 이 세 흐름을 따라간다.
천 년의 지도 — 중세 교회 타임라인
| 연도 | 사건 |
|---|---|
| 529 | 베네딕트, 몬테카시노 수도원 설립 — 서방 수도원 운동의 시작 |
| 800 | 카롤루스 대제 황제 대관 — 교황과 세속 권력의 결합 |
| 910 | 클뤼니 수도원 설립 — 수도원 개혁 운동 |
| 1054 | 동서 대분열 (A4편 참조) |
| 1096–1099 | 제1차 십자군 — 예루살렘 함락 |
| 1098 | 시토 수도회 설립 (시토회) |
| 1147–1149 | 제2차 십자군 — 실패 |
| 1189–1192 | 제3차 십자군 — 사자왕 리처드 vs 살라딘 |
| 1202–1204 | 제4차 십자군 —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 |
| 1209 | 프란체스코회 설립 |
| 1215 | 제4차 라테란 공의회 — 교황권의 절정 |
| 1216 | 도미니코회 설립 |
| 1302 |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 「우남 상탐(Unam Sanctam)」 발표 |
| 1309–1377 | 아비뇽 유수 — 교황청이 프랑스로 이전 |
| 1320s–1384 | 존 위클리프의 생애 |
| 1378–1417 | 서방 대분열 — 교황이 2명(한때 3명) |
| 1415 | 얀 후스,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화형 |
| 1517 | 루터의 95개 조항 — 종교개혁의 시작 (A6편) |
빛 — 수도원, 문명의 방주
”기도하고 일하라”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476년) 뒤, 서유럽은 혼란에 빠졌다. 게르만 부족들이 옛 로마 영토를 분할했고, 도시는 쇠퇴했으며, 교육과 문화는 단절 위기에 놓였다. 이 암흑 속에서 문명의 등불을 지킨 것이 바로 수도원이었다.
529년경, 누르시아의 베네딕트(Benedictus, 약 480–547)는 로마 남쪽 몬테카시노 산에 수도원을 세우고 「베네딕트 규칙서(Regula Benedicti)」를 작성했다. 이 규칙서의 정신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 수도사의 하루는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고(시간 전례), 나머지 시간에는 손으로 일하며, 성경을 읽는 것으로 채워졌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이탈리아). 529년경 누르시아의 베네딕트가 설립한 이 수도원은 서방 수도원 운동의 출발점이다. 여러 차례 파괴와 재건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 사진: ThePhotografer,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이것이 왜 중요한가? 수도원은 단순한 종교 공동체가 아니었다. 중세 유럽에서 수도원이 수행한 역할은 놀라울 정도로 폭넓었다.
필사본 보존. 수도사들은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헌과 성경 사본을 손으로 필사했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 이 작업이 없었다면 서양 문명의 고전 상당수가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키케로, 베르길리우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수도원 필사실(scriptorium) 덕분이다.
농업과 기술. 베네딕트 규칙서가 강조한 “노동”은 농업 기술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수도사들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관개 기술을 발전시켰으며, 포도주 양조와 양봉, 약초 재배 등을 체계화했다. 중세 유럽의 농업 혁명에 수도원이 기여한 바는 적지 않다.
교육과 구제. 수도원은 사실상 유일한 교육 기관이었다. 미래의 성직자뿐 아니라 귀족과 평민의 자녀도 수도원에서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 또한 수도원은 빈민 구제, 순례자 숙소, 병원 운영을 담당했다. 중세의 사회복지는 대부분 교회, 특히 수도원을 통해 이루어졌다.
13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어다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 야고보서 5:13-14
개혁과 새로운 물결
베네딕트 수도원은 시간이 흐르면서 세속화되기도 했다. 부유해진 수도원은 초기의 엄격함을 잃었고, 수도원장이 봉건 영주처럼 행세하는 경우도 생겼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클뤼니 개혁(910년~). 부르고뉴의 클뤼니 수도원은 세속 권력의 간섭을 배제하고 베네딕트 규칙서의 원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이끌었다. 클뤼니 수도원은 교황에게만 직속되어 지역 영주나 주교의 통제를 받지 않았으며, 전성기에는 유럽 전역에 1,000개 이상의 산하 수도원을 거느렸다.
