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뿌리를 찾아서 D7: 20세기 복음주의 운동 — 빌리 그레이엄과 로잔 언약

교회의 뿌리를 찾아서 D7: 20세기 복음주의 운동 — 빌리 그레이엄과 로잔 언약

#교회사#복음주의#빌리그레이엄#로잔언약

이 블로그는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합니다. 이 글은 최대한 중립적으로 작성됐으며, 개혁주의적 견해는 글 하단 ‘개혁주의의 견해’ 섹션에 별도 표기합니다.

같은 단어, 다른 기억

한국 교회의 평균적인 50대에게 “복음주의”와 “부흥회”는 거의 같은 단어다. 1973년 5월 30일부터 6월 3일까지 닷새, 여의도 광장에 매일 110만 명이 모여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1918~2018)의 통역 설교를 들었다 — 한 도시 단위 집회로는 인류사 최대 규모였다고 Christianity Today 는 기록한다. 단상의 그림자는 작았고, 군중의 어깨는 끝없이 이어졌다. 한국 교회는 그날을 복음주의의 절정 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같은 단어가 21세기 한 청년에게는 다른 기억을 부른다 — 미국 대선 출구조사의 백인 복음주의자(white evangelical) 라는 표찰, 결단 손들기로 끝나는 수련회, 번영을 약속하는 강단. 복음주의라는 단어 하나가 어떻게 “1910년 The Fundamentals 5권”과 “1974년 로잔 언약”과 “1973년 여의도”와 “21세기의 환멸”을 동시에 담을 수 있는가.

지난 편(D6)에서 우리는 19세기 선교 운동이 부흥은 발이 자라난다는 명제로 한 세기를 채운 것을 보았다. 그 한 세기의 끝에서 자유주의 신학이 서구 교회의 척추를 침식했고, 20세기는 그 침식 위에서 복음주의가 자기 좌표를 다시 찾는 시대였다. 이 글은 그 좌표 작업의 이야기다.

역사적 배경 — 침식과 응답의 100년

자유주의의 그림자 (19세기 후반)

1860년대 이후 독일 자유주의 신학(슐라이어마허 → 리츨 → 하르낙)이 영어권 신학교를 점령해 갔다. 성경의 역사적 신뢰성을 의심하고, 동정녀 탄생·기적·육체적 부활을 비신화화하며, 기독교를 “하나님의 부성과 인간의 형제애” 라는 윤리 메시지로 환원했다.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황 무류성 선언이 가톨릭의 응답이었다면, 개신교 안에서는 누가 응답할 것인가가 한 세대의 질문이었다.

1910 — 다섯 근본 교리

1910년부터 1915년까지, 미국 캘리포니아의 두 평신도 사업가(라이먼·밀턴 스튜어트 형제)의 자비로 『근본 교리(The Fundamentals)』 12권(후에 4권으로 재편집)이 출간됐다. 90명의 보수 학자가 90편의 글을 기고했다. 이 책의 핵심에서 다섯 교리가 근본(fundamentals)으로 추출됐다.

  1. 성경의 무오성
  2.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3. 십자가의 대속
  4.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5. 그리스도의 재림

이것이 근본주의(Fundamentalism) 의 출발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방어선 이었다 — 자유주의가 다 양보해도 이 다섯은 양보할 수 없다.

1925 — 스코프스 재판과 후퇴

1925년 테네시 데이턴에서 한 고교 교사 존 스코프스가 진화론 강의로 기소됐다. 변호인 클래런스 대로우(자유사상가)와 검사 측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평신도 근본주의자)의 법정 공방이 라디오로 전국에 중계됐다. 법정에서는 근본주의가 이겼다 — 스코프스는 유죄였다. 그러나 여론과 신문 만평에서는 근본주의가 문화적 조롱거리 가 됐다. 이후 근본주의는 사회·학계·문화의 주류에서 한 세대 동안 후퇴해 자기 학교·자기 출판사·자기 라디오 안으로 들어갔다. 이 후퇴를 역사가 조지 마즈든은 “위대한 역전” 이라 부른다.

