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뿌리를 찾아서 B2: 동방정교회 — 서방이 잊은 또 하나의 2천 년

교회의 뿌리를 찾아서 B2: 동방정교회 — 서방이 잊은 또 하나의 2천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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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4년 7월 16일, 하기아 소피아의 제단

하기아 소피아 내부 콘스탄티노플 하기아 소피아 내부. 1054년 7월 16일, 이 제단 위에 동서 교회의 운명을 가른 파문장이 놓였다. 출처: Wikimedia Commons, CC BY-SA.

한 통의 문서가 제단 위에 놓였다. 로마 교황 레오 9세의 특사 훔베르트 추기경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를 파문한다는 교서였다. 케룰라리오스는 즉시 맞파문으로 응수했다. 역사는 이 하루를 “대분열(Great Schism)“로 기록한다.

그러나 이 장면은 1054년 갑자기 벌어진 사건이 아니다. 그 이전 수백 년 동안 동과 서는 언어(라틴어 vs 헬라어), 정치(교황권 vs 황제권), 예전, 그리고 결정적으로 신학에서 서서히 갈라지고 있었다. 제단 위의 파문장은 이미 벌어진 균열의 서명일 뿐이었다.

한국 개신교 신자 대부분에게 동방정교회는 낯선 이름이다. 러시아 드라마의 금빛 성화, 이국적 향연(香煙)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서울 마포의 성 니콜라스 대성당에는 지금도 한국정교회 신자들이 예배드리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는 2억 명 이상이 이 전통을 따른다. 서방 교회가 잊은 또 하나의 2천 년이 거기 있다.

동방정교회의 지리적 골격 — 5대 총대주교구와 자주교회 지도 5대 총대주교구는 로마·콘스탄티노폴리스·알렉산드리아·안티오크·예루살렘이었다. 1054년 대분열로 로마가 떨어져나간 뒤 동방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키예프·모스크바로 북상했고, 19~20세기에 그리스·세르비아·루마니아·불가리아·조지아 자주교회로 확장되었다. 점선은 비잔틴 선교가 슬라브 세계로 퍼진 길이다.

필리오케 — 한 단어가 교회를 갈랐다

동서 분열의 교리적 심장에는 라틴어 한 단어가 있다. 필리오케(Filioque) — “그리고 아들로부터.”

본래 325년 니케아 신경과 381년 콘스탄티노플 신경은 성령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다.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신다.” 그러나 6세기 스페인 톨레도 공의회 이후 서방 교회는 이 구절에 “그리고 성자로부터(Filioque)“를 덧붙이기 시작했고, 11세기 무렵 로마가 이를 공식화했다.

동방은 이를 이중으로 거부했다. 첫째, 공의회가 확정한 신경을 일방적으로 수정한 것은 보편 교회의 합의를 깨뜨린 월권이다. 둘째, 신학적으로 성령의 발출 원리가 성부와 성자 양쪽에 있다면, 삼위일체 내부의 단일한 원천(monarchia)이 훼손된다는 것이다. 9세기 총대주교 포티우스는 이것을 삼위일체론의 근본 오류로 규정했다.

그렇다면 개혁주의는 어느 편인가. 성경의 증거는 이렇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 요한복음 15:2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 요한복음 16:7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시되, 성자에 의해 보내심을 받는다. 서방의 필리오케는 성자가 성령 발출에 관여함을 고백하여 이 구절들의 증거에 충실하려 한 것이다. 다만 표현의 정교함에서 보자면, 성령은 성부로부터 원리적으로(principaliter) 나오되 성자와의 관계 안에서 나오신다고 말할 때, 동방의 우려(성령의 종속)도 비껴갈 수 있다. 칼뱅이 기독교강요 제1권에서 삼위일체를 다룰 때 취하는 신중함이 바로 이 자리다.

이콘 — 성육신이 형상화를 정당화하는가

안드레이 루블료프, 삼위일체 이콘 안드레이 루블료프(c. 1360–1430)의 「삼위일체」(15세기 초). 마므레의 세 천사를 통해 삼위일체를 형상화한 동방 이콘의 정수.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소장. 출처: 안드레이 루블료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이콘 공경을 정식 교리로 확정했다. 논거는 성육신이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셨으므로, 그분의 형상은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동방은 엄격히 구분한다. 이콘에 드리는 것은 경배(latreia)가 아니라 공경(timē)이다. 경배는 오직 하나님께만.

그러나 제2계명의 무게를 듣는 귀에 이 구별은 불충분하다.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 출애굽기 20:4-5

이 명령은 거짓 신의 형상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참 하나님을 어떤 가시적 형상으로도 표상하려는 시도 자체를 금한다. 성육신이 형상화를 정당화한다는 논리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나누어 인성만을 그릴 수 있다고 가정하는데, 이는 위격적 연합(hypostatic union)에 비추어 신학적으로 정합하지 않다. 칼케돈 공의회가 확정한 “나누이지 않고, 분리되지 않는” 두 본성의 연합을 기억한다면, 인성만 분리해 캔버스에 옮기는 순간 그리스도는 이미 그 그리스도가 아니다.