시토회(1098년~). 클뤼니마저 화려해지자, 더 엄격한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시토(Cîteaux)에 새로운 수도회를 세웠다. 시토회는 장식을 배격하고 육체노동을 강조했으며, 클레르보의 베르나르(Bernard of Clairvaux, 1090–1153)라는 걸출한 지도자를 배출했다. 베르나르는 12세기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로, 교황과 왕에게 직언하고, 이단을 논박하며, 제2차 십자군을 설교로 촉발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탁발 수도회(13세기). 아시시의 프란체스코(1181/82–1226)와 도밍고 데 구스만(1170–1221)은 새로운 유형의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코회는 수도원에 머물지 않고 도시로 나가 설교하고 구걸하며 살았다(탁발, mendicant). 프란체스코는 청빈을 그리스도를 닮는 길로 보았고, 도미니코회는 학문적 설교와 이단 논박에 집중했다.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도미니코회 소속이었다.
대학의 탄생
수도원의 교육 전통에서 대학이 싹텄다. 볼로냐 대학(1088년), 파리 대학(1150년경), 옥스퍼드 대학(1167년경)은 모두 교회와 깊이 연관되어 설립되었다. 이 대학들에서 스콜라 철학(Scholasticism) —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추구하는 학문적 전통 — 이 꽃피웠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1033–1109)는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라는 모토로 신학적 사유의 길을 열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기독교 신학에 통합하여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이라는 기념비적 저작을 남겼다. 아퀴나스에게 이성과 신앙은 모순되지 않았다 — 둘 다 하나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이었다.
수도원, 대학, 스콜라 철학 — 이것이 중세 교회가 남긴 빛이다. 어둠의 시대로 흔히 묘사되는 중세에, 교회는 문명의 방주 역할을 했다.
그림자 — 십자군, 하나님의 이름으로 벌인 전쟁
성지를 향하여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연설했다. 셀주크 튀르크가 성지 예루살렘과 소아시아를 점령하자, 비잔틴 황제 알렉시오스 1세가 서방에 군사 지원을 요청한 것이 발단이었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무덤을 되찾자고 호소했고, 군중은 “하나님이 원하신다!(Deus vult!)”고 외쳤다.
이것이 십자군 전쟁(1096–1291)의 시작이었다. 약 200년간 여러 차례 원정이 이어졌다. 종교적 열정, 순례지 수호의 열망, 모험과 영토 확장의 욕심, 면죄(죄의 사면) 약속 — 이 모든 것이 뒤섞여 수십만 명이 성지를 향해 출발했다.

주요 십자군 — 네 번의 원정
제1차 십자군(1096–1099)은 유일한 “성공”이었다. 프랑스·이탈리아·독일 등지에서 모인 기사들은 소아시아를 횡단하여 안디옥을 점령하고, 1099년 7월 15일 예루살렘을 함락했다. 이 과정에서 도시의 무슬림과 유대인에 대한 학살이 벌어졌다. 십자군은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고, 중동 해안에 여러 십자군 국가를 건설했다.
“1099년 7월 15일 십자군의 예루살렘 점령” — 에밀 시뇰(Émile Signol), 1847년, 베르사유 궁전 소장.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제2차 십자군(1147–1149)은 참담한 실패였다. 에데사 백국이 무슬림에게 함락되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가 설교로 원정을 촉발했다. 프랑스의 루이 7세와 신성로마제국의 콘라트 3세가 참여했으나, 다마스쿠스 공성에 실패하고 아무 성과 없이 돌아갔다.