1942 — 신복음주의의 출범

1942년 보스턴에서 전미복음주의협회(NAE,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가 창설됐다. 중심에는 두 인물 — 칼 헨리(Carl F. H. Henry)와 해럴드 오켄가(Harold Ockenga)가 있었다. 그들은 자유주의를 거부했다. 그러나 동시에 근본주의의 반지성주의분리주의 도 거부했다.

1947년 오켄가는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에 풀러 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를 세웠다.

풀러 신학교 페이튼 홀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의 풀러 신학교 페이튼 홀(Payton Hall). 1947년 해럴드 오켄가와 라디오 부흥사 찰스 풀러가 공동 설립한 이 학교는 신복음주의가 학문적 정밀성과 사회적 책임을 회복하는 거점이 됐다. 칼 헨리·에버렛 해리슨·조지 래드 같은 신학자들이 초기 교수진을 이뤘다. 출처: Bobak Ha’Eri, 2008, Wikimedia Commons, CC BY 3.0. 같은 해 칼 헨리는 『현대 근본주의의 불편한 양심(The Uneasy Conscience of Modern Fundamentalism)』 을 출간하며 복음주의가 사회로부터 도망친 자리에서 다시 사회로 들어와야 한다고 외쳤다. 1956년 그가 편집장이 되어 창간된 Christianity Today 가 이 새 운동의 잡지가 됐다. 사람들이 이를 신복음주의(Neo-Evangelicalism) 라 불렀다 — 사실상 오늘 우리가 복음주의(Evangelicalism) 라 부르는 그 운동의 본체다.

빌리 그레이엄, 1966년 빌리 그레이엄(1918-2018). 1966년 4월 11일 워싱턴 D.C.에서 워런 K. 레플러(Warren K. Leffler)가 촬영한 사진. 미국 U.S. News & World Report 지가 미 국회도서관에 기증할 때 모든 권리를 공공에 헌정했다. 출처: Warren K. Leffler / U.S. News & World Report,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1949 — 빌리 그레이엄의 출범

1949년 가을, 31세의 한 침례교 부흥사가 LA 다운타운 공터에 천막을 치고 8주간 집회를 열었다. 그의 이름은 빌리 그레이엄. 신문 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산하 신문사들에 “이 사람을 띄워라(puff Graham)” 라는 두 단어 메모를 보냈고, 한 도시 부흥회가 미 전역의 사건이 됐다. 이후 70년 동안 그는 약 185개국에서 직접 설교했고, 약 2억 1500만 명이 그의 집회에 직접 참석한 것으로 BGEA(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는 집계한다. 라디오·텔레비전 청취자까지 합치면 22억 명. 사도 바울 이후 한 사람이 직접 마주한 가장 많은 청중이었다.

1966·1974·1989·2010 — 세계가 모이다

빌리 그레이엄은 자기 영향력이 커질수록 세계 복음주의의 합의 형성 을 자기 사명으로 보았다. 1966년 베를린 세계 전도 대회, 1974년 스위스 로잔의 세계 복음화 국제 대회(International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 1989년 마닐라 II, 2010년 케이프타운 III — 네 차례의 글로벌 대회가 열렸다.

이 중 1974년 로잔이 결정적이었다. 150개국에서 2,700명의 대표가 모였다. 영국 성공회의 존 스토트(John Stott, 1921~2011)가 기초 위원장을 맡아 로잔 언약(Lausanne Covenant) 15조를 작성했다. 이 언약은 21세기까지 세계 복음주의의 합의 문서로 남아 있다.