블라디미르의 성모 이콘 「블라디미르의 성모」(12세기). 비잔틴에서 키이우 루스로 전해져 러시아 정교회의 가장 사랑받는 이콘이 되었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소장.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신화(theosis) — 동방의 구원론

동방 구원론의 핵심 범주는 신화(theosis, 神化)이다. 4세기 아타나시우스의 유명한 명제가 이를 요약한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이 신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14세기 그레고리우스 팔라마스는 이를 정교화하여, 피조물은 하나님의 본질(ousia)에는 결코 참여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에네르게이아(energeia, 활동·에너지)에는 참여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성경적 뿌리가 없지 않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 베드로후서 1:3-4

문제는 이 구조 안에서 서방 종교개혁이 회복한 법정적 칭의(iustificatio forensica)가 희미하다는 것이다. 동방은 죄를 주로 죽음과 부패(phthora)의 문제로 이해하고, 구원을 신적 생명에의 참여로 이해한다. 풍성한 통찰이다. 그러나 죄책(reatus)의 문제, 곧 의로운 재판관 앞에서 죄인이 어떻게 의롭다 선언받는가라는 질문은 선명하지 않다. 바울은 이 질문을 피해 가지 않았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 갈라디아서 2:16

개혁주의 전통은 성화와 영화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glorificatio)는 동방의 theosis와 상당 부분 겹친다. 다만 한 가지는 양보할 수 없다.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의 존재론적 간격은 영화 이후에도 영원히 유지된다. 우리는 “신적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만, 신이 되지는 않는다. 연합은 본질의 혼합이 아닌 관계적·언약적·법적 연합이다.

성경과 전통 — 권위의 문제

가장 근본에는 권위 문제가 있다. 동방정교회는 성경과 거룩한 전통(Holy Tradition)을 계시의 두 원천으로 본다. 일곱 공의회, 교부들의 합의, 전례, 이콘 모두 전통의 일부이며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다.

종교개혁이 회복한 Sola Scriptura는 전통의 유용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칼뱅만큼 교부를 자주 인용한 종교개혁자도 드물다. 다만 전통은 성경의 해석을 돕는 보조적 증언일 뿐, 성경과 나란히 서는 권위의 원천일 수 없다. 인간의 합의가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해지는 순간, 결국 말씀이 사람의 말 아래로 내려앉는다.

한국 교회,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경계할 것인가

한국 교회와 동방정교회 사이에는 불편한 공명이 있다. 체험 중심 신앙, 신비적 연합의 강조, 예배의 감각적 무게. 이 공명은 긍정적으로는 기회이고, 부정적으로는 위험이다.

배울 것. 금빛 성화와 연기 피어오르는 향, 천 년 이상 불려온 성가 앞에서 동방 신자는 몸으로 하나님의 거룩을 체현한다. 예배를 문화 콘텐츠로 소비하는 시대에,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는 본능은 개혁주의 예배가 회복해야 할 무게다. 삼위일체의 위격적 교제(perichoresis)를 지우지 않는 신학적 신중함, 갑바도기아 교부들이 남긴 “한 본질, 세 위격”의 언어도 칼뱅이 직접 의존한 유산이다.

경계할 것. 전통과 성경의 동등화, 마리아와 성인에게 올려지는 중보 기도, 칭의와 성화의 흐릿한 경계, 이콘 공경. 이 네 가지는 Sola Scriptura의 렌즈로 볼 때 양보할 수 없는 분기점이다.

형제이되, 개혁이 필요한 전통

동방정교회는 이단이 아니다. 니케아 신경을 보존하고 삼위일체와 성육신의 정통을 지켜온 고대 교회의 유산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공교회적 유산(catholica hereditas)을 함께 소유한 형제를 본다.

그러나 형제라고 해서 분별이 면제되지는 않는다. 2천 년을 이어 온 전통이라 할지라도, 복음의 심장 —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는 죄인의 확신 — 이 흐릿해질 때, 그 전통은 개혁(reformatio)이 필요하다. Sola Scriptura, Sola Gratia, Sola Fide. 오래됨이 곧 옳음은 아니다. 오래된 것은, 말씀 앞에서 다시 검증받음으로써만 산다.

1054년 하기아 소피아의 제단에 놓인 그 파문장은 여전히 걷히지 않았다. 서방이 잊은 또 하나의 2천 년은 지금도 거기에 있다. 우리는 그 앞에서 귀를 열되, 말씀의 저울을 내려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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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i Deo Gloria