제3차 십자군(1189–1192)은 전설이 되었다. 1187년 이슬람의 살라딘(살라흐 앗딘)이 예루살렘을 탈환하자,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 1세, 프랑스의 필리프 2세,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바르바로사)가 원정에 나섰다. 바르바로사는 도중에 익사했고, 필리프는 일찍 귀국했으며, 리처드만 남아 살라딘과 격전을 벌였다. 결국 예루살렘은 되찾지 못했지만, 기독교인의 예루살렘 순례를 허용하는 휴전 협정을 맺었다.
제4차 십자군(1202–1204)은 치욕이었다. A4편에서 자세히 다루었듯, 이 원정은 성지가 아니라 같은 기독교인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하는 것으로 끝났다. 베네치아 상인들의 이해관계와 비잔틴 내부 정치가 얽히면서 십자군은 방향을 틀었고, 동방 기독교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십자군이 남긴 것
십자군의 유산은 복잡하다. 동서 교역이 활성화되었고, 아랍 세계의 학문·기술이 유럽에 전해졌으며, 기사 문화와 성곽 건축이 발전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컸다.
이슬람 세계와 기독교 세계 사이에 깊은 불신과 적대감이 새겨졌다. “십자군”이라는 단어는 오늘날까지 중동에서 서구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유대인 학살도 빈번했다 — 특히 제1차 십자군 때 라인란트 유대인 공동체가 큰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은 동서 교회의 화해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작된 전쟁이 하나님의 뜻과 얼마나 거리가 멀었는지, 역사가 증거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하인들이 싸워 나를 유대인들에게 넘기지 아니하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 요한복음 18:36
그림자의 심화 — 교황권의 비대화와 부패
절대 권력
중세 교황권은 인노켄티우스 3세(재위 1198–1216) 때 절정에 달했다. 그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ius Christi)“로 선언하고, 왕들에 대한 파문과 성무 정지(interdict) 권한을 적극 행사했다. 영국의 존 왕, 프랑스의 필리프 2세를 굴복시켰으며,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년)를 소집하여 교회의 모든 영역에 대한 규범을 제정했다. 이 공의회에서 화체설(transsubstantiatio) — 성찬의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피로 변한다는 교리 — 이 공식 교리로 확정되었다.
1302년,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칙서 「우남 상탐(Unam Sanctam)」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 “모든 인간이 로마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이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교황권은 더 이상 영적 권위에 머물지 않고, 세속 권력 위에 군림하려 했다.
아비뇽 유수와 서방 대분열
그러나 절대 권력의 주장과 현실은 달랐다. 1303년, 보니파키우스 8세는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와의 권력 다툼 끝에 군사에게 체포당하는 굴욕을 겪었고, 얼마 뒤 사망했다.
1309년, 교황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 왕의 압력으로 교황청을 로마에서 프랑스 남부 아비뇽으로 옮겼다. 이후 약 70년간(1309–1377) 교황은 아비뇽에 머물렀다. 이 시기를 흔히 아비뇽 유수(Babylonian Captivity of the Papacy)라고 부른다 —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것에 빗댄 표현이다. 아비뇽의 교황들은 프랑스 왕의 영향력 아래 있었고, 교황의 보편적 권위에 대한 신뢰가 크게 흔들렸다.
137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가 로마로 돌아왔지만, 그가 사망한 뒤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1378년, 로마에서 선출된 교황과 아비뇽에서 선출된 교황이 동시에 존재하는 서방 대분열(Western Schism, 1378–1417)이 시작된 것이다. 한때는 세 명의 교황이 동시에 정통성을 주장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1417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마르티누스 5세가 유일한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대분열은 종결되었지만, 교황의 권위에 입은 상처는 깊었다.
이단 심문
교황권의 강화는 이단 심문(Inquisition)이라는 어두운 제도를 낳았다. 12세기 남프랑스에서 카타리파(알비파)가 확산되자, 인노켄티우스 3세는 알비 십자군(1209–1229)을 일으켜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후 1231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이단 심문을 제도화하여 도미니코회에 맡겼다.