1973년 5월·6월 — 여의도 광장

이 모든 흐름이 한국에 도착한 정점이 1973년 여의도였다. 닷새 동안 누적 약 320만 명, 마지막 날 110만 명. 통역은 김장환 목사였다. 그날 결단 카드를 작성한 사람이 약 7만 5천 명으로 집계된다. 이 한 차례의 집회가 한국 복음주의 교회 성장기의 상징이 됐고, 이후 1974년 엑스플로 74(여의도 광장 누적 650만 명)와 1980년 세계 복음화 대성회로 이어진다.

핵심 교리와 특징

베빙턴의 4축

영국 역사학자 데이비드 베빙턴(David Bebbington)이 1989년 정식화한 복음주의의 네 축 은 학계의 표준 정의가 됐다.

  1. 성경 중심성(Biblicism) — 성경의 최종 권위
  2. 십자가 중심성(Crucicentrism) — 그리스도의 대속의 중심성
  3. 회심 중심성(Conversionism) — 한 사람이 그리스도께 돌이키는 결단
  4. 활동 중심성(Activism) — 전도와 사회 봉사로의 능동적 참여

이 네 축은 신앙고백서의 조항이 아니라 운동의 DNA 다. 이 네 축을 가진 한 사람은 장로교든 침례교든 감리교든 오순절이든 — 자기 교파를 유지한 채로 복음주의자 라는 이름을 함께 입는다. 복음주의가 교파 가 아니라 운동(movement) 인 이유가 여기 있다.

신복음주의의 차별점 — 사회로 다시 들어가다

근본주의가 1925년 이후 사회를 떠났다면, 신복음주의의 가장 큰 변화는 사회로 다시 들어옴 이었다. 칼 헨리의 1947년 책 한 권이 그 신호탄이었다. 사회 정의·시민권·기아·문맹·인종 화해 — 자유주의에 양보했던 영역을 복음주의는 다시 자기 일로 받아들였다.

이 흐름의 정점이 1974년 로잔 언약 5조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인간의 화해와 정의에 깊은 관심을 가지신다는 것을 확언한다. … 따라서 우리는 회개하지 않은 우리의 무관심을 통회하며, 사회 참여(social involvement)가 그리스도인의 의무라는 점을 인정하지 못한 것을 회개한다. … 전도와 사회·정치적 참여는 둘 다 그리스도인의 의무다.

— 로잔 언약 5조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1974

이 다섯 줄이 20세기 복음주의를 1925년의 후퇴에서 다시 사회의 한복판으로 끌어냈다. 작성자는 존 스토트였다.

존 스토트 존 스토트(1921-2011). 영국 성공회 사제이자 1974년 로잔 언약의 기초 위원장. 평생 런던 올 솔즈(All Souls Langham Place) 한 교회의 목회자로 머물렀다. 출처: Langham Partnership International (BlueMoses 업로드), Wikimedia Commons, CC BY 3.0.

존 스토트라는 사람

빌리 그레이엄이 전도자 의 얼굴이라면, 존 스토트는 신학자·목회자·기초 작성자 의 얼굴이었다. 그는 평생 한 교회(런던 올 솔즈)의 목회자로 머물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제자도·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같은 책으로 한 세대의 강단을 다시 세웠다. 2005년 Time 지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에 그를 단독 복음주의자로 올렸을 때, 그가 한 일은 잡지 표지 사진 촬영을 정중히 거절한 것이었다.

스토트가 로잔에 남긴 또 한 가지가 있다. 1974년 회의 마지막 날, 르네 파딜라(René Padilla, 에콰도르)와 사무엘 에스코바르(Samuel Escobar, 페루) 같은 라틴아메리카 신학자들이 미국식 복음주의 = 정치적 보수 의 등식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스토트는 그들의 비판을 막지 않고 받았다. 5조 「사회적 책임」이 언약문에 들어간 것은 그 결정의 결과였다. 복음주의가 미국의 한 지방 운동으로 굳지 않고 세계 운동 이 된 결정적 순간이었다.

오해와 진실

오해 1 — “복음주의 = 미국 우파”

미국 언론이 evangelical백인 정치 보수 의 동의어로 사용하면서 굳어진 오해다. 그러나 복음주의는 본질적으로 신학적 운동 이지 정치적 진영 이 아니다. 21세기 세계 복음주의 인구는 약 6억 명으로 추산되고, 그중 다수는 라틴아메리카·아프리카·아시아의 비백인 비미국인이다. 한국·브라질·나이지리아·중국 가정교회 — 이들은 미국 정치 좌표에서는 어느 한쪽으로 분류될 수 없다.

오해 2 — “복음주의 = 부흥회 결단주의”

지난 편(D1)에서 다뤘듯, 결단의 손들기 는 19세기 찰스 피니의 새로운 방법(new measures) 에서 유래한 한 갈래일 뿐 복음주의 전체가 아니다. 빌리 그레이엄 자신이 후기에는 자기 결단 카드 시스템에 대해 자주 말했다 — “카드를 쓴 사람이 곧 회심한 사람이라 생각한 적은 없다. 결단 카드는 지역 교회로 그 사람을 연결하는 다리일 뿐이다.” 그는 모든 집회에서 결단자에게 지역 교회의 양육 을 의탁하는 시스템을 고집했고, 이 한 가지가 그를 19세기 후반 부흥사들과 구별한 결정적 차이였다.

오해 3 — “복음주의 = 반지성”

1925년 스코프스 재판 이후 한 세대의 후퇴가 만든 인상이지만, 신복음주의 70년의 역사는 정확히 그 반대 방향으로 흘렀다. 풀러·휘튼·트리니티·고든-콘웰·웨스트민스터 — 20세기에 학문 전통을 회복한 복음주의 신학교들이다. 칼 헨리의 『하나님, 계시, 권위(God, Revelation and Authority)』 6권은 20세기 영어권 조직신학의 표지석 중 하나다. 마크 놀(Mark Noll)의 1994년 책 『복음주의 정신의 스캔들(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Mind)』 은 복음주의의 반지성주의 잔재를 내부에서 비판한 자기 진단의 책이었다 — 첫 문장이 유명하다. “복음주의 정신의 스캔들은, 복음주의 정신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 한 문장이 만든 자기 성찰이 21세기 영어권 복음주의 학계의 새 흐름을 열었다.

오해 4 — “복음주의 = 사회 무관심”

1974년 로잔 언약 5조 이후 이 오해는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2010년 케이프타운 언약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환경·이주민·박해받는 교회·세계 빈곤·인신매매 를 복음주의의 의제로 명시했다. 복음주의 안에 사회 참여 를 둘러싼 지속적 긴장은 있다. 그러나 무관심 은 이미 합의된 의제가 아니다.

현재는 어디에 있나

한국 — 운동의 다층성

한국 복음주의의 지형을 한 줄로 그릴 수는 없다. 한기총·한교총 같은 연합 기구, CCC·IVF·예수전도단 같은 캠퍼스 선교단체,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같은 사회 참여 그룹, 분당우리교회·사랑의교회 같은 대형 교회의 갱신 흐름, 학원복음화협의회·복음과상황 같은 신학·문화 매체 — 이 모두가 자기를 복음주의 라 부른다. 1974년 로잔 한국 위원회가 출범한 이래 한국은 세계 로잔 운동의 핵심 거점 중 하나였고, 2024년 9월 인천 송도에서 열린 제4차 로잔 대회(Lausanne 4)는 약 200개국 5,400명을 모은 21세기 최대의 글로벌 복음주의 회의였다.

세계 — 남반구로 이동한 무게중심

21세기 기독교의 무게중심은 이미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이동했다. 2050년이면 세계 그리스도인의 약 75%가 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아시아에 살 것으로 Pew Forum 은 추산한다. 케냐·나이지리아·브라질·중국 가정교회·한국 — 이들이 21세기 세계 복음주의의 새 척추다. 복음주의가 미국 운동이라는 인상 은 이미 통계적으로 시대착오다.