이단 심문은 본래 교리적 오류를 바로잡기 위한 교회 재판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고문과 화형을 동반하는 공포의 제도로 변질되었다. 발도파 — 리옹의 상인 발도(피에르 발도, 1140경–1205경)가 시작한 청빈 운동으로, 평신도 성경 읽기와 설교를 강조했다 — 도 이단으로 정죄되어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발도파는 종교개혁 이전에 성경의 권위를 주장한 선구적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폭발물 — 면죄부, 구원을 파는 시장
연옥과 면죄부의 논리
중세 교회의 가장 논쟁적인 유산 중 하나가 면죄부(Indulgentia)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중세 고해성사의 구조를 알아야 한다.
중세 천주교 신학에 따르면, 죄를 지은 신자는 고해성사를 통해 영원한 형벌(지옥)은 면제받을 수 있으나, 현세적 형벌(temporal punishment) — 이 세상이나 연옥(煉獄, Purgatorium)에서 받아야 할 정화의 고통 — 은 여전히 남는다. 면죄부란 바로 이 현세적 형벌을 면제해 주는 교회의 공식 문서였다.
면죄부의 신학적 근거는 공덕의 보고(thesaurus meritorum) 교리였다. 그리스도와 성인들이 쌓은 무한한 공덕이 교회에 축적되어 있으며, 교황이 그 보고의 열쇠를 가지고 있으므로, 교황의 권한으로 이 공덕을 신자들에게 분배하여 현세적 형벌을 면제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초기 면죄부는 십자군 참전이나 성지 순례 같은 특정 행위에 대해 부여되었다. 제1차 십자군 때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십자군에 참전하면 고해에서 부과된 속죄 행위를 면제한다”고 선언한 것이 면죄부 확산의 중요한 계기였다.
구원의 상업화
문제는 면죄부가 점차 돈으로 살 수 있는 상품이 되어갔다는 것이다. 특히 15세기 이후, 교황청의 재정 수요(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 비용 등)가 커지면서 면죄부 판매는 노골적인 모금 수단이 되었다.
도미니코회 수사 요한 테첼(Johann Tetzel, 1465–1519)은 면죄부 판매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는 이렇게 설교했다고 전해진다 — “헌금 궤에 동전이 떨어져 쨍 하고 울리는 순간, 연옥에서 영혼이 뛰쳐나온다(Sobald das Geld im Kasten klingt, die Seele aus dem Fegfeuer springt).” 이 말이 정확한 인용인지는 논란이 있으나, 면죄부 판매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이미 사망한 가족의 연옥 형벌까지 면제받을 수 있다는 주장은 가난한 신자들의 주머니를 열게 만들었다.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교회의 문서에, 신앙이 아니라 금화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 에베소서 2:8-9
종교개혁의 아침별들
존 위클리프 (1320s–1384)
중세 교회의 부패를 정면으로 비판한 이들이 있었다. 영국 옥스퍼드의 신학자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는 그 첫 번째 인물이다.
위클리프는 교황의 세속 권력을 비판하고, 수도원의 부와 성직 매매를 공격했다. 무엇보다 그는 성경이 신앙의 최종 권위라고 주장했다. 교황도, 공의회도, 전통도 성경 위에 설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화체설을 부정하고, 교회의 참된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라고 가르쳤다.
위클리프의 가장 혁명적인 행동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당시 성경은 라틴어(불가타 역)로만 읽을 수 있었고, 평신도는 성경에 직접 접근할 수 없었다. 위클리프는 “쟁기질하는 소년도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추종자들은 롤라드(Lollards)라 불렸으며, 위클리프 사후에도 영국에서 비밀리에 활동을 이어갔다.
위클리프는 생전에 화형을 면했으나, 사후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1428년에는 그의 유해가 파내어져 불태워졌다. 죽은 뒤에도 정죄될 만큼, 그의 사상은 위험한 것이었다.