도전 — 정치 도구화·번영신학·세대 단절

복음주의가 21세기에 마주한 세 가지 큰 도전이 있다.

첫째, 정치 도구화. 미국에서는 트럼프 시대 이후 복음주의자 라는 단어가 신학적 정의를 잃고 정치적 부족(部族, tribe)의 표찰로 전락했다는 자기 진단이 운동 내부에서 거듭 나오고 있다. 한국에서도 광장 정치와 강단의 거리감이 모호해지는 일이 반복된다.

둘째, 번영신학. 라틴아메리카·아프리카·한국의 일부 대형 사역에서 번영의 약속이 복음의 자리 를 차지한다. 이는 본 시리즈가 따로 다룬 주제이며(번영신학 2부작), 복음주의 내부의 가장 첨예한 비판 대상이다.

셋째, 세대 단절. 젊은 세대가 복음주의 라는 이름표를 떠나는 흐름이 한국·영미 모두에서 관측된다.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 정치 결합·성 윤리 논쟁·교회의 권위주의·번영주의에 대한 환멸이 모두 섞여 있다. 빌리 그레이엄이 2018년 99세로 별세한 뒤, 그가 대표한 형식의 복음주의 가 다음 세대에 어떻게 전수될 것인가는 아직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이다.

부흥은 다시 어디로 가는가

20세기 복음주의의 100년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이렇다 — 자유주의의 침식 앞에서 다섯 근본 교리로 방어선을 긋고, 근본주의의 후퇴를 떠나 신복음주의로 사회로 다시 들어왔으며, 빌리 그레이엄의 강단과 존 스토트의 로잔 언약으로 자기 좌표를 세계화했다.

그 100년의 끝에서 우리는 다시 묻는다. 복음주의는 다음 세기에도 같은 단어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이름을 입을 것인가. 그 질문에 답하는 길은 한 가지뿐이다 — 베빙턴의 네 축으로 돌아가는 것. 성경의 권위, 십자가의 중심성, 회심의 실재, 그리고 사회로 다시 들어가는 활동. 이 네 가지가 살아 있는 한, 단어는 바뀌어도 운동은 살아남는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 디모데후서 4:2

여의도 광장의 110만 명도 사라지고, 빌리 그레이엄의 마지막 호흡도 멎었다. 그러나 그가 평생 외쳤던 한 본문은 그대로 남아 있다 — “성경은 말한다(The Bible says).” 이 짧은 어구가 20세기 복음주의의 가장 정직한 자기 정의였다.


개혁주의의 견해

20세기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개혁주의의 평가는 크게 환영, 분별, 회복 의 세 단으로 정리된다.

환영 — 운동이 회복한 것들

복음주의 운동이 회복한 것들은 종교개혁의 다섯 솔라(Sola Scriptura·Sola Fide·Sola Gratia·Solus Christus·Soli Deo Gloria) 와 일치한다. 성경의 최종 권위(Sola Scriptura), 십자가의 대속과 이신칭의(Sola Fide·Sola Gratia·Solus Christus), 회심의 실재 — 이 모든 것이 자유주의가 비신화화하려 했던 바로 그 지점이며, 복음주의가 한 세기 동안 지켜낸 자리다. 개혁주의는 이 자리에서 복음주의와 근본적으로 한 가족 이다. 빌리 그레이엄 한 사람이 한 세기에 걸쳐 한 일 — 성경의 권위와 십자가의 대속을 단순한 언어로 두 대륙에 전한 일 — 은 한 인간이 한 세기에 할 수 있는 일의 한계 가까이를 보여줬다. 개혁주의가 그를 비판할 자격을 갖기 전에, 먼저 감사해야 할 자리다.