얀 후스 (1369–1415)
위클리프의 사상은 영국 해협을 건너 보헤미아(오늘날 체코)에 도달했다. 얀 후스(Jan Hus)는 프라하 대학의 학장이자 베들레헴 예배당의 설교자로, 위클리프의 저작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
후스는 성직자의 부패와 면죄부 판매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교회의 참된 머리는 그리스도이지 교황이 아니며, 성경이 신앙의 최고 규범이라고 설교했다. 또한 평신도에게 성찬의 떡뿐 아니라 잔(포도주)도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당시 천주교에서는 사제만 잔을 받았다.
1414년, 후스는 콘스탄츠 공의회에 소환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가 안전 통행증을 발급했지만, 도착한 후스는 즉시 감금되었다. 그리고 1415년 7월 6일,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거부한 뒤 화형에 처해졌다.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화형당하는 얀 후스 — 디볼트 실링의 「슈피처 연대기(Spiezer Chronik)」(1485년) 삽화. 후스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기를 거부하고 순교했다.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후스는 화형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 “오늘 당신들은 거위(후스는 체코어로 ‘거위’라는 뜻) 한 마리를 굽는다. 그러나 100년 뒤에는 당신들이 구울 수 없는 백조가 올 것이다.” 이 “백조”가 마틴 루터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는 전설이지만, 실제로 후스가 화형당한 지 102년 뒤인 1517년, 루터가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 성 교회 문에 내건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위클리프와 후스는 “종교개혁의 아침별”이라 불린다. 그들은 아직 밤이 깊었을 때 떠오른 별이었다. 동이 트려면 10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오해와 진실
“중세는 순전한 암흑기였는가?”
이것은 르네상스 시대와 계몽주의 시대에 만들어진 편견이다. 중세는 분명 고대 로마의 도시 문명이 쇠퇴한 시기였지만, 동시에 수도원을 통한 문명 보존, 대학의 탄생, 스콜라 철학의 발전, 고딕 건축의 아름다움, 단테의 「신곡」 같은 문학적 성취가 이루어진 시대이기도 하다. “암흑”은 지식의 부재가 아니라, 지식이 소수(주로 성직자)에게 독점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십자군은 순수한 신앙 운동이었는가?”
순수한 종교적 동기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많은 참전자가 순례의 마음으로 고향을 떠났고,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영토 확장의 욕심, 상업적 이익, 교황의 정치적 계산, 봉건 기사 계급의 모험심이 뒤섞여 있었다. 특히 제4차 십자군은 종교적 명분조차 유지하지 못한 사례였다. 십자군을 하나의 동기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면죄부는 돈으로 죄를 사는 것이었는가?”
엄밀히 말하면, 면죄부의 공식 교리는 죄 자체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한 후 남아 있는 현세적 형벌을 면제하는 것이었다. 고해성사에서의 진정한 회개가 전제 조건이었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는 이 구분이 무너졌다. 면죄부 판매자들은 마치 돈만 내면 모든 죄가 사라지는 것처럼 설교했고, 교황청은 이를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않았다(혹은 통제할 의지가 없었다). 교리와 현실 사이의 이 간극이 종교개혁의 직접적 도화선이 되었다.
현재는 어디에 있나
중세 교회가 남긴 유산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다. 베네딕트 수도회는 여전히 전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코회는 천주교 내 주요 수도회로 존속한다. 유럽의 대학들은 여전히 중세 교회가 놓은 기초 위에 서 있다.
면죄부 제도는 종교개혁 이후 천주교 내에서도 개혁되었다. 1567년, 교황 비오 5세는 면죄부 판매를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그러나 면죄부 자체가 폐지된 것은 아니다 — 오늘날에도 천주교는 특정 조건(기도, 성지 순례, 특정 축일 등)을 충족한 신자에게 면죄(대사)를 부여한다. 물론 금전 거래는 더 이상 개입되지 않는다.