분별 — 복음주의가 잃기 쉬운 네 가지

그러나 복음주의 일반 이 잃기 쉬운 것들도 분명하다. 개혁주의가 복음주의 안에서 끊임없이 환기해야 할 네 가지가 있다.

첫째, 결단주의(decisionism)의 위험. 19세기 피니의 새로운 방법 에서 흘러온 결단 손들기 = 회심 의 등식은 도르트 신경(전적 부패·무조건적 선택·불가항력적 은혜)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빌리 그레이엄 자신이 결단 카드는 회심의 증명서가 아니라 지역 교회로의 다리 라 했지만, 한국 강단에서는 이 구별이 거의 사라졌다.

둘째, “단순한 복음” 강조의 부작용 — 교리 빈곤. 복음주의는 전도가 가능한 단순한 메시지 를 강조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교리적 폭과 깊이 를 양보해 왔다. 결과는 베빙턴의 네 축은 알지만 사도신경의 한 조항도 풀어 설명하지 못하는 신자다. 마크 놀이 진단한 “복음주의 정신의 스캔들” 의 한 측면이 여기 있다.

셋째, 개인 회심 중심이 약화시킨 언약 신학과 교회론. 나 한 사람의 회심 을 핵심으로 두면서, 언약 공동체로서의 교회·언약의 자녀로서의 신앙 양육·가시적 교회의 직제와 권징 같은 개혁주의의 강조가 흐려진다. 한국 복음주의가 작은 모임·셀·집회 의 강조 뒤에서 지역 교회의 회중적 무게 를 잃어버린 한 이유가 여기 있다.

넷째, 사회 참여의 얕음 — 공적 신학으로 깊어지지 못한 한계. 1974년 로잔 5조의 회복은 위대했으나, 그것이 공적 신학(public theology) 으로 깊어진 것은 아니다. 어떤 영역에서 어떤 신학적 근거로 어떤 방식으로 참여하는가에 대한 정밀한 신학이 부재한 채로 참여 만 강조될 때, 그것은 한 시기에는 보수 진영의 도구가 되고 다른 시기에는 진보 진영의 도구가 된다. 양쪽 모두 복음주의 자신의 신학적 자율성이 무너진 결과다.

회복 — 두 전통이 만나야 할 자리

개혁주의가 복음주의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자세는 대결 이 아니라 결합 이다. 복음주의의 열정과 단순성과 전도 사명 은 살리되, 개혁주의의 교리적 정밀성과 언약 신학과 교회론 과 결합되어야 한다. 1974년 로잔 언약이 보여준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양립 은 우연이 아니라 신칼뱅주의(아브라함 카이퍼·헤르만 바빙크)의 **영역 주권(sphere sovereignty) 신학과 자연스럽게 만난다. 카이퍼의 “인간 삶의 전 영역 중 만유의 주재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는 내 것이다’ 라고 외치지 않으시는 곳은 단 한 평방 인치도 없다” 는 1880년 자유대학교 개교 연설은, 100년 뒤 로잔의 5조와 같은 곡선을 그린다.

한국 교회의 길도 같은 자리에 있다. 부흥회 결단주의 가 아니라 언약적 회심·교회 중심 양육. 대중 집회의 통계 가 아니라 지역 교회의 권징과 양육. 정치 진영의 도구화 가 아니라 공적 신학에 근거한 분별 있는 사회 참여. 1907년 평양 대부흥의 회개와 1973년 여의도의 결단을 자기 역사 안에 동시에 가진 한국 교회가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은, 두 전통의 결합 위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 골로새서 2:6-7

뿌리를 박으며(개혁주의의 교리), 세움을 받아(복음주의의 양육), 굳게 서서(공적 신학의 분별), 감사함을 넘치게(전도의 열정). 한 본문 안에 두 전통이 함께 있다. 20세기 복음주의가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부탁은, 이 한 본문 위로 두 전통이 다시 만나는 것이다.

공유하기

이어서 읽기

auto_awesome

Soli Deo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