십자군의 기억은 오늘날 종교 간 대화의 가장 민감한 주제 중 하나로 남아 있다.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십자군을 포함한 교회의 역사적 과오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그리고 위클리프와 후스가 뿌린 씨앗 — 성경의 최종 권위, 교황 무오류성의 부정, 신앙에 의한 구원 — 은 100년 뒤 종교개혁에서 만개했다. 중세의 그림자가 깊었기에, 종교개혁의 빛도 그만큼 강렬했다.
위클리프가 성경을 영어로 옮기고, 후스가 불꽃 속에서 철회를 거부했을 때, 그들은 아직 이기지 못했다. 위클리프의 뼈는 파내어져 불태워졌고, 후스의 재는 라인강에 뿌려졌다. 중세 교회는 그들을 지웠다고 믿었다. 그러나 불태운 뼈에서는 사상이 타지 않았고, 강에 뿌린 재는 유럽 전역으로 흘러갔다. 100년 뒤, 비텐베르크의 한 수도사가 교회 문에 못을 박았을 때, 그 망치 소리는 위클리프와 후스가 남긴 울림 위에 겹쳐졌다. 그가 누구이며, 그 못이 무엇을 터뜨렸는지 — 그것은 다음 편의 이야기다.
개혁주의의 견해
수도원 운동에 대하여. 개혁주의는 수도원이 문명 보존과 사회봉사에 기여한 역사적 공적을 인정한다. 그러나 수도원적 삶이 일반 성도의 삶보다 더 거룩하다는 중세적 이원론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칼뱅은 모든 직업이 하나님의 부르심(vocatio)이라고 가르쳤으며, 세속의 노동과 가정생활도 수도원의 기도 못지않게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라고 보았다. “기도하고 일하라”는 수도원의 모토는 아름답다. 그러나 개혁주의의 관점에서 이것은 수도원 담장 안에 갇힐 이유가 없다 —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기도와 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 고린도전서 10:31
십자군에 대하여. 개혁주의는 십자군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근본적으로 어긋난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한복음 18:36)고 말씀하셨으며,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태복음 26:52)고 경고하셨다. 무력으로 성지를 탈환하겠다는 발상은 복음의 본질과 양립할 수 없다. 교황이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선언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뜻이었다.
면죄부에 대하여. 면죄부는 종교개혁의 직접적 계기였으며, 개혁주의 신학이 가장 강하게 부정하는 중세 교리 중 하나이다. 개혁주의의 핵심인 오직 은혜(Sola Gratia)와 오직 믿음(Sola Fide)은 면죄부의 신학적 전제 — 인간의 행위나 교회의 공덕으로 형벌을 감할 수 있다는 것 — 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하며, 교황이나 교회가 그리스도의 공로를 “분배”할 권한은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1장은 “칭의는 오직 은혜로만”이라고 고백한다.
연옥 교리에 대하여. 면죄부의 전제가 되는 연옥 교리도 개혁주의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경 어디에도 사후에 정화의 고통을 거치는 중간 상태를 명확히 가르치는 구절이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2장 1항은 “사람의 영혼은 죽지도 잠들지도 않고”, 의인의 영혼은 “즉시 하나님께 돌아가 그분의 얼굴의 빛과 영광 가운데서 온전한 축복을 누린다”고 고백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 누가복음 23:43
위클리프와 후스에 대하여. 개혁주의 전통에서 위클리프와 후스는 높이 평가된다. 그들은 종교개혁자들이 선언한 핵심 원리 — 성경의 최고 권위, 교황 수위권의 부정, 은혜에 의한 구원 — 를 100년 먼저 주장했다. 물론 그들의 신학이 16세기 종교개혁자들만큼 체계적이지는 않았고, 여전히 중세 신학의 영향 아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진리를 위해 치른 대가 — 위클리프는 사후 파묘, 후스는 화형 — 는 교회에 영원한 증거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